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백풍대와 공동작업 (4)
(22/210)
22화 : 백풍대와 공동작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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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 백풍대와 공동작업 (4)
2021.08.21.
“소가주?”
백풍대주가 다가와 물었다.
“장부에 무슨 내용이 쓰여있길래 그러시오?”
“꽤…… 믿기지 않는 내용이 적혀있더군요.”
“그래?”
그리고 더 묻지 않았다.
당장 장부 내용을 다그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진천우의 상태가 보기보다 훨씬 좋지 않아는 걸 눈치챘다.
그 생각대로, 진천우는 장부를 본 순간부터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철기방, 녹청문, 금룡가…….’
장부에는 장 의원과 이 세 곳의 거래 내역이 적혀있었다.
세 곳 모두 낯익은 이름, 아니,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진씨세가와 관계를 맺은 동맹과도 같은 곳이었다.
철기방은 인근 장인들이 연장을 부딪치며 일으킨 세력이었다.
진씨세가는 항상 그들에게서 정기적으로 무기와 도구를 거래했다.
녹청문의 문주는 근방에서 가장 뛰어난 약사였다.
진천우의 병세를 가장 먼저 알아낸 의원도 녹청문에서 파견 나온 이로, 이후로 진씨세가는 매년 녹청문에서 고가의 약초를 받아왔다.
금룡가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무가였다.
진씨세가에는 따로 진검대가 있지만, 그들만으로 부족했기에 삼 년에 한 번씩 보호비를 내며 금룡가에서 무인을 빌렸다.
진씨세가는 이들 중 유일한 문사 가문.
본래 진가의 가주는 가문 중앙에 큰 학당을 열어, 배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중에는 당연히 철기방, 녹청문, 금룡가의 아이들도 있었고, 그들에게 글 스승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도 이들이 장 의원과 이런 거래를 해?’
장부에 적힌 내역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장 의원이 그들과 거래할 돈이 어디서 났겠는가?
모두 진씨세가의 재산이었다.
놈은 소가주의 발작을 진정시켰다는 빌미로, 진가를 겉에서부터 야금야금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세 곳은 이를 알고도 제 욕심에 남몰래 장 의원과 결탁했다.
‘어찌 이들이!’
지독한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장 의원은 차라리 외인이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어찌 그들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대주님, 보자기 외에 다른 것들도 살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게.”
백청강은 흔쾌히 소가주의 부탁을 허락했다.
백풍대 무인이 목탄화와 목함을 가져왔다.
진천우는 목탄화를 잠시보다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머리가 터질 정도로 복잡한 수식과 문양이 가득 찬 그림.
그러나 한눈에 그 정체가 파악되었다.
‘이건 소환단을 진화시킨 것과 관련된 그림이군.’
그러니 더 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봐도 이해 못 하는 내용인 데다, 이미 소환단은 대환단으로 진화해 제 뱃속에 들어간 뒤였다.
다음으로 목함을 살폈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 대충 예상이 갔다.
‘숨은그림찾기 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그림이 이 안에 있었지.’
그러니까 목함 안에는 뭔지 몰라도 세 가지 물건이 들어있다는 소리였다.
공교롭게도 장부 내역과 연관된 거래 대상도 셋.
이게 과연 우연일까?
‘절대 그럴 리 없지.’
진천우는 장 의원에 대해 잘 알았다.
너무 잘 알았다.
그는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사기꾼.
자신과 거래한 세 세력이 배신할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달칵!
목함을 열었다.
세 권의 또 다른 장부가 들어있었다.
‘역시 장부마다 철기방과 녹청문, 금룡가의 비리가 기록돼 있군.’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당장 이 장부를 공개해도, 그들은 부정할 것이고 그 직후 꼬리를 잘라낼 것이다.
물론 그걸로도 손해가 크겠지만, 진천우가 원한 건 그런 사소한 복수가 아니었다.
제가 당한 것만큼, 아니 그 몇 배로 되갚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
‘바로 장부를 통해 증거를 수집해야겠군.’
그런데 여기에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이걸 세 곳이 전혀 모르게 진행해야 하는데…….’
만일 조사가 들통나면 즉시 방해가 들어올 테고, 방해가 힘들면 그들은 지체 없이 꼬리를 자르고 부정할 테지.
그럼 기껏 조사한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지금 진씨세가의 힘으로는 세 곳 몰래 이것들을 조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진씨세가가 안 되면…….’
평소라면 이쯤에서 지독한 두통 때문에 생각을 멈춰야 했지만, 백회를 개방한 덕분인지 끝없이 생각할 수 있었다.
“소가주.”
그때 백풍대주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제 좀 안정된 모양이군. 그럼 장부에 대해 들어볼까?’
“…….”
그런데 뭔가 상태가 이상하다.
“소가주?”
“…….”
조금 전까지 혼자 생각에 빠져있던 진천우가 백풍대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시선으로 얼굴을 뚫을 만큼 빤히!
“아!”
그러다 갑자기 손뼉까지 쳤다.
“제가 그만 백풍대를 잊었군요.”
“음?”
“백풍대의 본연의 임무가 뭡니까?”
알면서도 하는 질문.
하지만 백풍대주는 곧장 답해주었다.
지금 이 문답에 뭔가 의미가 있다는 걸 그도 알아차렸다.
“감찰이오. 맹에서 다른 무력단체들과 달리 백풍대를 백(百)이나 만든 까닭은, 오직 천하 곳곳의 부정과 비리를 감찰하기 위함이오.”
그랬다.
백풍대의 또 다른 이름은 무림 감찰대였다.
“대주님, 지금 당장 장가 놈과 연관된 비리를 고발하려 합니다.”
“무엇이?”
“방금 찾아낸 보자기 안의 장부와 목함 안의 장부 내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진천우는 그 자리에서 두 장부 내용을 짧게 설명했다.
“그렇군.”
설명이 끝나자, 백청강이 즉시 몸을 일으켰다.
다른 백풍대 무인들도 함께 일어났다.
대주가 즉시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가장 가까운 철기방부터 친다!”
* * *
쾅!
철기방의 정문이 박살 났다.
“웬 놈들이냐!”
느닷없는 습격에 놀란 철기방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눈에 보이는 이만 수십 명.
그들은 장인의 맥을 이은 이답게 손에 날카로운 병장기를 쥐었다.
그러나 침입자의 한마디에, 하늘을 찌를 듯한 병기의 예기는 단숨에 땅으로 꺼졌다.
“백풍대다!”
“백풍? 설마 맹의?!”
“당장 철기방을 샅샅이 뒤져라!”
“존명!!”
대주의 명이 떨어지자, 그 즉시 백풍대 무인 십여 명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 잠깐!”
뒤늦게 나타난 철기방주가 기겁하며 이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땅에 떨어진 병기를 다시 곧추세울 수도 없었다.
그건 곧 맹에 대한 정면 도전.
그리되면 철기방 따위는 하룻밤 만에 세상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이대로 영문도 모를 채 당할 수는 없는 법.
철기방주가 백풍대주에게 사정했다.
“어째서입니까? 갑자기 백풍대가 저희 방에 들이닥친 연유라도 알려주십시오.”
“조금 전, 철기방의 비리가 적힌 장부를 발견했다.”
“말도 안 됩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지 우리가 확인하겠다.”
“그런!”
백풍대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추가 조사도, 명확한 증거와 증인도 필요 없었다.
혐의가 있으면, 그냥 들이닥쳐서 직접 찾으면 그만!
우당탕!!
백색 폭풍이 사정없이 철기방을 휩쓸었다.
그리고 잠시 뒤.
“찾았습니다!”
한 백풍대 무인의 손에 낡은 장부가 보였다.
진천우가 목함에서 발견한 장부와 쌍을 이루는.
“……!!”
이를 알아챈 철기방주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당장 철기방주의 신병을 확보하라!”
“존명!”
“자, 다음은 녹청문이다!”
“존명!”
흰 폭풍이 다음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 * *
철기방에 이어 녹청문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백풍대는 곧바로 금룡가에 들이닥쳤다.
“샅샅이 뒤져라!”
“존명!”
그들은 금룡가에서도 여전했다.
금룡가는 앞의 두 곳과 달리 제대로 된 무가였지만, 상관없었다.
금룡가에 몇 명의 무인이 있고 그 수준이 얼마나 되든, 백풍대주 한 명도 감당할 수 없었다.
허나 금룡가가 철기방이나 녹청문과 달랐던 건, 무력이 아니었다.
우당탕! 쿵쾅!
쾅쾅쾅!!
“맹의 행사가 상당히 과격하군요.”
화려한 금빛 장포를 두른 중년인.
금룡가주가 침착한 얼굴로 제 가문을 뒤지는 백풍대 무인들을 지켜보았다.
다소 언짢아 보이나,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은 없었다.
‘어쩌면…… 힘들지도?’
백풍대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백풍대는 금룡가의 비리 증거를 찾지 못했다.
“만족할 만큼 뒤졌습니까?”
금룡가주가 낮게 웃었다.
‘금룡가부터 뒤졌어야 했나?’
아니다.
놈들이 철기방과 녹청문의 소식을 듣고 흔적을 숨겼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처음부터 정기적으로 흔적을 숨긴 게 분명했다.
역시 다른 세력과 달리 칼밥으로 먹고 사는 자들답게 대비가 보통이 아니었다.
-대주님…….
수하 하나가 다가와 몰래 전음을 보냈다.
여차하면 금룡가를 뒤집어서라도 증거를 찾겠다는 각오.
‘안 된다.’
그러나 백청강은 명령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지금도 꽤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이 이상 나가면 맹은 명분을 잃는다.
명분은 중요했다.
그걸 알기에, 금룡가주가 한껏 으스대며 눈앞의 불청객들에게 축객령을 내릴 수 있었다.
“더 이상 내 가문에서 찾을 게 없다면, 백풍대 무인들은 맹으로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크흠!”
그 말대로다.
하지만 백풍대가 이대로 떠나면, 금룡가는 꼬리 자르기를 할 게 분명했다.
‘젠장!’
차라리 상대가 마교나 사파라면, 주저 없이 참하면 되거늘.
어쭙잖은 악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그러기 위해 백풍대가 있는 거지만, 그들이라고 언제나 명확히 악을 찾지는 못했다.
그래서 미안했다.
지금 제 등 뒤에 있는 진씨세가의 소가주에게.
“한 군데만 더 찾아도 되겠습니까?”
그 순간, 진천우가 앞으로 나섰다.
-소가주!
백풍대주가 화들짝 놀라, 전음을 보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백풍대의 행사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입을 열면, 자칫 진씨세가가 이 일에 끼어든 꼴이 된다.
금룡가에서 비리 증거를 찾았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백풍대는 언제까지고 진가에 머물 수 없고, 그들이 떠나면 인근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곳은 금룡가였다.
“……천우야.”
금룡가주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진천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 울림이 꽤 자연스러웠다.
당연했다.
예부터 금룡가와 진씨세가는 사이가 좋았다.
가주끼리는 사석에서 호형호제까지 했다.
그래서 더 용서할 수 없었다.
‘동생이란 작자가 형님 가문을 등쳐 먹으려 하다니!’
“금룡가주님, 제가 한 군데만 더 찾아도 되겠습니까?”
진천우가 애써 화를 숨기고, 정중한 어조로 재차 물었다.
백풍대주가 계속 전음을 보냈지만 전부 무시했다.
금룡가주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거라.”
참으로 평탄한 어조.
그러나 그 뒤의 말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대신 너는 이 일에 진씨세가의 이름을 걸어야 할 거다.”
진가의 이름을 걸어라.
못 찾으면, 이 일을 가문 대 가문의 일로 여기겠다는 뜻.
백풍대주가 그토록 주의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하겠습니다.”
진천우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느닷없이 백풍대가 들이닥칠 때도 꿈쩍하지 않던 금룡가주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허나 그뿐.
‘그것은 누구도, 절대 찾지 못한다. 설사 찾아내도…….’
“어디 열심히 찾아보거라!”
금룡가주가 몸을 옆으로 틀며 눈앞의 청년에게 길을 터주었다.
진천우는 그 즉시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그 눈에는 불안 따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그의 눈에는 불안 대신.
[붉은 붓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요)]
앞서 경험한 숨은그림찾기에서 미처 쓰지 못한 붉은 붓이 시야 구석에서 둥둥 뜬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