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5)
그 무렵.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로만 드미트리가 본인이 사용하던 검을 경매에 내놓은 것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버지인 로메로 드미트리로부터 검을 선물받으면서, 로만 드미트리는 기존에 사용하던 검을 시장에 내놓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절대자와의 결전은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그간의 깨달음을 녹여 낼 새로운 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이 기존의 검과 이별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검.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품질만으로도 명검(名劍)들을 모두 압살하며, 절대자를 처리했다는 상징성마저 갖추어 미래의 값어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돈이 좀 있는 사람들로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번 경매는 반드시 참여해야 할 가치가 있었다.
경매 당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두 세상이 서로 통합되면서, 미국은 가장 먼저 드미트리의 세상을 받아들일 여러 사업을 진행했다. 그중에서 가장 각광받는 영역이 바로 경매였다.
양쪽의 값진 물건들을 구분 없이 내놓으면서,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낙찰을 받겠다고 지폐 다발을 흔들어 댔다.
경매장 안.
한 사내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빌어먹을 아흐메드. 이번에도 날 또 방해할 작정이구나.’
사내의 정체.
왕위룡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시중에 나왔다는 사실에, 그는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반드시 낙찰받아야 했다.
김판석에게 이인자의 자리를 빼앗기고, 케빈을 상대로는 감히 천마검법을 사용한다고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상황.
본인의 유일한 무기인 중국의 지도자라는 강점만이라도 내세워야 했다.
국가 비상령을 내려 여유 자금을 전부 끌어모았고, 호기로운 기세로 이번 경매에 참석했다.
문제는 아흐메드였다.
돈과 관련한 경쟁에서 정말 상대하기 힘든 난적(難敵).
사우디의 국왕으로서 엄청난 부를 확보했기에, 지난 경매에서도 아흐메드를 상대로 패배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그날 아흐메드는 발렌티노의 전승자가 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재력에 수집품에 대한 열망마저 더해졌다면, 억 소리 나는 돈으로는 결판이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을 거다. 서로 재력의 뿌리를 뽑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먼저 물러나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천마의 검을 얻는 것에 사활을 걸었거든.’
숨을 골랐다.
긴장감이 차올랐다.
아흐메드 외에도 익숙한 대부호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그들은 크게 견제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었다.
‘그 어디에도 발렌티노 공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발렌티노.
탐욕의 수집가.
아흐메드가 그의 전승 능력을 부여받으면서, 드미트리의 세상에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왕위룡은 아흐메드보다도 발렌티노의 존재를 견제했다.
재산을 탈탈 털어 드미트리의 검을 낙찰받았다는 그의 화려한 명성(?)은, 웬만한 출혈로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사전에 인상착의를 충분히 익혀 두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발렌티노의 건강이 악화되어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발렌티노의 존재를 배제한다면, 이번 경매는 자신과 아흐메드의 이파전일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내.
경매의 막이 올랐다.
* * *
경매장의 마스터가 말했다.
“이번 경매 물품에 대해서는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이 검으로 절대자의 머리를 베었고, 앞으로의 밝은 미래를 축복하기 위해 광명(光明)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경매 물품을 다루었던 제가 단언하겠습니다. 단순히 이 검이 지닌 상징성을 떠나서, 광명은 그 어떤 명검보다도 가장 압도적인 품질을 갖추었습니다.”
경매에 사용되는 화폐.
대한제국의 원(won)이었다.
금화를 사용하는 드미트리 또한, 통합 과정에서 차츰 지폐를 사용하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스터가 소리쳤다.
“자, 경매의 시작가는 100억입니다. 낙찰을 원하시는 분은 표식을 들어 주십시오!”
100억.
엄청난 액수였다.
경매장에서도 시작가를 이렇게 높게 잡는 경우는 없건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방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착.
차차차착.
모두 100억을 호가하겠다는 신호였다.
마스터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이, 빠르게 신호를 읽어 경매를 진행했다.
“100억, 200억, 300억, 400억, 500억, 지금부터는 1000억 단위로 호가를 받겠습니다. 1000억, 2000억, 3000억…… 아, 지금 32번이 1조 원을 호가했습니다! 경매 시작 10초 만에, 무려 1조 원이 책정되었습니다!”
1조.
살벌한 액수였다.
아무리 돈이 많은 대부호라고 할지라도, 1조라는 돈은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32번은 왕위룡이었다.
그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모두 떨쳐 내기 위해, 그리고 확실하게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베팅을 걸었다.
‘자, 지금부터는 꾼들끼리 한바탕해 보자고.’
경매는 멈추지 않았다.
1조라는 액수에도, 보란 듯이 호가를 부르는 존재가 있었다.
“19번이 2조를 호가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32번이 10조를, 아아아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19번이 20조를 호가하며, 광명을 반드시 낙찰받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아흐메드.
그가 문제였다.
19번을 달고 있는 그가 집요하게 따라붙더니, 오히려 낙찰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출했다.
‘빌어먹을 새끼.’
왕위룡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20조가 넘어서는 순간부터 이건 별들의 전쟁이었지만, 이렇게 물러나려고 이번 경매에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조 단위 싸움으로 결판이 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흐메드는 사우디의 국왕으로서 막대한 부를 갖추었지만, 중국의 지도자인 왕위룡도 밀리지는 않았다.
세계적인 강대국.
특히 다른 나라들보다 빨리 대한제국을 따르면서, 중국은 상당한 부와 명예를 갖추었다.
왕위룡은 전력을 끌어모았다.
자신의 위치에서, 중국의 지도자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을 이 경매에 모두 쏟아부었다.
착.
하나의 표식.
그것에 마스터가 기절할 듯이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아아, 100조입니다. 무려 100조가 나왔습니다. 경매 역사상 이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은 처음입니다!”
“이런 미친.”
아흐메드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로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출혈 경쟁을 벌인다고 할지라도 수십조의 단위에서 끝날 줄 알았건만, 왕위룡은 경매를 끝으로 나라를 말아먹을 작정인지 100조라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불렀다.
그때부터 아흐메드는 고민에 빠졌다. 그만한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겨우 검 하나를 낙찰받겠다고, 무려 100조라는 돈을 이번 경매에 투자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치솟았다.
그 모습에.
‘끝났다.’
왕위룡이 웃음을 삼켰다.
경매장에서의 고민은 패배를 의미했다.
스스로 불신하는 순간, 천문학적인 액수를 베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 호가하실 분 없으십니까? 그럼 지금부터 5초의 카운트를 세겠습니다. 5초 안에 더 높은 금액을 말씀하는 분이 없다면…….”
그때였다.
“200조.”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런데 시선이 머문 그곳에는, 난생처음 보는 인물이 담담한 얼굴로 표식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 * *
며칠 전.
발렌티노 가문에 비상이 걸렸다.
노쇠해 늙어 버린 발렌티노 공작은, 시름시름 앓는 얼굴로 자식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 아비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많아야 일이 년, 그 이후에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그동안 너희가 내게 가진 불만은 잘 알고 있다. 일부 재산을 나누어 너희가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지만, 정작 발렌티노 상단은 그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았지.”
드미트리.
아니, 대륙 제일의 거부.
발렌티노는 정말 천문학적인 재산을 모았지만, 죽음을 앞둔 지금도 상속 대상을 정하지 않았다.
자식들은 얌전히 기다렸다.
괜히 욕심을 부렸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지난 30년이 흐르는 동안 묵묵하게 본인의 위치를 지켜 왔다.
그리고 지금. 발렌티노 공작이 처음으로 상속에 대해 언급했다.
여섯 명의 자식.
그들은 그 의미를 알았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상당한 부를 갖추었지만,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단 한 명이 앞으로 상계를 휘어잡는 거물이 되겠지.’
‘반드시 내가 상속받고야 말겠어.’
‘아버지!’
다들 열망에 찬 눈빛을 보였다.
아버지를 닮은 자식들로서는, 아버지를 따라 대륙 제일의 거부가 되겠다는 야망을 마음에 품었다.
자식들의 눈빛.
발렌티노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는 항상 자식들이 탐욕이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발렌티노 공작이 말했다.
“이제 나는 발렌티노 상단을 물려받을 상속자를 결정하고자 한다. 조건은 단 하나.”
꼴깍.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병상에 누워 있는 노인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남녀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라고 할 만한 풍경이었다.
차오르는 긴장감.
경매장에서 호가되는 수백조의 돈보다도, 발렌티노가 내뱉는 말 한마디가 더 중요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검을 낙찰해 오는 자식에게, 내 전부를 물려주겠다.”
그 순간.
자식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왕위룡과 아흐메드는 진실을 알지 못했다.
발렌티노의 참전.
이번 경매는 둘의 이파전이 아니라, 발렌티노의 집안싸움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200조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동안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발렌티노의 자식들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매섭게 호가를 몰아쳤다.
“250조!”
“300조!”
“나는 350조!”
표식을 들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스터로서도 당황한 얼굴로 땀을 흘려댔다.
한 번에 50조씩 호가되는 경매를, 아니 애초에 100조 이상으로 낙찰되는 경매조차 경험해 보지 못했다.
발렌티노의 자식들.
그들은 각자가 대륙에서 알아주는 대부호였다.
엄청난 부를 쌓은 그들은 이번 경매에 사활을 걸었고, 그동안 알고 지냈던 인맥의 재력까지 모두 끌어모았다.
그건 순수한 재산이 아닌 레버리지(leverage)를 활용한 재력이었다.
엄청난 액수에 빌려주는 사람들조차 망설일 수밖에 없었지만, 단 하나의 전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뭐가 문제야? 발렌티노 상단을 물려받으면 다 해결될 문제인데.”
모두가.
발렌티노의 자식들에게 힘을 실었다.
그건 그야말로 세력의 싸움이었고, 각자가 웬만한 국가를 찜 쪄 먹을 재력으로 호가를 외쳐 댔다.
“400조!”
“450조!”
“500조!”
그 중심에서.
왕위룡은 넋을 잃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한 300조 정도에서 호가를 선언해 보려고 했지만, 겨우 몇 초 사이에 500조까지 치솟아 오르는 금액에 손만 움찔거리고 표식은 들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정말 이것이 아니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에게 승산은 조금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마침내 낙찰가가 결정되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명검은 950조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발렌티노 가문의 장자인 샤르넬 발렌티노가 낙찰받습니다!”
“예쓰으으으으.”
벌떡 일어나는 사내.
기뻐 날뛰는 그의 모습에, 왕위룡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하아.”
천마를 만난 날.
자신은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천마를 기다려 왔던 왕씨 가문은, 로만 드미트리를 만남으로써 그 존재 의미를 보상받았다.
그리고 지금.
“인생 진짜 X 같네.”
이인자 자리를 빼앗기고.
천마검법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광명마저도 눈앞에서 강탈당하고 말았다.
역시나 행복은 상대적이었다.
중국의 황제이자 손에 꼽히는 권력자인 왕위룡이지만, 그는 정말 이번 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 * *
드미트리의 장례식.
김판석의 재판.
광명의 경매 등등.
두 차원이 통합되고 여러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시간도 빛처럼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
세상에는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