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화
16화
재난지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뽑는다면 식량과 식수이다.
각종 시설물이 파괴되어버린 상황에서 식량도 식수도 원활하게 수송되기 힘들게 된다.
수송된다고 해도 터무니없을 만큼 가격이 상승해 버려서는 모든 것을 잃은 이들이 손에 넣기 힘들다.
결국 이재민들에게 식량과 식수를 수송하는 임무는 매우 중요해져서 흡사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다.
“줄 서세요! 줄 서!”
“멈춰! 멈추라고!”
UN군 사령부에서 지원 요청을 받은 한국군 특전사들은 식량 수송 트럭 보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의료 지원을 하고 있는 의료지원단의 보호 임무를 해야 했지만 재난 지원 본부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다급했다.
그런 와중에 대한민국 국평단의 특전사들은 매우 믿을 수 있는 고급 인력이었다.
하지만 식량 수송 트럭 보호 임무가 생각보다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얀 트럭에 UN의 글자가 새겨진 식량 수송 트럭이 나타나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있어도 이미 허기짐에 이성이 남아 있지 않은 이들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다.
자칫 약탈이라도 일어날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가장 식량이 필요한 노약자와 여성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받을 식량을 성인 남성들에게 약탈당할 가능성이 컸다.
최대한 질서를 유지한 채로 식량을 나눠 주지 않는다면 힘 있는 일부가 전부 차지해 버릴 것이었다.
당장 골목길 구석구석에 성인 남자들 집단이 식량 수송 트럭을 주시하고 있기도 했다.
무장한 군인들이 아니었다면 사달이 나도 진작에 났을 터였다.
“최 하사! 밀어내고 가이드라인 쳐!”
“예! 알겠습니다!”
노란색의 가이드라인 띠를 둘러서는 접근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에 가이드라인을 치고 난 뒤에 창수는 이재민들을 트럭에서부터 밀어냈다.
“자! 자자! 조금만 뒤로 가겠습니다! 식량은 공평하게 나눠 드릴 테니까 조금만 뒤로 가세요.”
“나 먼저 줘! 나 먼저! 내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아! 빨리 달라고!”
“예! 예! 알겠습니다! 조금만 뒤로 가 주세요.”
이들의 처지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이었으니 도덕이나 윤리를 찾는 것은 힘들었다.
그렇게 창수는 힘으로 사람들을 밀어내며 최대한 줄을 세웠다.
몇몇 남자들이 거칠게 반항하며 줄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창수는 웃으면서 힘으로 반항하는 이들을 밀어냈다.
온몸을 다해 창수의 몸을 밀어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의 몸만 밀려나는 것에 저항을 하던 이들도 본능적으로 창수가 자신들보다 월등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에이! 줄 서시라니까요. 다 나눠 드린다니까요.”
“윽!”
창수는 꽤나 덩치가 큰 남자가 줄에서 벗어나 앞으로 가려는 것에 그의 팔을 붙잡았다.
창수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뿌리쳐질 리가 없었다.
질질 끌려가서는 다시 줄 안으로 들어가게 되자 창수를 노려보았지만 창수의 미소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자! 한 사람당 하나씩입니다.”
식량 수송 트럭이 열리고서 박스가 하나씩 내려지며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졌다.
막무가내로 모여 있었다가는 오히려 시간만 더 지체되었을 터였다.
그렇게 한 명씩 빠르게 식량 박스를 받은 이들은 사라져 갔다.
이재민들에 대한 식량 보급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듯 보였다.
사람들의 줄을 세우고 있던 창수의 눈이 골목길로 들어가던 한 아이가 식량을 성인들에게 빼앗기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었다.
‘후우! 저런 놈들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거지.’
이미 암시장에 UN에서 보급하는 식량 상자가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문제까지 해결하기에는 인력도 여력도 없었기에 그냥 놔두고 있었다.
창수도 어지간한 것은 눈을 감고 넘어가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식량 박스를 빼앗긴 소년이 남자들에게 울부짖으며 사정을 하는 모습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어? 최 하사! 어디 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오겠습니다!”
창수는 골목길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내 외국군 군인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에 소년에게서 식량 박스를 빼앗은 남자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소년 또한 얼굴 가득 눈물범벅이 된 채로 창수를 바라보았다.
“이봐! 식량이 필요하면 남의 것 빼앗지 말고 줄을 서라고. 식량은 충분하니까.”
틈틈이 익힌 영어로 말했지만 상대가 알아듣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직 칠레의 주 언어인 스페인어를 익히지는 못한 창수였다.
육체 능력이 올라가면서 지능도 올라가 언어를 익히는 것도 빨라졌지만 고된 훈련 중에 틈틈이 해야 하다 보니 영어가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신경 끄고 꺼져.”
상대가 일반인도 아닌 외국군이었기에 남자들도 부담스러웠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창수는 역시나 좋은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성큼성큼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죽고 싶어?”
창수가 가까이 다가오자 남자들 중 하나가 품 안에서 흉기를 꺼냈다.
물론 찌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협을 주려는 것이었지만 창수에게는 웃기지도 않을 일이었다.
창수는 곧바로 남자의 손에서 흉기를 빼앗아서는 골목길의 벽에 흉기의 날을 박아 넣어버렸다.
퍼억!
단숨에 손잡이만 남기고서는 콘크리트 벽에 흉기의 날이 박혀 버리는 것에 남자들은 기가 질린다는 듯이 창수와 벽에 박힌 흉기의 손잡이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줄 서. 당장! 아니면 꺼지든가.”
단호한 창수의 목소리에 이재민들에게서 식량 박스를 빼앗으려고 하던 남자들은 어쩔 줄을 모르다가 결국 도망을 쳤다.
자신들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나 강한 모습을 보일 뿐 자신들보다 강하다 싶으면 꼬리를 마는 양아치들이었다.
그렇게 양아치들이 도망을 가자 창수는 식량 박스를 주워서는 눈물범벅인 소년에게 내밀었다.
“조심해서 가. 알았니?”
“고맙습니다.”
창수는 고맙다는 소년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소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서는 황급히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꽤나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이상은 창수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최 하사!”
“예! 갑니다! 저기 선생님! 줄 서시라니까요! 왜 그리 말을 안 들어요!”
창수는 선임의 외침에 빠르게 달려가서는 또 줄을 엉클려는 사람들을 밀어내서는 줄을 세웠다.
중간중간 양아치들을 보고서는 참교육을 시켜 주기는 했지만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후우! 수고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보통 엄청 오래 걸리는 일인데.”
“아! 이런 일 오래 걸리나요?”
“너는 오늘 처음이지? 보통은 줄이고 뭐고 없이 막 달려와서는 손 내밀고 난리거든. 어린아이들이나 여자들이 깔려서는 다치기도 하고 그래.”
몇 번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 선임의 말에 창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 박스를 받아 무리에서 빠져나가는 것만도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이번 경우는 생각보다 빠르면서도 사고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최 하사.”
“예. 팀장님.”
“아까는 너무 위험했어. 무슨 생각인지는 알고 있지만 끼어들지 마.”
“알겠습니다!”
“좋아. 수고했고 복귀하자.”
자신의 부하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가야 하는 임무를 가진 지휘관들로서는 창수의 행동은 큰 문제였다.
그나마 평소 빠릿빠릿하게 잘하는 창수였기에 크게 화를 내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은 넘어가 줘도 두 번은 넘어가 줄 수 없었기에 경고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은 부사관 선임의 귀에 들어가 창수는 기합을 받게 될 터였다.
아무리 옳은 일을 해도 명령하지 않은 행동을 했으니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기합이야 한 번 받고 말지. 힘든 것도 아니고.’
식량 박스를 빼앗겨 굶는 가족이 하나라도 없는 것이 기합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창수였다.
그렇게 주둔지로 복귀하기 시작할 때였다.
“최 중사님. 저기.”
“뭔데? 최 하사?”
복귀하는 중에 창수의 눈에 다소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남자 한 명이 보였다.
술에 취한 듯 몸을 비틀거리고 있는 남자였다.
“술에 취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안 좋아 보입니다.”
“응?”
“아! 저거 약쟁이야.”
“약쟁이요?”
“그래. 그리고 보니 여기 남미였지? 해외 임무 중에 간혹 볼 수 있어. 우리가 가는 곳이 보통 영 좋지 않은 곳이다 보니. 아편이나 마약을 하는 이들을 보게 되기도 하거든. 신경 쓸 필요 없어.”
마치 좀비와 같이 기이하게 움직이는 남자를 보며 해외 경험이 많은 임 상사가 약쟁이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맨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사람들이 약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약에 빠지기는 했지만 무조건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이 또한 안타까웠지만 창수도 뭘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복구가 늦어지면서 수인성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팀장님.”
“들었습니다. 임 상사님. 팀원들 혹시라도 열이 나거나 하면 바로 보고 해 주세요.”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예방 접종을 하고 오기는 했지만 풍토병과 지진으로 인한 수인성 전염병 전부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정신력과 체력이 뛰어나도 병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위생과 건강에 신경을 더 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한숨이 나올 만큼 더디게 이루어지는 수습 과정을 보며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식량과 식수 수송 임무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학업 지원 임무도 수행을 해야 했다.
지진이 난 폐허에서 무슨 교육이냐고 하겠지만 교육이 목적이 아니라 면역력과 체력이 약한 아이들에 대한 지원이 주목적인 대민 지원 임무였다.
약자인 아이들이기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다.
자칫 식량이 있어도 어른들에게 빼앗기기 일쑤였기에 아이들을 모아서 한 끼 식사라도 지원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피해지가 재건되면 아이들에 대한 이런 지원은 필요 없어지게 될 터였다.
힌국군의 해외 평화 유지 파병의 역사는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한국군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계 각국에서 호평과 감탄을 받고 있다.
그건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지원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국군 파병부대들은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주둔지 주변의 폐허를 정리해 나갔다.
칠레 전역과 세계 각국으로부터 지원된 물자들도 효율적인 지원을 통해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르게 재건이 되어갔다.
물론 헌신적인 국군 장병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에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피해지의 이재민들은 조금씩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는 듯했다.
“으아아아! 이봐! 왜 이러는 거야? 사…… 살려 줘! 살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라고 한다면 너무나도 큰 충격에 미쳐버렸다고 설명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재민 텐트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치안이 좋지 않은 남미에서 살인 사건이야 크게 주목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
물론 칠레는 다른 남미에 비해 치안이 좋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한국과 같이 치안이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흔한 살인 사건으로 끝나는 듯했고 살인 사건을 해외 파병군들이 신경 쓸 일은 사실 없었다.
다만 그 살인이 광기에 의해 집단으로 번져 가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총을 든 군인까지 습격을 한 것이다.
그것도 영국군이 습격을 받아 사망하게 되면서 상황은 혼란스럽게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