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집사의 하루
(43/210)
43화 : 집사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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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 집사의 하루
2021.10.09.
푸른 현판이 언제나 예고 없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뜻밖의 등장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타이쿤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진천우는 흑의 여인이 자신이 가져온 걸 마음에 들어 할 거라 확신했다.
당연히 일시적 주종관계도 수락될 거다.
그래서 그는 타이쿤 등장보다 거기 적힌 내용에 더 주목했다.
‘퀸?’
여왕(女王)이란 뜻.
‘설마 황족이었나?’
강한 호기심이 들었지만, 머릿속에만 생각해야 할 걸 함부로 입 밖에 내뱉지 않았다.
‘확실히 황족을 뵌 적은 없지만, 하늘 위의 존재가 있다면 그녀처럼 오만하고, 강하며, 또 독특하지 않을까 싶긴 하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니, 아닙니다!”
멍청하게 입만 조심하면 뭐 하는가.
눈동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는데!
등 뒤에서 백의 여인의 매서운 시선이 느껴졌다.
진천우는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소매 안의 물건을 꺼냈다.
흑의 여인이 한참 기다린 끝에 그것을 보았다.
“이건…… 물고기구나.”
“네, 방금 막 구운 청린어 구이입니다.”
“먹어보란 거냐?”
“네.”
“알겠다.”
좀 더 자세히 물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 백의 여인이 끼어들었다.
“잠깐, 독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차!
상대가 정말 황족이라면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생각이 짧았다.
“제가 먼저 먹어 독이 없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진천우가 물고기 뱃살 부위를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그러나 백의 여인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저도 따로 확인하겠습니다.”
“그러거라.”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생선의 꼬리와 머리를 부분부분 작게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곤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
백의 여인은 두 눈을 크게 치켜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독에 중독돼 저러는 게 아니었다.
“쯧, 이제 내놔봐라.”
한참을 기다린 흑의 여인이 마침내 호기심을 못 참고, 백의 여인에게서 생선을 뺏었다.
그녀는 옆에 든 젓가락도 들지 않고, 호쾌하게 입으로 청린어 구이를 뜯었다.
“하!”
흑의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번에는 생선 대가리부터 덥석덥석 물었다.
으직으직!
뼈 소리를 내며 씹는 게 산적 저리 가라였지만, 이상하게 그녀가 하니 전혀 상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한참 뒤, 흑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소금을 가지고 있었군.”
그랬다.
진천우가 가지고 온 청린어 구이에는 간이 돼 있었다.
반대로, 전날 그녀가 준 건 아주 싱거웠다.
일부러 그렇게 조리한 게 아니라면, 그녀들은 그동안 소금 없이 물고기를 구워 먹었을 터.
단순히 소금을 쳤느냐 안 쳤느냐에 따라 음식의 맛은 천차만별로 바뀌었다.
심지어 그간 간이 되지 않은 요리만 먹다가 짭짤한 음식을 먹으면, 눈이 튀어나오도록 맛있게 느껴질 게 분명했다.
“마침 따로 암염 덩어리를 챙기고 있었기에…….”
딱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 이상은 밝힐 수 없었는데, 자신이 휴대한 암염의 본래 용도는 독 제조용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독을 만들 때 소금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소금이 끝이 아니야. 육질도 부드러워졌어.”
흑의 여인의 말대로, 진천우는 요리에 간을 맞춘 것 외에도 여러 수작을 벌였다.
그의 청린어 구이는 과일처럼 아삭이지 않았다.
육질이 훨씬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살코기를 빠르게 분해하는 약초와 잡내를 잡는 향초를 추가한 덕분이었다.
“근처에 쓸 만한 약초들이 자라고 있기에, 물고기를 싸서 함께 구웠습니다.”
“의술도 익혔느냐?”
“맞습니다.”
소금과 의술.
둘 다 사람을 살리는 물건과 기술.
흑의 여인은 그제야, 진천우가 자신 있게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특히 여기 있는 동안만 모시겠다고 말한 것도 마음에 드는군.’
그녀는 따로 사정이 있어, 백의 여인 외 추가로 종복을 거둘 수 없었다.
그걸 이놈도 눈치챈 걸까?
‘아니면, 단순히 날 평생 모실 생각은 없는 걸 수도 있지.’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스륵.
흑의 여인이 진천우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수만 송이 꽃이 한꺼번에 만개(滿開)하듯, 화려하기 그지없는 미소.
“좋다. 받아주마.”
그녀의 허락이 떨어진 순간!
[여왕의 허락과 함께 ‘퀸 메이커’가 시작합니다.]
[당신의 최초 직업은 ‘집사’입니다.]
* * *
백의 여인, 이랑은 처음부터 진천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주도 너무 긴장감이 없어. 저런 신분도 모르는 놈을 어찌 믿고 근처에 놔두는지!’
신분을 모른다.
이건 제 주인의 신분과 상황을 고려할 때 최우선사항이었다.
그러니 느닷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정체불명의 사내는 절대 그녀의 마음에 들 수 없었다.
‘거기다 뭐? 막 들어온 주제에, 앞으로 자신이 가사를 전부 도맡아 하겠다고?’
솔직히 이건 두 손 들고 환호할 일이었다.
이랑은 본디 시녀가 아니었다.
당장 그녀의 무공 수준은 상당했다.
당연히 시녀보단 호위 역이 제격이지만, 어쩌다 보니 이곳 금지에 둘만 남게 돼 자연스럽게 시녀 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랑은 비록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시녀 일을 맡았어도, 불평 없이 전심전력으로 임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느냐?”
그때, 흑의 여인이 자신을 불렀다.
실수다.
주인을 뒤따르면서 딴생각하다니!
“죄, 죄송합니다.”
“뭘 그렇게 사과할 것까지야. 너도 많이 나아지고 있으니, 조만간 함께 화후의 가죽을 벗길 수 있을 거다.”
아무래도 주인은 자신이 오늘 거의 다 잡은 불 원숭이를 놓친 거로 침울해한다고 여긴 모양.
역정을 내도 할 말이 없거늘 되레 위로를 받자, 죄송함이 더욱 커졌다,
그러는 사이 둘은 어느새 거처에 도착했다.
안에 인기척은 있었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첫날부터 일은 않고 놀고 있나?’
쾅!
“네 이놈!”
이랑이 바로 문을 박찼다.
“보십시오! 이래서 신분도 모르는 놈은…….”
그녀는 주인께 저놈의 실태를 밝혀 당장 내쫓으려 했다.
헌데.
반짝반짝!
왜 문을 여니 눈이 부시는 걸까?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움집 중앙에 처음 보는 등불이 보였다.
등불은 이전에 썼던 호롱불보다 배 이상 밝았다.
“네가 만들었느냐?”
“예, 근처에 굴러다니는 광물과 약초를 섞어 만들었습니다.”
“손재주가 좋구나.”
“감사합니다.”
흑의 여인이 칭찬하자 이랑의 표정이 썩어 문드러졌다.
그녀는 어떻게든 진천우의 허점을 찾으려 했다.
‘무슨 사내놈이 이렇게 깔끔히 청소했담! 아냐, 그래도 저 안쪽까지는…….’
이랑이 구석 바닥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젠장, 손끝이 깨끗했다.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이 청소했을 줄이야.
‘원래 뭐 하는 놈이지? 어디 커다란 가문에서 십수 년 구른 하인이었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나름 귀티 나는 외모에 한눈에도 허약해 보여서, 어디 병약 문사나 평범한 중소방파의 약골 도련님으로 봤는데.’
그녀의 추측은 정확했다.
다만, 아쉽게도 백의 여인은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청소는 제법 잘한 것 같군. 아무튼, 소주께서는 조금 전까지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시장하시다. 얼른 요리를 내놓거라.”
“예, 이쪽에 준비해두었습니다.”
“흥!”
이랑은 시종일관 정중한 진천우의 태도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주인은 모든 게 너무 흥미 위주로 돌아갔다.
그러니 자신이라도 주위의 모든 걸 경계하고 의심해야 했다.
“당연히 소주께서 드시기 전에 내가 따로 기미할 거다. 혹시라도 음식에 독이 섞여 있다면 그 즉시 네놈의 목을 베겠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독괴의 전진을 이은 진천우는 어엿한 독인이었다.
스스로 의도하지 않는 한, 행여나 실수라도 음식에 독을 섞는 실수는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금지 내에서 차릴 수 있는 음식은 청린어 구이이거나 가끔 소주가 잡아 오는 새 구이가 전부겠지.’
이랑은 큰 기대 없이 음식상 쪽으로 걸어갔는데…….
“어?”
상 위에 싱그러운 기운이 넘치는 게 아닌가?
“약초를 무쳐봤습니다.”
“약초? 이 샛노란 건 아무리 봐도…….”
“민들레 꽃잎에는 가벼운 해독 효과가 있습니다. 또 민들레는 꽃 말고도 줄기, 뿌리, 씨앗까지 모두 먹을 수 있습니다.”
약초와 꽃 무침이 끝이 아니었다.
청린어는 굽지 않고 쪄서 나왔다.
고기 위에 향기로운 향신료가 듬뿍 올려졌다.
“아무래도 지금껏 구워서만 드셨으니, 다른 방식으로 조리해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준비했습니다.”
달칵!
세상에 차(茶)까지!
금지 안에서는 상상도 못 할 기호품.
참고로 차는 흑의 여인보다 백의 여인이 껌뻑 죽었다.
흑의 여인의 취향은 차보다는 술이다.
“며칠만 기다려주십시오.”
며칠?
설마!?
“운 좋게 벌집을 발견했습니다.”
봉밀주는 꿀에 물을 섞어 발효해서 만들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술 중 하나였다.
“이런 기특한 놈을 봤나!”
흑의 여인이 정말 기뻤는지, 그 자리에서 진천우를 안아주었다.
순간 아찔한 꽃 내음이 코를 찔렀지만 곧바로 사라졌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차려둔 음식을 해치웠다.
본래라면 조금 전 광경을 보고 대경실색해야 할 백의 여인도 차 맛에 취해 미처 보지 못했다.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이라!
사기(史記)의 구절로, 사람에게 먹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뜻이다.
‘제길!’
“차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진천우가 바로 잔에 뜨거운 차를 따랐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흥!”
이랑은 일부러 크게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양손은 뜨거운 찻잔을 강하게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귀까지 빨개진 것도 모르고 낮게 중얼거렸다.
“제, 제법이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놈은 진짜 난놈이라고!
* * *
집사가 되고 사흘이 지났다.
“후우!”
진천우가 샘에서 양다리를 꺼냈다.
이제 사지 중 둘을 동시에 담글 수 있게 됐다.
덕분에 몸도 아주 튼튼해졌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이 속도라면, 몸 전부를 담그는 데 며칠이나 더 필요했다.
그의 목적은 샘에 온몸을 담그는 게 아니었다.
‘화후를 잡아야 한다.’
사실 그것도 끝이 아니다.
‘금지를 빠져나가야 한다.’
진천우의 최종 목적.
이 때문에 그는 흑의 여인의 종복을 자청했다.
그녀의 손길은 이미 화후의 꼬리 끝에 닿았다.
경쟁전?
중요하지 않았다.
화후의 내단?
역시 필요 없었다.
진천우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화후가 가진 붉고 누런 천뿐.
‘설마 그녀들의 목적이 그 천은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고 해도, 종복이 되어 신뢰를 얻으면 함께 금지를 나갈 수 있었다.
금지만 나가면 천은 굳이 필요 없었다.
이를 위해, 그는 지난 사흘간 누구보다 충실히 흑의 여인을 모셨다.
‘전부 퀸 메이커의 효과 덕분이지.’
[퀸 메이커는 철저하게 여왕을 수행해 그녀의 신뢰를 얻는 걸 목표로 합니다.]
[퀸 메이커는 이에 필요한 가능한 모든 걸 지원해 줍니다.]
진천우는 타이쿤 지원으로 ‘요리’와 ‘제작’, ‘청소’ 등 가사 전반에 필요한 스킬을 습득했다.
이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새로 익힌 스킬 중 요리와 제작을 조금만 응용하면, 독과 약 제조에 활용할 수 있다.’
우수한 독인은 누구보다 손재주가 뛰어나야 했다.
그것들 모두에 호응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게다가 가사 일을 하면서, 어머님과 현석 그리고 다른 진씨세가의 식솔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느낄 수 있어 더욱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슬슬 둘이 돌아올 무렵이군.”
진천우가 식사 준비를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제 대충 몸이 만들어졌군.”
“?!”
등 뒤에 흑의 여인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을까?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지만,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영문을 모를 말에 그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무엇을 시작하겠다는 건지?”
“너!”
흑의 여인이 진천우를 처음 만났을 때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그리 말했다.
“지금부터 무공을 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