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귀신같은 여자 (1)
(40/210)
40화 : 귀신같은 여자 (1)
(40/210)
40화 : 귀신같은 여자 (1)
2021.10.02.
“뭐?”
칼날이 주는 스산한 감각에, 진천우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래서는 안 됐다.
잘 벼려진 검은 단순히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만으로 피부를 베었다.
주륵!
붉은 선혈 한 줄기가 칼날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다시 울린 섬뜩한 목소리.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대는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
진천우는 또 베일지 몰라 입을 꾹 닫았다.
대신 아주 조심스럽게 눈알을 뒤로 굴렸다.
“눈알도 굴리지 마라!”
놀랍게도 상대는 이를 알아차리고 곧바로 검을 틀었다.
다행히 검을 튼 이유는 그의 목을 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날에 반사된 빛이 시야를 가렸다.
순간적으로 이런 판단을 내린 것만 봐도, 그녀는 보통이 아니었다.
“쯧! 뭘 그렇게 겁을 주고 그러느냐.”
그 순간,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두 번째 여인이 진천우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백옥처럼 새하얀 나신, 흑단보다 검은 머리칼.
그러나 진천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욕구는커녕 소름부터 돋았다.
분명 저 여인은 지금 물속을 거닐고 있는데, 그 주변으로 물살이 일지 않았다.
가는 파문조차 없었다.
‘귀신인가?’
“어딜 쳐다보느냐! 당장 고개 숙이지 못해!”
그때, 검을 겨눈 여자가 그의 뒤통수를 잡고 물속으로 찍어 눌렀다.
“쿨럭!”
덕분에 또 물을 먹었다.
다행히 그녀는 물고문할 생각은 없었는지, 고개를 완전히 직각으로 숙인 걸 보고 손을 거뒀다.
대신 다시 검이 목에 겨눠졌다.
몸부림치다 알아챈 게 있었다.
지금 자신의 뒤에 선 여자의 팔에서 소매가 스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야행복처럼 몸에 달라붙는 특수한 복장을 한 게 아니라면, 지금 그녀는 아마도…….
그제야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었다.
‘둘이 멱을 감던 중에 내가 하늘에서 떨어진 건가?’
그러니 다짜고짜 목에 검을 겨누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게다가 하필 그녀들은 무림인이었다.
‘미치겠군.’
진천우는 무림인의 과격함을 벌써 몇 번이나 경험했다.
자칫 오해가 붉어지면 속절없이 목이 날아간다.
“이랑, 그렇게 겁을 주면 저놈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
그때 다시 앞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조금 전 귀신같은 움직임을 보인 여인이었다.
찰랑!
물소리로 짐작건대, 그녀는 물가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주(小主)! 어서 몸에 뭐라고 걸치세요!”
“왜? 저놈이 볼까 봐? 보면 좀 어때? 누가 본다고 닿는 것도 아니고.”
“소주의 격이 닳습니다! 네놈, 만일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보이면 그 즉시 눈깔을 파버리겠다!”
검을 겨눈 여인이 자신을 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떠날 때는 물살이 일렁였다.
하지만 이 또한 옆에 사람이 지나갔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미미한 파문.
‘저 여인도 대단한 고수다.’
삼류나 이류는 절대 아니다.
그럼 일류?
어쩌면 벽을 넘었을지도.
‘잠깐……. 그녀가 벽을 넘겼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다른 여인은?!’
슥! 스르륵!
머리맡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둘은 따로 수풀 뒤에 숨거나 하지 않고, 코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렇지만 진천우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다.
아까부터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여기서 정말 허튼수작을 부리면 상대에게 칼침을 맞을 게 분명했다.
“됐다.”
잠시 뒤, 고개를 들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다가 곧바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 번 더 고개를 들었지만 저도 모르게 또 고개를 숙였다.
두 여인 다 보통 미모가 아니었다.
달과 꽃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폐월수화(閉月羞花).
물고기가 헤엄치는 법을, 새가 나는 법을 잊게 한다는 침어낙안(浸魚落雁)이 여기 있었다.
그러나 진천우는 달과 꽃이 아니니 부끄러울 이유가 없고, 물고기와 새가 아니기에 무엇도 잊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한 이유는 비단 상대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저게 정녕 사람의 눈인가?’
칼을 든 채 서 있는 백의 여인과 물가에 한쪽 발을 담근 채 앉아있는 흑의 여인.
그중 흑의 여인과 시선을 맞추자 절로 오금이 서렸다.
딱히 그녀가 살기를 내비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선을 마주했을 뿐인데도 물에 빠졌다는 착각이 들 만큼, 여인의 눈동자는 깊고 투명했다.
‘진짜 귀신인가?’
“왜 자꾸 고개를 숙이지?”
“네놈! 소주께서 고개를 들라고 하지 않느냐!”
백의 여인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역시 깊다.
흑의 여인과 계속 눈을 마주하면 그대로 가슴이 뚫릴 것 같자, 진천우는 일부러 시선을 애매하게 옆으로 피했다.
두 여인도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짐작했는지, 시선을 피한 걸 굳이 탓하지 않았다.
잠시 뒤, 흑의 여인이 입을 뗐다.
넌 누구냐? 목적이 뭐지? 이곳에는 어떻게 들어왔냐?
따위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꽤 흥미롭게 무공을 익혔구나. 심법만 익힌 건가? 아니, 그렇다기에는 조금 애매한데?”
“저놈이 무공을 익혔습니까?!”
흑의 여인의 말에 백의 여인이 두 눈을 치켜떴다.
물론 진천우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내 상태를 단번에 알아챈 거지?’
현재 그는 무림인과 범인의 경계에 걸쳐있었다.
제대로 된 무공은 하나도 모르지만, 요상절초 십팔수와 역근경 그리고 화후기식법을 익혔다.
그런데 이 셋은 무공으로 분류하기 대단히 애매했다.
가지고 있는 내공조차 한 줌에 불과해, 태양혈이 두드러진다거나 하는 무림인의 특성도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딱히 심법을 익힌 것도 아닌데, 미약하지만 내공이 있군. 몸도 이상하게 튼튼한 부분과 말도 안 되게 약한 부분이……. 옛 도사들이나 한다는 양생법을 익힌 거냐?”
놀랍게도 그녀는 진천우의 상태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러자 진천우는 놀람을 넘어 경악했다.
[외부에서 당신을 탐지하려는 시도를 발견했습니다.]
[스킬 ‘은폐’가 실패합니다.]
맹의 백풍대주가 직접 완맥을 잡았을 때도 효과를 보였던 은폐 스킬이, 그녀가 가볍게 훑어본 것만으로 깨졌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그런데!”
슥!
흑의 여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가 일어서니, 절로 시선도 위에서 내려다보게 되었다.
단지 그것만 바꿨을 뿐인데.
섬뜩!
“?!”
느닷없이 가슴이 조였다.
급히 고개를 들자, 자신이 지금껏 본 사람 중 가장 거만하고 장난스러운 눈길이 쏟아졌다.
여인은 그렇게 한참을 진천우를 바라보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교(敎)에서 나왔느냐?”
‘교?’
뜬금없이 교가 왜 나오지?
진천우가 뭐가 입을 떼야 할지 망설이는데, 곧바로 다음 질문이 떨어졌다.
“아니면, 날 죽이러 천마(天魔)가 보냈느냐?”
여기서 천마까지?!
스릉!
그 순간, 백의 여인이 검을 뽑았다.
* * *
“어허!”
백의 여인이 검을 뽑기 직전, 흑의 여인의 손이 그녀의 검 자루 위에 올려졌다.
백의 여인은 제 주인의 손을 뿌리치며 검을 뽑을 수 없었다.
“소주! 교에서 보낸 암살자를 살려둘 셈입니까?”
“방금 그건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고. 아직 저놈은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슥!
두 여인이 시선이 다시 진천우에게 향했다.
“……아, 아닙니다!”
그는 너무 황당한 질문에 잠시 정신을 놓다가, 뒤늦게 이를 부정했다.
“그렇다는군.”
“하지만 여전히 저자는 의심스럽습니다. 굳이 화근을 남길 필요는…….”
“이랑.”
“죄송합니다!”
이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백의 여인은 주저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한마디.
흑의 여인에게는 단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정리하는 뭔가가 있었다.
오만한 태도? 날카로운 기세? 여유로운 어투?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게 있었다.
그러나 흑의 여인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모두를 사용하지 않을 때 가장 두드려졌다.
그녀가 입을 닫고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뭐라 말하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가 주위에 풍겼다.
이를 눈치챈 이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고양되며, 무조건 그녀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교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그리고 천마가 보낸 암살자도 아니다.”
이때, 흑의 여인이 다시 진천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넌 여기에 뭣 때문에 왔지? 이번에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네 목을 치겠다.”
지금까지의 문답으로 진천우는 상대가 어떤 성격인지 파악했다.
우선 그녀는 절대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어설프게 대답하면 정말로 목을 칠 게 분명했다.
당장 그녀 뒤에 선 백의 여인이 다시 검에 손을 올렸다.
“잠시…….”
그렇기에 그는 바로 손을 들어, 흑의 여인에게 생각할 시간을 요구했다.
대답이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건, 일단 무슨 답을 할지 들어주겠다는 뜻이다.
‘그럼 다소 시간 끄는 건 용납하겠지?’
“호?”
예상대로 그녀는 진천우의 요구에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거라.”
시간을 벌었다.
바로 현판을 확인했다.
가장 최근에 적힌 이상한 내용은 일단 무시하고, 그 직전의 글부터 확인했다.
[도원경은 일 년 내내 강한 결계 속에 숨겨져 있는, 천하에 몇 없는 특별한 금지(禁地)입니다.]
[금지를 벗어나는 방법은 극히 한정돼 있습니다.]
‘청룡기와 백호기!’
이 둘을 사용하는 게 한정된 방법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급히 주위를 살피니, 다행히 물 위에 떠다니는 천을 찾았다.
하지만 진천우는 깃발을 회수하고, 문제를 발견했다.
두 깃발의 색이 심하게 바래 있었다.
마치 맨 처음 독괴의 시신을 감싸던 때의 푸른 천을 본 것처럼.
[현재 두 깃발은 도원경의 결계를 비트느라 가지고 있는 모든 기운을 사용했습니다.]
[이 둘이 다시 힘을 되찾으려면 열흘가량 걸립니다.]
‘너무 늦어.’
열흘이면 현석에게 맡긴 해독약으로 버티기 아슬아슬했다.
더 큰 문제는 녀석과 함께 삼살이견이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없으면 그 둘의 호감도는 급속히 떨어질 터.
‘아무리 독고가 함께 있고, 가장 최근의 현판에서 녀석이 조련사가 되었다고 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조건 열흘보다 일찍 돌아가야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끼기긱!!
그 순간 두 여인의 뒤편, 울창한 수풀 너머로 웬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또 시작이군요.”
그녀들은 그것을 듣고 얕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조금 전의 짐승 소리가 뭔가를 알리는 신호인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진천우 또한 그 소리에 반응했다.
‘이 소리는?’
기억난다.
자신은 분명 저 소리를 내는 짐승을 안다.
그리고 그의 기억에서.
‘불 원숭이 또한 깃발을 다뤘다.’
게다가 녀석은 다른 두 개의 깃발을 더 가지고 있었다!
“대답하겠나?”
그때 흑의 여인이 다시 물었다.
분명 시간을 줬으니, 당장 답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진천우는 저들 또한 짐승의 소리에 반응한 걸 기억했다.
저 둘이 얼마나 아는지 몰라도, 적어도 자신이 앞으로 할 일을 완전히 숨길 수 없다면.
“네, 전 화후를 잡으러 왔습니다.”
그는 제 목적을 솔직히 밝혔다.
씨익!
이를 들은 흑의 여인이 그 즉시 입꼬리를 비틀었다.
“재밌네.”
그리고 그녀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우리도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머리맡에 ‘!’ 모양이 뜨는 것과 동시에 푸른 현판에 새 글이 갱신했다.
[정체불명의 두 여인이 화후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들보다 먼저 화후를 획득하세요.]
[특수 이벤트 ‘경쟁전’이 발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