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현석아!
(9/210)
9화 : 현석아!
(9/210)
9화 : 현석아!
2021.07.21.
야심한 밤.
스윽!
검은 그림자가 어둠을 틈타 움직였다.
‘이 앞인가?’
그림자가 목표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필 그때, 구름을 비껴 낸 달빛이 아래를 비췄다.
아스라한 달빛이 그림자의 검은 때를 벗겼다.
장 의원, 그가 진씨세가 서고 앞에 섰다.
“!?”
모퉁이 너머의 인기척.
장 의원이 즉시 몸을 숨겼다.
“음, 아무 이상 없군.”
잠시 뒤, 진한 갈색 무복을 입은 진가의 무인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가볍게 주위를 확인하고 등을 돌렸다.
다소 태만해 보였지만, 애초에 서고는 삼엄히 경계할 만큼 중요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대로 저자가 떠나면 한동안 이곳은 아무도 오지 않겠지.’
장 의원은 오래전부터 진씨세가의 경계태세를 조사했다.
혹시 모를 사태, 예를 들면 자신의 사기가 들통나는 순간 바로 달아나기 위해.
다행히 오늘까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이 지나면, 더는 그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은 오늘 보옥을 훔치고 진씨세가를 뜰 거다.
원래라면 장 의원이 진가를 떠날 시기는 내일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저녁에 소가주의 처소에서 본 보옥 때문이었다.
‘설마 진씨세가에 그 같은 보물이 있었을 줄이야.’
아주 잠깐 봤을 뿐인데,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옥의 영롱한 빛이 떠올랐다.
‘그걸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계획을 하루 앞당기는 건 일도 아니지.’
이제 진가의 무사가 떠나고 꽤 시간이 흘렀다.
장 의원은 한 번 더 주위를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서고 문 앞에 서더니,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변방에 위치한 작은 가문답군. 그래도 명색이 한 가문의 서고인데, 이리도 관리가 허술해서야!’
비록 문고리에 자물쇠는 걸려있지만, 반년 넘게 준비한 사기꾼에게 이깟 자물쇠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철컹!
장 의원이 복제한 열쇠로 자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가주님이 맡기신 목함이요? 서고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장 의원님께서 그 목함은 왜……?
그는 진천우에게 요상절초 십팔수 시술을 마치자마자 즉시 현석을 찾았다.
‘하인 놈은 진짜 보옥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지.’
그러니 목함의 위치를 술술 밝힌 거겠지.
단, 그 이상은 물을 수 없었다.
‘만약 녀석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 제 주인에게 일러바치면, 숨긴 위치가 바뀔 테니까.’
자신은 무조건 오늘, 보옥을 훔쳐 달아나야 했다.
바뀐 장소를 다시 알아내고 훔칠 시간은 없었다.
다행히 그는 뛰어난 언변으로 그 자리에서 현석을 속아 넘겼다.
‘문제는 지금부터지.’
장 의원이 서고로 성큼 걸어갔다.
좌우로 커다란 책장이 줄줄이 늘어섰지만, 그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직 앞으로, 앞으로!
점점 더 서고 깊숙이 들어갔다.
“후우!”
그러다 서고 끝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앞에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는 커다란 선반이 보였다.
서고는 단순히 책만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적어도 서고라 부르려면, 보관한 책을 관리하는 능력도 갖춰야 했다.
언제든 책에서 잘못된 내용을 발견하면 수정할 지필묵은 물론이고, 책을 엮는 끈이 상하면 바로 교환할 수 있도록 아교와 끈 뭉치도 따로 준비해 둬야 했다.
문제는 진씨세가는 그것들을 목함에 넣어 보관했다.
그리고 눈앞의 선반에 그것들이 전부 늘어져 있었다.
‘……좀 많군.’
하나, 둘, 셋…… 대략 백 개쯤?
“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진가의 서고 담당자였다면.
‘아니, 하다못해 서고에 들러 몇 번이라도 책을 빌려봤다면…….’
그랬으면 적어도 목함들이 어떤 순서로 나열됐는지 알고, 좀 더 찾기 수월했을 텐데.
‘아니지. 설사 그랬다 해도 외인인 나에게 일부러 홍옥을 숨긴 목함의 위치를 알려주지는 않았겠지.’
처음부터 설마 이런 데 보물을 숨겼겠냐는 심리를 이용한 함정.
즉, 어차피 자신은 오늘 밤이 새기 전에 저것들을 모두 뒤져야 했다.
그렇게 각오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런데 그때!
“장 의원은 왜 한숨을 쉬는가?”
결코. 지금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서고에 울렸다.
장 의원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장에 드리운 그림자 너머로 뭔가가 있었다.
곧장 진천우가 모습을 보였다.
“그것도 이 야심한 밤, 따로 자물쇠로 걸어 잠근 우리 가문서고 안에서 말이지.”
씨익!
서고의 주인이 늙은 도둑을 바라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었다.
* * *
“…….”
진천우가 조용히 장 의원을 노려보았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야멸찬 표정.
이를 본 장 의원은 대단히 낭패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네가 이 늦은 시간에 서고에는 어쩐 일이냐?”
도둑이 되레 큰소리쳤다.
“그건 제가 할 말이군요.”
“나 말이냐? 당연히 서고에 책을 찾으러 왔지.”
“굳이 이 늦은 시간에 말입니까?”
“그래,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보고 싶은 책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더구나.”
“그렇다 해도 장 의원은 야밤에 진씨세가의 서고에 들어올 수 없을 텐데요?”
그랬다.
어떤 사정이 있든, 장 의원은 외인이었다.
해가 진 뒤 가문 서고에 드나들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되는 압박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떠.
“따로 허락을 받아두었다.”
“허락?”
누구의?
“낮에 따로 가모님께 허락받았다.”
개소리!
[사기꾼의 개소리를 간파했습니다.]
[스킬 ‘언변’의 숙련도가 아주 소폭 상승합니다.]
[현재 타이쿤 사용자와 사기꾼의 숙련도가 서로 동일합니다.]
타이쿤조차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장 의원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못 믿겠다면 확인해 보거라.”
이 늦은 시간에 어머니를 찾아가라고?
설령 그러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
장 의원이 노리는 게 그거였다.
그는 그 틈을 타 달아날 생각이었다.
“왜 가만있느냐?”
장 의원이 득의양양하게 진천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전장에서 승리한 장수와도 같은 표정.
“가서 확인해 보래도?”
실제로 그가 이겼다.
‘어쩔 수 없지. 보옥은 포기한다.’
애초에 보옥만 포기하면, 여기서 달아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진씨세가의 초대를 받아 온 의원.
아무리 소가주라도, 어떤 확인도 없이 그에게 죄를 묻는 건 힘들었다.
이대로라면 진천우는 뻔히 두 눈 뜬 채 늙은 도둑을 놓아줘야 할 판.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거냐? 그렇다면 나는 처소로 돌아가 기다리마. 확인이 끝나거든 날 찾거라.”
장 의원은 아예 입가에 얕은 조소를 띠며 몸을 돌렸다.
그 직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확인했습니다.”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가.
“어머니께서는 그런 허락을 한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뭣이? 네가 언제 가모께 그걸 물었다는 거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니까 개소리.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왜 못 묻겠습니까.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어머니께 들러, 오늘 장 의원에게 서고 출입을 허가했는지 물었고, 어머님은 그런 적 없다고 하셨습니다.”
개소리에 개소리로 답했을 뿐이거늘!
[‘아주 적절한 개소리’를 시전했습니다.]
[스킬 ‘언변’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그 순간, 언변 숙련도가 크게 올랐다.
분명 저녁때까지는, 앞으로 극소량만 상승한다고 했는데?
진천우가 그 이유를 확인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타이쿤 사용자의 언변 숙련도가 장 의원을 넘어섰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왜 말이 안 됩니까? 아들이 어미를 찾아가 간단히 묻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당연히 이상하지! 내가 가모께 허락받았다는 이야기는 방금 말한 건데, 어떻게 네가 그걸 미리 알아본단 말이냐?”
“그냥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어 그랬습니다.”
“느닷없이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고? 그거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 아니냐!”
“글쎄요? 사실 전 워낙 병환이 깊어, 얼마든지 이상한 짓을 저지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병을 치료해야 할 분은 바로 장 의원이지요!”
장 의원이 뭐라 하든 소용없었다.
[사기꾼의 헛소리를 간파했습니다.]
[‘맞헛소리’를 시전했습니다.]
[스킬 ‘언변’의 숙련도가 아주 소폭 상승합니다.]
[사기꾼의 개소리를 간파했습니다.]
[‘개맞소리’를 시전했습니다.]
[스킬 ‘언변’의 숙련도가 아주 소폭 상승합니다.]
[사기꾼의 헛잡소리를 간파했습니다.]
[‘헛맞잡소리’를 시전했습니다.]
[스킬 ‘언변’의 숙련도가 아주 소폭 상승합니다.]
그는 이제 언변으로 진천우를 당할 수 없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이이……!”
어디 생각이나 했을까.
평생 입담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린 적 없던 자신이, 철들 무렵 발작으로 쓰러진 뒤부터 가문 밖에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약관의 젊은이에게 입으로 농락당할 줄이야!
너무나 분하고 수치스러웠다.
“이이이! 빌어먹을! 좋다. 네가 이겼다.”
결국 나와버리고 만 패배 선언.
솔직히 진천우도 의외로 장 의원이 순순히 인정했다고 생각했다.
좀 더 변명을 늘어놓으며, 추하게 물고 늘어질 줄 알았는데.
덥석!
알고 보니 다른 쪽으로 추해진 거였다.
장 의원이 갑자기 진천우의 멱살을 잡았다.
‘가만 생각하니, 내가 왜 이 녀석과 말씨름을 한 거지?’
어차피 자신은 오늘 진씨세가를 떠날 사람.
‘그냥 이놈을 힘으로 꺾고 달아나면 그만인 것을!’
그런데 보통 느닷없이 멱살이 잡히면 당황할 법도 한데, 진천우는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상대를 꾸짖듯, 매서운 눈을 하며 호통까지 치는 게 아닌가?
“장 의원, 결국 본색을 드러냈군!”
허세다!
장 의원은 확신에 차서 소리쳤다.
“훗! 네가 날 노려본다고 어떻게 할 수 있을 줄 아느냐? 아무렴 내가 아무리 늙었어도, 어제까지 오늘내일하던 환자에게 당할 성싶으냐!”
맞는 말이다.
진천우는 그저 타이쿤 보상으로 운신이나마 가능한 몸을 얻었을 뿐.
애초에 그가 가진 근력으로는 장 의원의 깡마른 팔조차 비틀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걸 본인도 몰랐을까?
“아무렴, 환자인 내가 어찌 의원과 싸울까?”
“?”
게다가 진천우는 처음부터 서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뒤늦게 장 의원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낭패가!
하지만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아직 달아날 방도가 남아있었다.
마침 제 손에 멱살 잡힌 채!
“이놈! 당장 네놈을 인질로 삼아 진씨세가를 빠져나가겠다!”
장 의원이 급히 진천우를 제압하려고, 멱살을 잡지 않은 손까지 앞으로 뻗었다.
그 손속이 노인답지 않게 재빨랐지만, 아무렴 소리보다 빠를 수 없었다.
“현석아!”
입을 틀어막히기 전에 진천우가 먼저 소리쳤다.
그 소리에 책장 뒤에 숨은 현석이 튀어나왔다.
현석은 처음부터 소가주의 명으로 그 뒤에 숨어 둘의 대화를 모두 엿들었다.
“장 의원! 감히 소가주님께 무슨 짓입니까!”
평소 몸이 불편한 주인을 위해, 주인 몫의 근육까지 제 몸에 집어넣은 근육질의 하인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퍽!
그 직후, 아주 큰 파열음이 진가 서고를 진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