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605화 (605/615)

605화 출병(出兵) (4)

지금, 이 순간.

단 한 번의 전투.

대한제국의 사람들은 49일간 처절하게 준비해 왔다면,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기약이 없는 세월에 치밀어 오르는 의문을 삼켜 내야만 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당장 인류의 명운이 걸려 있다면 10년이고 20년이고 당연하게 받아들였겠지만,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마지막 결전을 위해서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30년 동안 반복되는 훈련을 담담하게 이행했다.

사람들은 알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아이러니하게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과정은 30년의 세월이 흐르며 거대한 의지로 변화했다.

언젠가 찾아올 미래.

그때를 위한 확실한 대비.

대한제국의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갑자기 나타나 전투에 참전한다고 생각하지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이 한 번의 전투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위험하지 않은 상황, 위험한 상황, 함락당해서 절체절명의 위기일 때, 절대자의 출몰 등등.

수많은 가능성을 논의하며 각 상황에 대해 대비했고, 크리스는 현실을 확인하자마자 ‘그중 하나’를 선택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플랜 C를 가동하라!”

“플랜 C다!”

“플랜 C를 가동하라!”

병사들이 복명복창했다.

플랜 C.

절체절명의 위기.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거세게 몰아쳐 몬스터들을 밀어낸 뒤에, 공병(工兵)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성벽을 강화하라!”

“지금부터 성벽을 강화한다!”

쿠르르르르르릉.

마법 아티팩트가 빛을 발했다.

공병들의 눈이 새하얗게 물들며 마력에 동화되었고, 그들의 손짓에 따라 마력이 성벽 곳곳을 파고들며 파괴되었던 부분들을 보수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력으로 인해 성벽의 강도가 대폭 향상되었다. 드미트리의 기술력과 마법 문명이 결합해, 순식간에 단단한 성벽을 형성했다.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수도 없이 반복했던 훈련대로, 조금의 혼란도 없이 완벽한 합으로 전장을 장악해 나갔다.

그런 상황에.

하늘 위로 거대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파이어 브레스.]

[포이즌 브레스.]

화르륵.

콰콰콰콰콰콱!

S등급 몬스터들이었다.

그들이 인간들을 방해하고자 마력을 발산하자, 이번에는 펠릭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거대한 방어 마법을 형성했다.

드래곤의 파멸적인 권능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수백의 마법사들이 단 하나의 브레스를 막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 한두 명만 힘을 합쳐도 전혀 밀리는 모습이 없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팟.

파파파파팟.

크리스를 비롯한 검사들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마법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플라이 마법’으로 검사들에게 비행 능력을 부여했고, 드래곤들이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크리스의 예리한 검법이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건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로 빠른 검법이었다.

크리스는 전장을 확인하며 즉각적으로 명령을 내리면서도, 본인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들은 상대의 등급을 가리지 않고 단번에 찢어발겼다.

하나부터 열까지.

체계적인 대응이었다.

순식간에 대한제국이 안정을 되찾자, 크리스는 김준혁에게 다가가 물었다.

“드미트리 제국의 크리스라고 합니다. 지금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간결한 물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김준혁은 완전히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 * *

현재 상황.

그 물음을 단번에 이해했다.

드미트리 제국은 이제야 참전했으니, 앞으로의 방향성과 현재 돌아가는 판도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김준혁이 말했다.

“대한제국에서 절대자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최초로 격돌한 직후, 절대자들은 정면 승부로는 가망이 없다는 판단에 전 세계를 무대로 게릴라 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게이트를 통해 밀려드는 몬스터들은 무한하기에, 아무래도 그들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인간들의 숫자를 줄이려는 계획인 것 같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곧바로 절대자들을 추격했으며, 열둘로 추정되는 절대자 중 셋을 직접 처리했고, 백의의 마법사가 하나를 처리하면서 지금은 여덟의 절대자가 남은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아홉의 절대자를 예상했다.

하지만 정보부의 박기태가 전 세계에서 밀려드는 정보들을 조합해, 절대자는 열둘이 존재한다고 확언했다.

사실 인류 전체를 보았을 때는 희망적인 상황이었다.

아직 수장으로 보이는 볼피르를 처리하지 못했지만, 대재앙이 발발하고 겨우 몇 시간 만에 넷을 처리했으니 말이다.

“대한제국의 전략은 간단합니다. 버티면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절대자 전부를 처리할 때까지 생존하는 것. 그것이 계획의 전부입니다.”

대화는 짧았다.

빠르게 상황을 전해 들은 크리스는, 김준혁의 말에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황제 폐하.’

익숙한 상황이었다.

드미트리가 마계를 상대할 때.

그동안 혁혁한 공을 세운 크리스와 케빈조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계로 넘어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존하는 것밖에 없었고, 그렇게 아득바득 발악하는 동안 로만 드미트리가 승부를 결정 지었다.

김준혁의 얼굴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의지와 스스로의 나약함에 실망한 모습. 지금의 대한제국이 강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크리스는 그들의 모습에서 30년 전의 자신을 발견했다.

‘매우 절망스럽겠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지난 노력이 의미가 없는 것 같겠지.’

하지만.

의미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와 같은 상황은, 로만 드미트리가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였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켜야 할 사람들.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존재.

만약 대한제국이 절망적인 상황에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동력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드미트리를 지키려던 것처럼, 대한제국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는 단순히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아닌, 30년 전의 그때처럼 대한제국의 생존이라는 완벽한 결과를 바랐다.

크리스가 말했다.

“지금부터 황제 폐하에게 제 메시지를 전달해 주십시오. 대한제국의 안전은 드미트리 제국이 확보할 것이며, 일부 병력을 편성해 절대자들이 나타나는 지역들에 즉각 대응할 것입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다.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던 로만 드미트리에게, 크리스는 모두의 진심을 대변해 전달했다.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대로 날뛰십시오.”

* * *

그 시각.

위기를 맞이한 나라가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득바득 버텨 내던 중국은, 한 존재의 등장으로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푹!

“커, 커헉!”

중국의 무인이 피를 토해 냈다.

그는 S등급의 실력자였지만, 눈앞의 사내를 상대로 단 1분도 버티지 못했다.

암영의 수장.

백무진.

사람들에게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그가, 수많은 몬스터를 거느리며 중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같잖기는.”

스윽.

검을 빼냈다.

방금까지 생생하게 움직이던 사내의 몸이 축 늘어졌고, 백무진은 마치 쓰레기라도 버리는 것처럼 사내를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분노가 치밀었다. 당장에라도 백무진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조금 전에 보여 준 광경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왕위룡이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너 설마…….”

“그래. 나는 절대자님들의 힘을 물려받아, 진짜 천마검법을 완성시켰다.”

씨익, 웃었다.

조금 전.

백무진을 처리하겠다고 달려들었던 S등급 헌터는, 백무진이 펼친 천마검법에 그대로 쓸려 나갔다. 왕위룡조차도 이번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천마검법’을 따라 했다고는 하나, 벽화를 흉내 냈던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완성도였다.

파멸적이었다.

왕위룡은 본능적으로 백무진을 쓰러트릴 수 없음을 알았다.

‘큰일이다. 몬스터들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백무진의 존재는 중국에 분열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이 와중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사방에서 중국 병사들의 비명이 들렸고, 백무진은 들뜬 모양인지 웃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난 말이야. 항상 스스로를 천마신교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너희가 매우 거슬렸어. 겨우 벽화의 검흔 정도로 본인들을 그렇게 표현하는 꼴이 정말 같잖았지. 왕위룡. 결국에는 너희는 아무것도 이루어 내지 못했어. 겨우 가짜를 따라 하다, 진짜인 나를 만나 멸망하는 것이 너희의 미래인 것이지.”

콰릉.

콰르르르르릉.

마력을 끌어 올렸다.

절대자는 그에게 명했다.

인류를 파멸시키라고.

꼭두각시가 되는 조건으로 힘을 물려받은 그는, 중국을 시작으로 절대자를 위한 축제를 시작하려 했다.

“자, 오늘을 끝으로 선조의 악연은 끝이다.”

활짝 웃는 백무진.

그를 상대로 왕위룡은 이를 악물었다.

* * *

콰앙!

콰콰콰콰콱!

왕위룡이 성벽에 처박혔다.

친위대와 동시에 백무진을 공격했던 그는, 압도적인 무력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쿨럭.”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참담했다.

본인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다.

김판석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이후, 왕위룡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밤낮으로 훈련했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사실은 알았다.

한때 사람들은 왕위룡을 대륙 제일검이라고 칭송했지만, 가짜 천마검법을 익힌 자신에게는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자질이 부족했다.

현실을 받아들였다.

열등감을 발전의 씨앗으로 삼았다.

언젠가 김판석을 넘어서기 위해, 로만 드미트리에게 진정한 천마신교의 후예로 인정받기 위해.

국정도 뒤로 미뤄 두고 훈련에 매진했다.

대재앙이 찾아왔을 때 자신이 무언가를 해내길 바랐다.

그런데 이런 몰골이라니.

머리는 팽팽 돌았고, 입가는 피로 흥건했다.

한계였다.

이대로라면 백무진에게 죽는 것은 시간문제였지만, 그렇다고 그를 상대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천마신교의 후예다.’

왕위룡의 선조.

그는 겨우 그림쟁이에 불과했다.

진짜 천마신교를 물려받은 존재는 아니었지만, 왕위룡은 항상 천마신교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지녔다.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뜻을 이었냐, 이어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왔던 왕씨 가문의 뜻은, 스스로의 근본이 천마신교에 있음을 증명했다.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이빨이 바스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말이다. 천마신교의 후예다. 부러질지언정,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건방진 새끼.”

백무진이 다가왔다.

이젠 끝낼 차례였다.

왕위룡을 가지고 노는 것도 이제는 싫증이 났다.

이곳을 정리한 뒤에, 대한제국을 공격할 생각에 백무진은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왕위룡을 향해 다가갔다.

일촉즉발의 상황.

왕위룡도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그때.

휘잉-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룡아. 제법 천마신교의 일원다운 말을 하는구나.”

왕위룡이 눈을 부릅떴다.

확실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히.

“뒤로 물러나라. 지금부터는 천마신교의 후예이며,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이인자인 나 김판석이 정리하겠다.”

백의의 마법사.

김판석이 나타났다.

절대자들을 추격하던 그는, 중국에 백무진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곧바로 이곳으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다. 타이밍이 매우 적절했다.

아직 왕위룡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그는, 왕위룡과 백무진 사이를 가로막으며 마력을 일으켰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백무진의 천마검법.

나름대로 천마검법을 재현해 냈다는 그가, 과연 자신의 마법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를.

그런데.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백무진도, 그리고 왕위룡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분명히 처음 등장했을 때는 자신을 향했던 시선이, 갑작스럽게 다른 누군가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뭐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김판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 *

김판석이 도착한 직후.

곧바로 새로운 마나의 흐름이 일어났다.

차원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그 너머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철크럭.

땅에 발을 내디뎠다.

사내의 날카로운 눈빛이 주변을 훑더니, 백무진을 지나 왕위룡, 마지막으로 김판석의 존재를 확인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이인자라니.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그건 제가 허락할 수 없습니다.”

뒤로 묶은 적발.

날카롭게 번들거리는 검.

왕위룡과 김판석이 존재하는 이곳에.

드미트리의 악귀, 케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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