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606화 (606/615)

606화 출병(出兵) (5)

케빈의 존재.

모두가 그를 알아보았다.

무려 3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대한제국에서 드미트리의 참전을 알리면서 케빈과 같은 몇몇 주요 인물들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나타난다면 곧바로 아군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대한제국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왕위룡은 눈앞의 사내가 케빈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순간 반발심이 치밀었다.

“케빈 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이인자의 자리는 케빈 님이 결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괜히 발끈했다.

그렇지 않아도 김판석에게 밀려 슬픈 왕위룡인데, 본인이 로만 드미트리도 아니면서 허락을 논하는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케빈이 그동안 보여 주었던 행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드미트리의 악귀는 최측근으로서 대단한 공을 떨쳤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않은가.

천마신교의 후예라는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왕위룡에게 이번 발언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언젠가.

왕위룡은 이인자의 자리에 올라설 것이다.

시작은 단순히 그림쟁이였을지 몰라도, 왕씨 가문의 후손이 진정으로 인정받는 그림을 바랐다.

백무진은 안중에도 없었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왕위룡이 김판석을 바라보았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백의의 마법사님?”

동조를 구했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

김판석이라면 당연히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글쎄. 우리끼리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이인자 자리를 두고 다툰다지만, 드미트리의 개국공신인 ‘케빈’ 님의 경우에는 별개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말한 이인자의 자리는 대한제국의 기준이고, 드미트리 제국의 사람들이 참전한다면 얘기가 매우 다르지.”

“예?!”

김판석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왕위룡이 놀라 되물었지만, 김판석은 그에게 동조할 수 없었다.

‘지금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내가 알렉산드르 황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 전쟁이 모두 마무리되고 나면, 내 정체가 밝혀지고 심판대에 오르게 되겠지. 그때 케빈과 같은 주요 인물들은 내 생살여탈권을 좌지우지하는 존재들. 괜히 밉보였다가 이인자는커녕 목숨도 부지할 수 없어.’

이인자의 자리?

중요하다.

하지만 목숨이 더 중요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승리를 확신하는 김판석으로서는, 그 이후의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의 사람들에게 백의의 마법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면, 알렉산드르 황제는 그야말로 모두의 원수였다.

직접적으로 죽인 사람들만 해도 시산혈해(屍山血海)를 형성했고, 간접적으로 죽인 숫자들은 시산혈해라는 단어로도 모자랄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죽었다.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한 번의 죽음으로 용서한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고로 참회의 자세를 보여야만 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어떻게든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해야만, 심판대에서 생존의 기회를 허락받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었다.

꼬리를 말았다.

왕위룡이 당황했다.

눈빛으로 김판석에게 얼른 동조해 달라고 재촉했지만, 김판석은 시선을 피한 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시죠.”

케빈이 둘을 지나쳤다.

일단 지금은.

인류를 위협하는, 저 백무진이라는 존재부터 처리할 차례였다.

* * *

일련의 상황.

세 인물이 투덕거리는 모습에, 백무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케빈? 드미트리의 악귀라고 불리는 그 케빈이라고?”

놀랐다.

암영의 수장으로서 드미트리에 대해 잘 알았던 만큼, 그들이 정말 실존한다는 사실에 감탄하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의문스럽기는 했다.

자신이 알기로 케빈은 분명히 20대 초중반의 나이일 텐데,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저 사내는 케빈을 상징하는 특징들이 보이지 않았다.

단 하나.

붉은 머리칼만 같았다.

드미트리의 악귀라고 평가받게 한 광기나 거친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백무진이 웃었다.

“큭큭큭, 정말 재밌는 상황이구나. 정말 로만 드미트리를 도와주겠답시고 드미트리의 녀석들이 차원을 넘어오다니. 지금이라도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때? 감히 절대자님들을 상대로 대항하려 한다면, 장담컨대 너희는 단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야.”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다.”

“건방진 새끼.”

스릉.

검을 늘어트렸다.

더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악귀든, 백의의 마법사든, 중국의 황제든.

덧없었다.

이들 모두를 죽여 버리고, 백무진은 앞으로 만들어질 새로운 세상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래, 그럼 죽어.”

팟.

콰르르르르르릉.

땅을 박찼다.

백무진의 모습이 순간 사라지더니, 갑작스럽게 케빈의 눈앞에 나타나 그대로 오라를 폭발시켰다.

콰앙!

콰콰콰콰콰쾅!

케빈의 반응은 빨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쾌속(快速)의 영역으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 냈고, 뒤이은 후속 공격까지 전부 반응해 냈다. 서로의 존재가 뒤얽혔다.

과거의 케빈이라면 방어를 도외시하고 백무진을 몰아붙였겠지만, 지금의 케빈은 침착하게 공격 하나하나를 살피면서 백무진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했다.

“이 새끼가.”

백무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상대의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거세게 몰아치다가 순간적으로 드러난 틈을 노렸다.

콰앙-

상대를 쳐 냈다.

그러고는.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천마검법을 발현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운용했던 마나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 하더니, 백무진의 검에서 폭발적인 오라가 분출되었다.

그것은 세상 전부를 쓸어버릴 강렬한 힘이었다.

왕위룡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피를 토해 내야만 했던 일격. 백무진은 드미트리의 악귀라 할지라도 이제는 끝이라고 확신했다.

눈앞의 광경.

케빈의 세상이 느리게 흘러갔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드미트리의 악귀에 대한 명성만 들었을 뿐 정확한 진실은 알지 못했다.

천마검법의 첫 번째 계승자.

그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왕위룡은 벽화의 검흔을 따라 했을 뿐이고, 백무진은 로만 드미트리의 천마검법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면, 케빈은 30년 전에 로만 드미트리에게 천마검법의 전부를 전수받았다.

그리고 지난 3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천마검법을 훈련했다.

매일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갈 때면, 케빈은 이를 악물며 로만 드미트리와의 마지막 약속을 떠올렸다.

“케빈. 너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존재다. 네가 있기에, 내가 없는 자리를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주군의 자리.

케빈이 물려받았다.

천마검법을 익혀 드미트리의 수호신이 되기를 바랐기에, 케빈은 천마검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지난 30년을 투자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무의미한 노력이라고도 말했다. 자잘한 분쟁만이 존재하는 평화로운 세상에, 케빈만큼 강해질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파비우스처럼 인생을 즐기지도.

크리스처럼 일상을 살아가지도 않았다.

오로지 단 하나.

천마검법에 매몰되었다.

평화로운 시대에서는 알 수 없었던 지난 30년간의 노력이, 차원을 넘어 드디어 그 가치를 발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백무진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그 파괴적인 일격에, 케빈이 웃음을 보였다.

“감히 그 정도로 천마검법을 논하다니.”

피하지 않았다.

마나를 끌어 올렸다.

단전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나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단 한 번의 일격을 행했다.

‘천마검법 후반부 일초식.’

번뜩.

그 순간.

백무진은 보았다.

“가소롭구나.”

자신의 천마검법을 찢어발기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강력한 힘의 폭발을.

그렇게.

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백무진의 존재가 그대로 찢겨 나갔다.

* * *

끝났다.

중국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던 파멸적인 존재가, 단 한 번의 일격에 그대로 소멸하고 말았다.

“……와.”

왕위룡은 넋을 잃었다.

그로서는 백무진의 천마검법도 대단해 보였는데, 케빈의 천마검법을 확인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론 로만 드미트리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하지만 천마를 제외하고 이 정도의 천마검법을 사용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왕위룡은 엄청난 패배감이 들었다.

드미트리.

생각 이상이었다.

그들이 대단한 힘을 갖추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지금의 케빈처럼 압도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스륵.

케빈이 검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왕위룡을 바라보았다.

“불만이 많으신 것 같은데. 서열 정리, 필요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서열 정리라니.

김판석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이, 저 괴물 같은 드미트리의 악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일찌감치 시선을 내리깐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ㅎㅎ.”

김판석.

머쓱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왕위룡은 당혹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 * *

남은 절대자는 여덟.

멸망의 위기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절대자의 공격을 받은 스페인의 마드리드(Madrid)는, 더는 희망이 허락되지 않는 현실에 직면했다.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지옥의 불길이 타올랐다.

무너지는 성벽 아래에서, 스페인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사무엘이 들이닥치는 몬스터들을 막아섰다.

“물러서지 마라!”

번뜩.

파파파파팟.

몬스터들이 피를 흩뿌렸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검술을 구사하는, 그의 섬전(閃電)에 몬스터들은 이렇다 할 반응도 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 댔다.

벌써 사무엘이 처리한 몬스터만 천여 마리에 달했다. 피로 흠뻑 물든 그의 모습처럼 끝까지 투쟁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무엘은 상황이 희망적이지 않음을 알았다.

하늘 위.

절대자가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써 두 차례였다.

30분 전에 나타나 마드리드를 한번 쓸어버렸던 절대자가,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더 발악하거라! 더! 더!]

격양된 음성.

절대자는 이 상황을 즐겼다.

하찮은 인간들이 아등바등 발악하는 모습에, 그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인간들이 감당하지 못할 재앙을 선사했다.

지옥의 불길이 치솟으며 사람들의 몸이 녹아내렸다. 어떤 곳에서는 해일이 일어나며 사람들을 압살시켰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아득했다.

대체.

대체 어떻게 살아남는단 말인가.

49일간 악착같이 절망을 훈련했는데도, 생명체의 한계를 초월할 절대자를 상대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인류가 정말 승리할 수 있는 게 맞을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 백의의 마법사가 활약한다지만, 그 둘만으로는 절대자 전부를 감당하지는 못하겠지. 드미트리 제국도 마찬가지야. 그들이 참전한다고 한들, 이 압도적인 괴물을 상대로는 머릿수 이상의 의미는 없어.’

절망적이었다.

드미트리의 참전.

반격의 시발점이다.

하지만 그들이 로만 드미트리처럼, 백의의 마법사처럼.

절대자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상징성만이 존재할 뿐, 전세(戰勢)를 완전히 뒤엎을 만큼의 파괴력은 보유하지 못했다.

그저.

버틸 뿐이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로만 드미트리의 승리를 바랐다.

사무엘은 거칠게 몬스터의 머리를 베어 버리며, 점점 사그라지는 마지막 불길을 불태우려고 했다.

그때였다.

확.

환하게 일어나는 불빛.

누군가가, 스페인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절대자.

몬테르의 시선이 누군가를 향했다.

도망칠 필요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김판석의 위치를 파악한 상태였기에, 지금 나타난 존재는 대세에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흥미가 돌았다.

다들 자신의 목숨을 챙기기에 바쁜 지금, 대체 누구기에 스페인을 도와주겠다고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단 말인가.

대단한 용기였다. 이번 인간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정상적인 놈이 없었다.

저벅저벅.

차원 너머.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바람에 찰랑거리는 금발의 머리칼은, 그가 누구인지를 증명했다.

“너희였구나.”

음성이 낮게 내리깔렸다.

절대자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와 드미트리의 세상을 갈라 놓은 원흉이다.

지난 30년간 꾹꾹 억눌러 왔던 감정이, 그 원흉을 마주하는 순간 미칠 듯이 들끓는 기분이 들었다.

사내의 정체.

크리스였다.

그가 평소답지 않게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정말 보고 싶었다, 이 개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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