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1)
대한제국, 인천.
A구역 쉘터 안.
밖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충격음에, 쉘터로 대피한 민간인들이 공포에 떨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공간이 뒤흔들렸다.
김준혁의 설명대로라면 쉘터는 마법 방어를 10중으로 겹겹이 설치했건만, 천장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돌가루에 사람들은 창백한 표정을 보였다.
인간은 상상력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엄청난 충격음이 들려올 때마다, 눈앞에서 돌가루가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불길한 상상력이 몸을 부풀렸다.
“……설마 대한제국군이 패배한 건가.”
“그럼 우리도 끝이야. 아무리 마법 방어를 겹겹이 설치해도, 절대자를 상대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맙시다!”
“뭐라고? 재수 없는 소리라니! 현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처음에는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믿음으로 버틴 사람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언성을 높이는 것 이외에 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최소한 외부에서 어떤 메시지가 도착할 때까지, 대부분은 로만 드미트리가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사실 애초에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다들 한 소리들을 하는 모습에, 강민아는 쪼그려 앉아 두 귀를 막았다.
‘……아빠.’
눈물이 핑 돌았다.
밖에서 들리는 저 소리.
그 현장에 아빠가 존재할 것이다.
쉘터가 쾅쾅 울릴 때마다 아빠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자, 강민아의 작은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그녀는 엄마를 잃었다.
강민호는 최대한 딸의 그림자를 없애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편부(偏父) 가정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다들 존재하는 엄마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친구들은 철없이 물어 왔고, 현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절대 아빠 앞에서 엄마를 언급하지 않았다.
철이 들어 버렸다.
철이 들어야만 했다.
홀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아빠를 위해서라면, 철없는 딸의 역할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만약 아빠마저 죽는다면 나는 앞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 그러니까, 제발 무사해 줘.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우리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나쁜 몬스터들로부터 우리 아빠를 지켜 주세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강민아의 모습에, 삼촌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울림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불안감이 점점 증폭되는 그때,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럽게 충격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뭐지?”
“끝난 건가.”
“섣불리 움직이지 마! 방어 병력이 모두 전멸한 것일 수도 있다고!”
혼란스러운 시선이 뒤얽혔다.
생각보다 일렀다.
최소 보름에서 한 달을 예상한 대재앙이니만큼, 이렇게 단시간에 소음이 사라지는 상황은 희망적일 수가 없었다.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어쩌면 더는 ‘소음’을 일으킬 만한 인간들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자, 서로 언성을 높이던 사람들조차도 함부로 부정적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때였다.
칙, 칙.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패전일지, 승전일지.
김장감이 팽배하게 차오르는 상황에, 사람들의 얼굴을 밝게 만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한제국 국민 여러분.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헉!”
“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시다!”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로만 드미트리라니!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 마지막 절대자 볼피르를 처리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려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인류가 승리했으며, 마지막 남은 몬스터들마저 모두 정리한 이후 국민 여러분에게 ‘온전한 평화’를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툭.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한제국 전체에 알리는 통신에, 통신이 끊기자마자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러 댔다.
“살았다!”
“우리가 살았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만세! 만세!”
감정이 격정적으로 끓어올랐다.
그러고는.
강민아는 보았다.
끼익.
쿠르르르르르릉.
쉘터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집중되자, 어둑어둑했던 하늘에서 햇볕이 내리쬐며 한 인간의 형상이 보였다.
“여러분, 무사하십니까?”
강민호.
그의 등장에, 강민아가 삼촌의 손길을 뿌리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아빠!”
* * *
툭.
통신을 끊었다.
대한제국 전역에 승전 소식을 알린 로만 드미트리는, 곧바로 정부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넓은 공간.
원래는 광장으로 이용되던 그 공간에, 폐허가 되어 버린 땅에 수많은 사람이 도열해 있었다.
휘잉.
바람에 깃발이 펄럭였다.
각자 형형색색의 군복을 맞춰 입은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보란 듯이 그들의 국기(國旗)를 자랑스럽게 치켜세웠다.
국기는 한둘이 아니었다. 현생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설 수밖에 없는 문양이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 국기가 의미하는 나라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드미트리, 카이로, 헥토르, 움베르토 등등.
샐러맨더의 모든 나라가 집결했다.
그 숫자는 눈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각국의 선두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보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
드미트리.
그곳에는 로드웰 드미트리가 있었다.
자신보다 동생이었던 존재가 중년의 남성이 되었고, 앳된 소년이었던 로렌 드미트리조차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 옆으로 크리스, 케빈, 펠릭스 등등. 얼굴을 확인할 때마다 감정이 들끓었다.
그들이 살아온 세월을 생각할수록, 로만 드미트리는 이 만남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로의 진영에는 다니엘 카이로가.
헥토르의 진영에는 에드윈 헥토르가.
모두가 모였다.
감정을 삼켰다.
아직 전쟁이 완벽하게 끝나지 않은 지금, 감정에 젖어 여유를 부릴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앞으로 나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충혈된 눈빛들에, 로만 드미트리는 그 시선들을 일일이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드미트리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내렸던 그때, 나는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나를 희생하는 일일지라도 ‘결정권자’로서 그에 걸맞은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너희를 마주하는 이 순간, 나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확신을 얻었다.”
돌고 돌았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똑같은 선택을 반복했을 것이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그로서는, 백성들을 위해 최선을 선택해야만 했다.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정말 고맙다. 나를 잊지 않아 준 너희를, 그리고 이 순간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담담하게 내뱉은 말.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만세! 만세!”
사람들 전부가.
광장 전체가 열광적인 환호성으로 물들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인류를 위협하던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차원의 균열이 사라지며 더는 몬스터들이 넘어오지 못했고, 남아 있는 몬스터들을 해결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지원군. 그들의 도움으로 모조리 쓸어버렸다. 차례로 각국의 문제를 해결함에 따라, 로만 드미트리는 며칠 내내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브라질의 피해가 매우 심각합니다. 피해 복구를 위해서는 원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그들도 상당한 피해를 받았지만, 강대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이 주도적으로 나서겠다고 서로 논의를 끝마친 모양입니다.”
“스페인이…….”
“호주가…….”
각국의 소식이 모두 집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
대한제국의 황제이자 세계 정부의 수장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드미트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개인적인 감정에 의무를 내팽개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드미트리가 아무리 특별하다고 한들. 대한제국과 각국의 사람들 또한 로만 드미트리를 믿고 이번 전쟁을 준비해 왔다. 그들을 끝까지 책임질 의무가 그에게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펠릭스를 불러들였다.
“준비는 끝났나.”
“예, 드미트리로 통하는 차원의 통로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조언대로 절대자의 부재로 인해 발생할 차원의 균열을 역으로 이용해, 오히려 두 차원을 통합하는 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차원의 균열이 계속된다면 차원 자체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지만, 지난 30년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세계수의 마력을 지속적으로 차원의 균열로 흘려보내 그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30년의 세월.
드미트리의 세상은 많은 것을 이루었다.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와의 재회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가 떠나야만 했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가 노력했다.
처음 그 보고를 들었을 때 고맙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혼자만 판단하고 결단을 내렸다면 몰랐을 해결책에, 지도자로서의 자신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드미트리로 떠날 차례였다.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섣불리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그 모습에,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되십니까?”
“걱정……. 그래, 걱정이 맞겠구나. 최근 들어 생소한 감정에 스스로가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일들이 많다.”
시선을 마주쳤다.
펠릭스를 마주 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그런데,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구나.”
걸음을 옮겼다.
드미트리.
고향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 * *
그야말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귀환에, 드미트리의 수도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인파가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보고 싶었습니다!”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다시는 이곳을 떠나시면 안 됩니다!”
30년 전.
마계 정벌에 성공할 때만 하더라도 어린아이였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본인의 자식들을 데리고 나와 열렬하게 환호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로만 드미트리는 영웅이었다.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그가 귀환했다는 사실에 이대로 목소리를 잃어도 좋았다.
사방에서 소리쳤다.
열광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로만 드미트리는 인파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과 짧게 인사를 마친 그는, 3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드미트리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한때.
드미트리는 무채색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철광산과 대장간이 발달하면서 인부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래서 수도의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리는 그런 광경이 도시에 펼쳐졌었다.
지금은 달랐다. 드미트리 제국 수도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화했다.
낡은 건물들이 철거되며 마법 문명에 부합하는 웅장한 건물들이 올라섰고, 대장장이의 도시라는 드미트리의 특색과 묘하게 어우러지며 오히려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감격스러웠다.
로만 드미트리가 잘 닦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이렇게 꽃을 피운 모습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선사했다.
하지만 감상도 잠시.
지금 바로 가야 할 곳이 있었다.
30년의 세월이 흘러 드미트리가 차원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로만 드미트리는 덜컥 겁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30년은 노화하여 삶의 마침표를 찍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통해 몇몇 인물들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진실을 들었다간 곧바로 드미트리로 돌아가고 싶을 것 같아 직접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초조했다.
볼피르를 상대할 때도 이토록 불안하지 않았던 로만 드미트리건만, 지금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를 벗어났다.
풀숲이 형성되고 조금은 한산한 분위기가 펼쳐지자, 멀리서부터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카앙-
카앙, 카앙-
그것은 강철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심장이 뛰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풀숲을 벗어나 홀연히 존재하는 작은 주택에 도달하는 순간.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여전히 건재하게 강철을 두드리는 남성과 건물 밖에서 차를 마시는 여성.
“……아버지, 어머니.”
그들을 불렀다.
감정이 들끓는 그 목소리에 두 노인.
로메로 드미트리와 리한나 드미트리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