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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 독괴의 기억 (1) (35/210)


35화 : 독괴의 기억 (1)
2021.09.20.


끼긱-!

“게 섰거라!”

독괴가 달아나는 화후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주위 산천초목이 일시에 몸을 떨었다.

‘놀랍도록 심후한 내공!’

진천우가 감탄한 눈빛을 지었다.

조금 전의 일갈만으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알았다.

‘아마 내가 평범하게 이 소리를 들었다면 그대로 정신을 잃었겠지.’

다행히 지금 그는 독괴의 몸 안에 있었다.

그런데 진천우 외에 독괴의 고함에 영향받지 않는 생명체가 하나 더 있었다.

끼기긱!

그랬다.

놈은 평범한 원숭이가 아니었다.

무려 전설의 불 원숭이!

화륵!

화후가 느닷없이 입에서 불을 토했다.

‘아니?!’

“이놈이!”

깜짝 놀라는 진천우와 달리, 독괴는 즉시 팔을 휘둘러 제 쪽으로 날아오는 불을 꺼트렸다.

끽?

이를 본 화후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 원숭이의 감정이 얼굴로 드러나?

확실히 녀석은 영물이었다.

게다가 원숭이 주제에 몸에 누렇고 붉은 천을 무슨 승려의 가사처럼 둘렀다.

화후가 다시 한번 불을 토하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기껏 숨을 들이켜다 말고 녀석이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끼이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미혼산이 효과를 보이는구나.

‘응?’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미혼산?’

-그래도 이걸로는 부족해 보이니, 다른 독을 더 뿌려볼까?

‘독괴의 마음의 소리인가? 이건 의선의 기억 때는 없던 현상인데?’

진천우는 처음 겪는 현상에 신기해하면서도 시종일관 한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로 독괴의 양손.

휙!

그 순간 독괴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검은 독수가 쏘아졌다.

미리 집중하지 않았다면 놓칠 뻔했다.

‘독뇌!’

그것도 독괴가 직접 펼치는 독뇌였다.

진천우는 타이쿤 보상으로 독뇌를 얻었지만, 그가 얻은 건 어디까지나 독뇌의 내공 운용뿐이었다.

당장 독뇌를 펼치기 전의 준비 동작과 펼치는 순간의 손동작, 마지막으로 독뇌를 펼치고 회수하는 것까지 그 하나하나가 진천우에게는 천금을 주고도 못 얻을 기회였다.

그는 이 모든 걸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 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미혼산에 이어 독뇌까지 사용했으니, 아무리 영물인 화후라도 별수 없겠지?’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독뇌로 쏜 독이 뭔지 몰랐지만, 독괴가 직접 사용한 만큼 평범한 독일 리 없었다.

게다가 이미 화후는 미혼산에 흠뻑 취한 상태.

검은 독을 피할 수 있을 리가…….

화르륵!

‘뭣?!’

확실히 녀석은 독을 피하지 않았다.

불 원숭이는 곧바로 입에서 불을 토했다.

치이익!

검은 독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화후의 불길이 이 정도였다니?

‘그런데 녀석은 분명 미혼산에 당했을 터인데?’

끼익!!

화후는 자신을 공격한 검은 독을 모두 없앤 뒤 크게 소리 질렀다.

녀석의 얼굴은 마치 어떠냐고 으스대는 것 같았다.

전혀 미혼산에 취한 거로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 휘청댄 건 연기였나?

-틀림없이 조금 전까지 미혼산에 흠뻑 취해있었는데……. 설마 그 잠깐 사이 몸에서 미혼산을 몰아낸 건가?

독괴 역시 속으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영물이라도 이런 해독 속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잠시 뒤, 독괴는 화후를 노려보며 기이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 생각대로군!

‘생각대로라고?’

알고 보니 독괴는 화후의 내단을 노리는 게 아니었다.

-어느 문헌을 보아도 화후는 이상하리만큼 독에 강했다. 독을 다루는 영물보다 훨씬 더. 아무리 독과 상극인 화기를 지녔어도 말이 안 된다 여겼거늘, 직접 눈앞에서 보니 그 이유를 알겠구나.

‘아!’

거기까지 생각을 읽자, 진천우도 독괴가 어떤 가정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화후기식법(火猴氣息法).

확실히 전설의 영물이라 불릴 정도이니, 그 호흡도 남다를 터.

어쩌면 입에서 불을 뿜고 몸속에 내단을 만드는 것도 녀석의 특별한 호흡 때문인지도 몰랐다.

적어도 독괴는 그리 확신했다.

‘그는 처음부터 화후의 호흡을 훔치러 온 거구나.’

“네놈!”

독괴가 다시 몸을 날렸다.

그의 양손에서 새로운 독이 튀어나와 화후에게 날아갔다.

끼기긱!

당연히 녀석도 가만있지 않았다.

화륵!

화후는 또 입에서 불을 토해내 독을 태우고 달아났다.

과연 네발 달린 짐승답게 그 몸놀림이 무인의 경공 못지않았다.

“내가 놓칠 줄 아느냐! 게 섰거라!”

끼긱! 끽!!

그렇게 한 인간과 한 영물의 추격전은 사흘 밤낮을 이어졌다.

* * *

“훅! 훅! 훅!”

독괴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실제로 폐를 감싸는 혈관 중 일부가 터졌는지, 숨을 쉴 때마다 비릿한 혈향이 흘러나왔다.

‘이처럼 전력으로 달려본 게 얼마 만인지…….’

독괴는 남만 출신의 늙은 독인에게서 독을 배웠다.

그는 하나를 들으면 스스로 열을 깨우치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의 재능으로 독공을 익힌 지 삼 년 만에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이뤘다.

그리고 십 년이 되는 해, 자신만의 독학을 정립했다.

그런 와중 틈틈이 익힌 무공으로 벽까지 넘어버렸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天才).

독괴는 지금껏 이루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성취했다.

하지만 눈앞의 불 원숭이만은 그렇지 않았다.

‘놈을 찾기 위해 보낸 세월만 무려 삼 년.’

우연히 발견한 문헌에서 화후의 특징을 눈여겨본 뒤 천하를 뒤져 이곳 천옥산에서 녀석을 발견했다.

솔직히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남들은 평생을 바쳐도 그림자도 못 본다는 전설의 영물을 삼 년 만에 찾았으니까.

어찌 보면 그는 여전히 운이 좋았다.

당연히 그 운이 이후에도 적용될 줄 알았다.

전혀 아니었다.

당장 사흘 내내 화후의 꽁무니를 쫓았지만, 독괴가 처음 놈을 발견한 건 무려 석 달 전이었다.

‘설마 화후가 이 정도로 영악할 줄이야.’

아니, 단순히 영악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인정해야 했다.

눈앞의 불 원숭이 또한 자신 못지않은 천재라는 걸.

‘벽을 하나 넘은 나와 맞먹는 신체 능력은 물론이고, 독을 뿌리고, 함정을 파도 전부 눈치채고 피하는 머리까지 있을 줄이야!’

분명 처음 몇 번은 독과 함정으로 붙잡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그때마다 화후는 약간의 우연과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자양분 삼아 무섭게 성장했다.

이제 독괴는 화후를 볼 때, 단순한 천재(天才)를 넘어 천재(天災)를 마주한 것만 같았다.

‘대단하구나!’

한편, 진천우는 한껏 감탄한 얼굴로 화후와 독괴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에는 둘 다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강해진 건 화후만이 아니었다.

“후우! 흡!”

독괴는 화후를 쫓으며 몇 번이나 호흡을 바꿨다.

그때마다 갑자기 쫓는 속도가 느려졌지만 금세 제 속도를 따라잡더니, 잠시 뒤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정말 그는 화후의 호흡을 훔치고 있다.’

전설의 영물로 불리는 불 원숭이의 호흡.

독괴가 이것을 훔칠 때마다 그의 몸속에 조금씩 화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화후기식법의 탄생하는 순간.

진천우는 이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하면서, 스스로 익힌 화후기식법의 숙련도를 올랐다.

‘그뿐만 아니다. 지난 사흘간 독괴가 펼치는 독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독공의 숙련도 역시 크게 올랐다.’

독괴는 독에 있어 경지를 이룬 달인.

그런 그의 독공을 지켜보는 일은 진천우에게 이미 기연과 다름없었다.

그러는 사이, 둘의 추격전은 점점 끝을 바라보았다.

“헉! 헉!”

끼기긱! 끽!!

“여긴?”

독괴가 화후를 쫓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장소.

그는 천옥산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산 정상에 올랐다.

거기서 아래를 내려보며 산세와 지리를 외워, 불 원숭이가 숨어있을 곳을 찾았다.

거기에 지난 석 달간 요망한 원숭이를 쫓으며 천옥산 구석구석을 누볐다.

이제 그가 천옥산에서 모르는 장소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낯설었다.

“천옥산에 이처럼 너른 공터에 청석으로 쌓아 올린 고아한 제단이 있다니?”

제단 뒤로 깎아내린 듯한 아찔한 절벽이 보였고, 그 위에 기이한 느낌의 검은 깃발이 외로이 흔들렸다.

참으로 신비한 장소.

“뭐, 여기가 어딘지는 널 사로잡은 다음 생각하기로 하지.”

그러나 독괴는 지금 가장 우선해야 할 게 무엇인지 헛갈리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지난 석 달간 쫓은 목표가 보였다.

녀석은 힘들고 지친 상태.

게다가 아래에는 놈을 쫓으며 자신이 뿌린 독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부처님 손의 손오공처럼, 불 원숭이는 제 손안에 있었다.

“끝이다.”

분명 그럴 거라 자신했는데.

끼이익-!!

화후는 느닷없이 귀 찢는 비명을 지르더니, 몸을 돌려 제단 쪽으로 달려갔다.

놓칠 수 없었다.

독괴가 그 뒤를 쫓았다.

끽! 화르륵!

그 순간 놈이 고개를 돌려 시뻘건 불을 토했다.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니, 제대로 노린 함정이었다.

하지만 잠시 뒤 녀석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놈이 어딜!”

독괴가 거센 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아무리 벽을 넘은 무인이라도, 화후가 뱉는 불에 달려들면 내상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독괴는 내상을 각오하고 불 원숭이의 목덜미를 노렸다.

끼익!

뒤늦게 화후가 짐승 특유의 몸놀림을 부렸지만, 인간의 금나수를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젠장!”

목덜미 대신 그의 손에 붉은 천이 잡혔다.

원숭이가 누런 천과 함께 몸에 두르고 있던 것이었다.

-기껏 내상까지 각오했는데, 또 추격전이 재개되겠구나.

독괴가 아쉬워하다 말고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끼기긱! 끽!

어째서인지 화후가 한껏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녀석은 눈이 붉은 천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뭐지? 생각 이상으로 아끼는 천인가?

그럼 이걸 미끼로…….

휙!

그런데 화후는 마치 독괴의 생각을 읽은 듯 바로 몸을 돌렸다.

놈은 제단 뒤, 흑(黑)의 깃발로 올라가더니, 그대로 흑기를 뜯고 냅다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러니까, 그냥 절벽 쪽으로 뛰어내렸다!

“이 무슨?!”

이를 본 독괴가 양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는 불 원숭이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녀석의 내단을 노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얼마간 옆에 두어 놈의 호흡을 훔치면 충분했는데…….

“안 돼!”

독괴가 뒤늦게 멈췄던 다리로 다시 땅을 박찼지만, 이미 늦었다.

절벽 아래에 화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놈은 저 아래 울창한 녹음 밑으로 떨어졌을 터.

“어째서?”

절대 쉽게 자살할 녀석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지난 사흘간 그렇게 힘들게 쫓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자신조차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지난 사흘간의 긴박한 추적이 이리도 허망하게 끝날 줄이야!

“…….”

독괴는 그저 쓰게 웃었다.

내려가 시신을, 아니면 놈의 흔적이라도 확인해야 할까?

하지만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것도 그렇고…….”

그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놈은 왜 떨어지기 전에 깃발을 움켜쥔 거지? 그것도 내게 이것을 빼앗긴 다음에…….

그가 화후에게서 뺏은 붉은 천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평범해 보이는 천.

이 천과 검은 깃발이 무슨 관계라도?

-더러운 손으로 그것을 건드리지 마라!

“?”

‘?’

그 순간, 독괴와 진천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울려퍼진 목소리는 독괴의 마음의 소리가 아니었다.

이곳에 그 외에 또 다른 자가 있었다.

“넌 누구냐?”

“알 필요 없다!”

복면인이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상당한 경신술.

허나 그의 손에 어떤 병기도 들려있지 않았다.

-권사인가?

느닷없는 습격에, 독괴도 즉시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그 직후 코끝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익숙한 감각에, 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독?’

세상에 자신을 상대로 독공을 펼치는 미친놈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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