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607화 (607/615)

607화 출병(出兵) (6)

절대자, 몬테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낱 인간이다.

그동안 억겁의 세월을 살아오며, 절대자들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그들에게 인간은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언제나 그렇듯 절대자를 마주한 인간들은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아야 하건만, 눈앞의 인간은 조금도 겁을 먹은 기색이 없었다.

같잖았다.

짜증이 치밀었다.

이번 차원의 인간들은 도대체 왜 주제를 모른단 말인가.

“그래, 지금은 자신감이 넘치겠지. 로만 드미트리와 백의의 마법사가 네 명의 절대자를 처리했으니, 너희마저도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인간들은 이래서 문제야.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이면, 겨우 백 년도 살지 못하는 하찮은 생명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말아.”

상대는 크리스.

드미트리의 인물임을 알았다.

선례가 필요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예외가 존재한다고는 하나, 감히 절대자들에게 대항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권능을 끌어 올렸다.

작은 점처럼 느껴지는 인간을 향해, 몬테르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것이 너희의 현실이다.”

퍼엉!

콰콰콰콰콰콱!

사방에서 차원이 부서져 나갔다.

유리창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는 것처럼, 하늘이었던 공간에 균열이 일어나며 그대로 해일이 밀려들었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크리스는 간략하게 절대자들의 공격 패턴을 파악해 두었기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아티팩트를 발현했다.

“플라이.”

확.

하늘로 날아올랐다.

허공에 존재하는 절대자에게 닿기 위해서는, 일단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해야만 했다.

콰앙!

콰콰콰콰콱!

해일이 높이 치솟았다.

크리스를 그대로 집어삼키려는 순간, 강렬한 기운이 해일을 갈라 버렸다.

번뜩.

파스스스스.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해일은, 물은 물리적으로 베어 버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런데 고체가 정확히 갈라지는 것처럼, 크리스의 일격에 해일이 양옆으로 찢겨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정교하다 못해 압도적인 마나 컨트롤이었다.

몬테르는 그 광경에 놀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아직은 크리스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양손에 파멸적인 기운을 끌어 올렸다.

“죽어라!”

콰콰콱!

콰콰콰콰콰콰콱!

공간을 찢어발기는 힘이었다.

닿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그 강렬한 힘에, 크리스를 지탱하던 플라이의 마력도 단번에 소멸되었다.

팟.

허공에 떠올랐다.

그야말로 무방비의 상태.

크리스는 곧바로 또 다른 아티팩트들을 발현했다.

“스톤 볼(Stone Ball).”

펑.

퍼퍼퍼퍼펑.

겨우 1서클 마법이었다.

사방에 수백, 수천 개의 스톤 볼을 발사하더니, 크리스는 추락하는 와중에 자세를 틀어 스톤 볼을 밟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뛰어올랐다.

발에 밟힌 스톤 볼은 그대로 바스러졌지만, 하늘에서 무언가를 밟고 뛰어오른 것만으로 몬테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얻었다.

팟.

파파파파팟.

경공술.

서커스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맞닥트리는 파멸적인 기운에, 크리스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에서 오라를 일으켰다.

콰앙!

콰콰콰콰콱!

격렬한 격돌이 일었다.

몬테르는 웃음을 보였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어떻게든 따라붙는 것은 대단했지만, 방금의 파멸적인 기운을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과는 언제나 반복될 뿐이다. 태생은 인간과 절대자들의 차이를 만들어 냈고, 인간들에게 허락되는 결말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팟.

번뜩.

몬테르가 눈을 부릅떴다.

파멸적인 기운 속.

‘섬전.’

한 번의 번뜩임이, 파멸적인 공간을 그대로 갈라 버렸다.

* * *

지난 30년.

적지 않은 세월이었다.

크리스는 일상을 살았다.

케빈처럼 훈련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연인을 사귀었으며, 정말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날에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었다.

벌써 애도 셋을 낳았다. 어여쁜 딸 하나에 아들 둘.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는 너무 평온해 보인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면.

사람들을 찾아갔다.

어느 날은 옛 동료에게 물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돌아올 것 같냐는 물음에, 옛 동료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귀환은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세월을 감당할 뿐이야. 우리 다음 세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우리는 그분을 잊어서는 안 되잖아.”

그리고 몇 년 뒤.

이번에는 로렌 드미트리를 찾아갔다.

이제는 권력을 누리며 살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 아득바득 노력하느냐고 물었다.

“아시잖아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아니 형은 제게 태산과도 같은 사람이에요. 제가 정말 힘들었을 때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고, 덕분에 저는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점점 현실을 받아들이는 상황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가족이잖아요. 로만 드미트리의 동생이잖아요. 그러니까,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말없이 웃었다.

크리스의 기억에도 로렌 드미트리는 여린 소년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불쑥 커 버린 사내를 마주하니 괜히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로 또다시 일상을 살았다. 매번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던 크리스는,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다 이번에는 느닷없이 한스를 찾아갔다.

궁금했다.

한스의 삶이.

한스는 귀족의 신분이어도 여전히 로만 드미트리의 방을 매일같이 청소하고 있었다.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돌아오실 수 있을지. 다만, 그분이 그리울 뿐입니다.”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의 귀환을 바랐다.

사람들은 크리스를 평온하다고 말했지만, 크리스는 반복되는 삶에서 치솟는 감정을 꾹꾹 억눌렀다.

동요되고 싶지 않았다. 감정을 솔직하게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동요하고 당황하는 이때, 자신만큼은 흔들림이 없는 모습으로 항상 똑같은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검을 휘둘렀다.

하루, 이틀…… 그리고 일 년.

반복되는 삶이었다.

사람들은 일상적인 하루로 받아들인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크리스의 세월은 켜켜이 쌓여 나갔다.

단 하나의 목적. 언젠가 찾아올 미래를 대비하는 훈련.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케빈처럼 하나에 완전히 몰두한 삶은 아니나, 30년의 세월은 어느 순간 눈이 덮인 산에서 눈덩이가 굴러가는 것처럼 엄청난 무언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말했었다.

크리스는.

단언컨대 드미트리 최고의 재능이라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항상 스스로 깨닫게 했던 존재이니만큼, 정확히 10년이 흐른 시점부터 크리스는 미지의 세계에 돌입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세월을 쌓아 갈수록, 크리스는 로만 드미트리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천의 경지.

그것을 올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날.

‘섬전은 오늘부로 새로이 탄생한다.’

자신을 드미트리의 섬광이라 불리게 했던, 그 강력한 힘을 새로운 경지에 걸맞은 무언가로 발전시켰다.

그건.

섬전이 아니었다.

섬전이라 불리는 또 다른 무언가.

크리스의 현재를 나타내는 그야말로 파멸적인 힘이었다.

* * *

일련의 상황.

초월적인 존재들의 격돌에 사무엘은 넋을 잃었다.

그는 크리스의 전승자다.

한참 드미트리의 섬광으로 명성을 떨쳤을 때, 사무엘은 문득 자신이 전승자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섬전은 완성되었다.

빠르게 공간을 파고드는 강력한 일격은, 대단한 명성을 떨치는 S등급의 헌터들일지라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확실했다.

사무엘은.

논외의 존재였다.

스페인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명성처럼,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번뜩.

눈을 부릅떴다.

단 한 번의 번뜩임.

몬테르가 크리스를 그대로 쓸어버리려는 순간,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몬테르의 머리가 날아가 버렸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무언가가 공간을 베어 버린다는 전조조차 존재하지 않은 채, 몬테르의 머리가 날아간 뒤에야 번뜩임이 뒤늦게 찾아와 공간을 갈랐다.

“……어, 어떻게?”

몬테르조차.

머리가 날아간 뒤에야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에, 크리스도 그대로 추락하며 몬테르의 머리를 짓밟아 버렸다.

콰직.

끝이었다.

절대자가.

그 강력한 존재가.

크리스와의 접전 끝에 머리가 날아갔다.

드미트리는 단순히 수적 우위만이 아닌, 전세를 뒤바꿀 수 있는 파괴력을 보유했음을 증명했다.

크리스와 사무엘이 시선을 마주쳤다.

크리스는 검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

“뒤를 부탁드립니다.”

걸음을 돌렸다.

또 다른 절대자를 찾기 위해.

크리스는 몬테르를 죽인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곧바로 차원의 통로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사무엘은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직 스페인의 위기를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방금의 광경으로 초라한 현실을 깨달았다.

‘……이게 진정한 섬전이구나.’

그제야 알았다.

자신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발자취를 뒤쫓고 있었음을.

크리스는 드미트리의 섬광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감히 자신 따위가 비견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 * *

크리스와 케빈.

드미트리의 활약은 둘뿐만이 아니었다.

[대한제국, 인천]

크리스가 떠난 자리.

여전히 몰려드는 몬스터들로 혼란스러운 그곳에는, 로드웰 드미트리와 펠릭스가 자리를 지켰다.

“모조리 죽여라! 적들에게 드미트리의 저력을 증명하라!”

“파이어 퍼니쉬먼트(Fire Punishment).”

화륵.

화르르르르륵.

성벽 위.

펠릭스가 힘을 발현했다.

30년의 세월을 걸쳐 9서클의 경지에 오른 그가, 수만의 몬스터들을 단번에 쓸어버릴 파멸적인 마법을 발현했다. 그야말로 피닉스의 재림이었다.

불길에 타오르는 새가 나타나 브레스를 뿜어내는 것처럼, 펠릭스는 혼자만의 힘으로 인천을 공격하는 몬스터들 전체를 압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벽 위로 몬스터들이 올라올 때면, 로드웰 드미트리와 로렌 드미트리가 직접 검을 뽑아 나섰다.

퍽.

크르르르륵.

황제의 핏줄.

둘은 단순히 권력에 안주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황제의 대리인이면서도, 황제의 동생이면서도, 폭발적인 근육을 드러내며 몬스터들을 도륙하는 모습은 산전수전을 모두 경험한 전사의 모습이었다.

덕분에 인천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설령 절대자가 나타날지라도, 인천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대한제국, 서울]

서울은 인천 다음으로 강력한 전력을 갖추었다.

그만큼 절대자들의 공격도 매우 거셌는데, 한 존재의 등장으로 서울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헥토르가 맡는다.”

에드윈 헥토르.

그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펠릭스와 더불어 마법계의 양대 산맥이라고 불리는 그는, 성벽 아래로 직접 내려가며 득실거리는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사방에서 새카만 파도가 밀려들었다. 근접전에 약한 마법사들에게는 상당히 취약한 상황이었지만, 그동안 발달한 마법 분명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사람들은 말했다.

에드윈 헥토르는 워 메이지의 이상(理想)이라고.

“익스플로전(Explosion).”

화르륵.

퍼퍼퍼퍼펑!

마력이 폭발했다.

몬스터들 사이를 파고들며 마법을 사용하는 그로 인해, 몬스터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존재감이 무섭게 부풀었다.

에드윈 헥토르는 서울을 단번에 휘어잡으며,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다.

[대한제국, 부산]

그곳에는 아르카디아군이 있었다.

플로라 로렌스와 그녀를 따르는 병력.

30년이 지나도 여전한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는, 로드웰 드미트리가 황제의 대리인을 맡으면서 아르카디아의 국정을 도맡았다.

아르카디아에서는 그녀를 강철의 여왕이라 불렀다. 실제로 여왕은 아니나, 강렬한 카리스마로 아르카디아에서 생기는 대소사를 모두 문제없이 해결했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황제 폐하가 나선 이상, 절대자들은 곧 궁지에 몰리고 말 것이다.”

그 외에도 다른 지역들.

드미트리의 병력이 문제를 해결했다.

파비우스도 늙은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고, 드미트리 외에 각국에서도 각자의 전력을 차출했다.

불과 조금 전.

인류는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드미트리가 등장한 직후.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여기저기서 승전보(勝戰譜)가 들려오며,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증명했다.

대재앙.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류의 반격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활약하는 그 모든 이야기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로만 드미트리에게 전달되었다.

드미트리가 차원을 넘어왔음을.

자신을 따라, 30년의 세월을 초월했음을.

로만 드미트리조차 알지 못했던 드미트리의 상황이, 드미트리의 진심이 드디어 그에게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