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609화 (609/615)

609화 출병(出兵) (8)

세 번의 삶.

단 하나의 검법.

로만 드미트리는 삶의 밑바닥에서 정점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마계를 정벌하고 새로운 세상에 도달한 지금도. 천마검법을 발전시켜 왔다.

오래전에는 분명히 상식의 수준에서 발휘되던 천마검법이, 천의 경지를 넘어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 불현듯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검(劍)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매일같이 피땀을 흘려 가며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이 검을 통해서, 자신은 대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

한때 무림에서 검선이라고 불리던 인물은, ‘검’은 단순한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어떤 무공을 익히든 만류귀종(萬流歸宗)의 이치에 따라 같은 도착점에 도달하며, 그때는 검의 형태를 초월하여 무공을 통해 본인이 원하는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 말인즉.

검선이 말하는 매개체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어떤 무기를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발현되는 의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얼마 뒤.

검선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의 행방불명에 말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검선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고 우화등선(羽化登仙)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자하고 신선다워 검선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나,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내뱉는 말과 행동에는 인간으로서의 미련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중혁은.

아니, 로만 드미트리는.

검선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조차 도달하지 못한 까마득한 경지에 오른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검은 살생(殺生)을 위한, 내 목적을 가장 확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무기다. 내가 검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경지로 구분되는 성취가 아닌, 눈앞에 존재하는 적을 단번에 베어 버릴 힘. 나는 그것이면 족하다.’

목적에 충실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삶의 밑바닥에서 검을 처음 잡았을 때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그때와 똑같이 검을 대했다.

의지가 검에 녹아들었다.

볼피르를 상대로, 자신과 드미트리의 세상을 갈라놓은 존재를 상대로. 정말 대단한 검법을 발현해 본인의 우월함을 표출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그를 죽여 버리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에 집중했다.

‘지금부터 눈앞의 존재를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어떤 깨달음을 통해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우월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신의 경지에 도달한 로만 드미트리는 검으로 최대한으로 낼 수 있는 파괴력을 바랄 뿐이었다.

상대가 절대자든, 아니면 신이든. 그 누구라도 절대 자신을 막아 낼 수 없도록 파멸적인 힘을 분석하고 손아귀에 넣었다.

팟.

콰르르르르르르릉.

땅을 박찼다.

볼피르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동족을 넷이나 흡수한 그는 존재감을 부풀렸고, 로만 드미트리를 찢어발길 수 있다는 확신을 보였다.

천마군림보를 밟았다.

동시에.

‘천마검법 전반부 일초식.’

콰앙!

파파파파파파팟.

격렬하게 부딪혔다.

땅을 내딛는 발에서부터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힘에, 볼피르는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정면에서 맞닥트렸다.

서로 부닥칠 때마다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볼피르는 천마검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내면서, 검은 마력으로 일렁이는 손톱을 휘둘러 오히려 상대의 틈을 노렸다.

두 번째 걸음.

‘천마검법 전반부 이초식.’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겨우 그딴 공격에 내가 당할 것 같으냐!”

천마군림보.

천마검법이 반복되었다.

조금 전보다 더 강렬한 힘이 휘몰아쳤지만, 볼피르는 광오한 웃음을 터트리며 로만 드미트리를 밀어붙였다.

온몸에 파멸적인 힘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애초에 동족들을 버리고 그들을 모두 먹어 치웠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생길 정도였다.

사실.

크게는 상관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그는, 지금으로도 완전무결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걸음.

전반부 삼초식, 중반부 일초식, 중반부 이초식.

로만 드미트리의 힘이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상대와의 공방에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으며, 로만 드미트리는 살의(殺意)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였다.

목적에 충실했다.

강력한 검법.

강력한 무공.

상대를 죽이기 위함이다.

서로 격렬하게 뒤얽히면서도, 상대의 허점을 찾았다.

팟.

피가 튀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에 생채기가 생기는 순간, 상대의 공간을 파고들며 여섯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천마검법 중반부 삼초식.’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

볼피르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단순히 서로의 파괴력을 겨루는 공격이 아니라, 정확히 허점을 파고드는 공격에 그는 자세가 무너진 상태로 공격을 맞받아쳐야만 했다.

이번에는 충격이 대단했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상황에, 볼피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팟.

콰콰콰콰콱!

밀릴 수 없었다.

동족을 무려 넷이나 잡아먹은 자신이, 생명체의 한계를 초월한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고도 한낱 인간에게 패배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은 눈으로 좇아갈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였고, 로만 드미트리의 사각을 연속해서 파고들며 손톱을 휘둘렀다.

매 일격이 재앙이었다. 쾅쾅 폭발하는 그 파멸적인 기운은, 단순하게 손톱을 휘두르는 공격인데도 김판석이 발현한 ‘10서클의 파괴력’을 넘어섰다.

고로.

패배는 생각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몰아붙이는 상황에, 볼피르는 정말 상대를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표출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설령 신조차 찢어발길 공격.

그렇게 공간을 파고드는 순간.

일곱 번째 걸음.

‘천마검법 후반부 일초식.’

번뜩.

콰콰콰콰콰콰콱!

일말의 틈.

로만 드미트리가 공간을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파멸적인 기운을 모두 찢어발기더니, 당황으로 얼룩진 볼피르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볼피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인간은.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간은.

이 와중에도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내고 있었다.

자신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파악하며, 허점을 공략해 반드시 죽이고자 했다.

스스로 강해지고자 동족을 집어삼킨 볼피르와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의 힘에는 세 번의 삶 동안 반복해 왔던 고뇌와 노력이 녹아들어 있었다.

볼피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강력했고, 육식이라는 편리한 방법으로 강해진 그와는 다른 세계였다.

그 순간.

여덟 번째 걸음.

‘천마검법 후반부 이초식.’

사악-

빛이 밀려들었다.

그 강렬한 빛을 맞닥트리는 순간, 볼피르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고통에 휩쓸렸다.

퍼퍼펑!

콰콰콰콰콰콰콰콰콱!

* * *

볼피르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대로 무너질 뻔했던 몸을 억지로 지탱하며, 그가 충격받은 얼굴로 검붉은 피를 쏟아 냈다.

“우웩.”

후두둑.

방금의 일격.

치명적이었다.

온몸이 난도질을 당했고, 볼피르는 생명이 경각에 달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없었다.

상대는 인간이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하찮은 생명체에 불과하며, 그들이 평생을 반복해서 훈련한다고 한들 절대자들이 태어난 직후에 갖춘 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절대자들의 오만은 오만이라고 할 수 없다. 오만(傲慢)은 건방진 태도를 말하는 것이나, 실제로 그만큼 갖추었다면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볼피르는.

절대자들은.

이와 같은 미래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신이 되기 위해 태어난 축복받은 존재이니만큼, 이따위 현실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절대자 볼피르다. 겨우 한낱 인간 따위에게, 나 볼피르가 패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힘을 끌어 올렸다.

생명력을 불태웠다.

자신이 이제까지 먹어 치웠던 동족들의 생명력도 같이 불태우며, 볼피르의 존재감이 무섭게 부풀었다.

마지막이었다. 이 한 번의 일격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죽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볼피르는 승리할 수 있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로만 드미트리만이 예외일 뿐이다.

그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자신을 넘볼 수 없기에, 볼피르는 파멸적인 기운에 자신을 헌납했다.

콰드드드드드득.

차원이 뒤틀렸다.

세상이 비명을 질러 댔다.

종말이었다.

볼피르가 일으키는 파멸적인 힘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거리를 좁혔다.

저 앞에 파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물러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다. 신의 경지. 내가 대체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일까.”

그동안 단 한 번도.

완전한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은 마왕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은 ‘살생’이라는 목적을 위해 발현하고자 했다.

아홉 번째 걸음.

콰득.

콰드드드드드드득.

발바닥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치밀었다.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며 핏줄이 곤두섰고, 감당하지 못할 힘에 로만 드미트리의 눈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에 맞춰 볼피르도 준비를 모두 끝마친 상태였다.

절대자의 육체로도 감당하지 못할 힘에 피부가 일어나며 톡톡 터졌고, 검고 거대한 태양처럼 엄청난 마력이 형성되었다.

마지막.

정말 마지막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내더니, 마력이 몰아치는 공간을 뚫고 나가며 볼피르를 향해 일격을 준비했다.

‘천마검법 후반부 삼초식.’

전력.

세상이 멈추었다.

서로의 힘이 격돌하는 순간, 아주 잠시 생명체의 감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무언가가 펼쳐졌다.

이윽고.

파파파팟.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검은 마력이 찢겨 나갔다.

로만 드미트리가 앞으로 계속해서 치고 나가며, 파멸적인 기운 너머에 존재하는 볼피르의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오로지 살생을 위한 전력. 볼피르는 로만 드미트리를 찍어 누르기 위해 전력을 발현한 반면, 파멸적인 기운이 범람하는 지금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일말의 틈을 공략했다.

목적에 충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가로막는 적을 도륙하기 위해, 단 한 번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렇게.

번뜩.

푸확.

볼피르의 팔이 날아갔다.

* * *

끝났다.

팔을 날려 버림과 동시에 볼피르의 머리를 베어 버리려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들어 갔다.

화악.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백색의 공간.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그 세계에서, 미지의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로만 드미트리. 절대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

상대는 신이었다.

이제까지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던 그 존재가, 볼피르의 죽음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말하는 열셋의 존재는 실제로 ‘신의 파편’이다. 그들은 본래 하나의 존재로서 일부 차원을 관리하는 신이어야 했으나, 차원에 문제가 생기면서 열셋의 파편으로 나누어져 차원의 틈에 방치되었다. 나머지 열둘의 절대자를 죽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볼피르마저 죽으며 파편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때부터 지금 네가 살아가는 세상을 기점으로 차원의 경계가 무너질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볼피르를 죽이지 마라.]

그의 말.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신으로 추정되는 빛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볼피르는 수많은 인간을 죽였다. 그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또 다른 위험을 맞이할 것이다.”

[인간들의 세상에는 로만 드미트리, 네가 존재하지 않는가. 생명력을 모두 불태워 버린 지금, 볼피르는 더는 인간들의 세상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볼피르.

그는 동족의 생명력을 불태워 최후의 일격을 시도했고, 그것마저도 실패한 이상 더는 로만 드미트리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아니, 절대자를 쓰러트렸던 다른 사람들만으로도 충분히 볼피르를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예상했다.

드미트리의 세상을 떠나 절대자를 조우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며, 그 이면에는 분명히 신의 안배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생각. 알렉산드르 때와 마찬가지였다.

로만 드미트리로 인한 결과라고는 하나, 알렉산드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신은 그 대항마로 장본인을 직접 불러들였다.

만약.

정말 만약에.

신이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막아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에는 섣불리 답을 내리지 못했던 그 생각을, 최근에 이르러 확고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네 말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절대자들은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존재들이다. 그들을 처리하는 대가로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하라는 말은, 그간의 고통을 기억하는 인간들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신.

그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신은 차원을 다스리는 존재이나, 그렇다고 그들을 따를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전의 삶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닌 한발 물러나 상황을 방관했다. 만약 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파멸적인 결말을 받아들여야만 했겠지.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삶은 내가, 그리고 인간으로서 살아갈 우리가 감당할 몫이다. 그러니…….”

이전과는 달랐다.

선택의 갈림길.

로만 드미트리는 신의 말을 받아들였다.

드미트리에 남으면 위험하다는 그 말에, 그때는 무조건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확고하게 말했다.

“너는 언제나 그랬듯 방관하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 * *

화악-

빛무리가 흡수되었다.

다시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온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팔을 잃은 볼피르를 내려다보았다.

“로, 로만 드미트리. 내 패배를 인정하겠다.”

질질.

볼피르가 바닥을 기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제발 살려다오. 날 살려만 준다면, 앞으로 내 힘을 인간들을 위해 쓰겠다.”

같잖았다.

우스웠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말했던 존재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마주하자 공포에 질려 목숨을 구걸했다. 그의 말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절망과 패배를 경험해 보지 못한 절대자가 드디어 현실을 받아들였으니, 신의 조언대로 그를 살려 둔다면 인류에게 평화가 허락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며 단 한 번도 예외를 두지 않는 대원칙이 있다.”

슥.

검을 겨누었다.

공포로 얼룩진 볼피르의 얼굴에, 로만 드미트리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적으로 규정한 존재를 절대 살려 두지 않는다.”

그렇게.

번뜩.

볼피르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 * *

툭.

데구루루.

볼피르의 머리가 땅바닥을 굴렀다.

허망한 최후였다.

인류는 저 존재로 인해 십수 년을 지옥 속에서 살았건만, 죽음 외에 복수를 행할 방법은 없었다.

잔인한 현실이었다. 복수를 행한다고 한들 그들로 인해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익숙한 목소리였다.

파르르 떨리는 그 목소리에, 로만 드미트리는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케빈이었다.

간절하게 재회하길 바랐던 존재였다.

하지만 30년의 세월이 떠오르자, 절대자를 상대하는 순간보다도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 휘몰아쳤다.

‘나는 그 세월을 감히 이해할 수 없다.’

30년.

대체 그 기나긴 세월을 감당하는 동안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로만 드미트리가 세상을 구원했다고 한들, 감사한 마음만으로는 30년이나 기다리는 일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케빈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자를 단숨에 베어 버리고, 신의 요구마저도 거절한 로만 드미트리였지만, 케빈의 진실을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덜컥 겁이 들었다.

저벅저벅.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뒤에서 존재가 느껴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케빈은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울음을 삼켜 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쿵.

“신 케빈, 드디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 말.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케빈을 바라보았다.

빈민가에서 처음 만났던 어린 소년.

앳되기만 했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왜일까.

막상 얼굴을 보자 복잡했던 감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음을 보였다.

“보고 싶었다, 케빈.”

그것이면 된 것이다.

그간의 이야기.

그간의 세월.

그간의 노력.

마침내 케빈을 만난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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