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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 화후 사냥 (2) (47/210)


47화 : 화후 사냥 (2)
2021.10.18.


“화후의 숨결? 억!”

화륵!

느닷없이 속이 부글부글 끓더니 입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아니, 나오려던 걸 간신히 손으로 막고 도로 삼켰다.

‘진짜 불이잖아?’

무슨 원리인지, 뜨겁지 않았다.

다 삼키지 못하고 튄 불똥 하나가 가까이 있는 나무 겉면을 검게 그을렸다.

이건 진짜였다.

‘그럼 난 이제 입으로 불을 뿜을 수 있는 건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삼매진화(三昧眞火)라고, 벽을 넘은 무인 중 일부가 진기를 사용해 손에 쥔 서신 따위를 태운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입에서 불을 토해내는 일화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거 남에게 보여주면 영락없이 사술이란 소리를 듣겠군.’

무림인들은 제 이해 범주를 넘기면 모조리 사술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때 잘못 덤터기 쓴 이들의 말년은 언제나 좋지 못하게 끝났다.

이를 떠올리며, 진천우는 가급적 화후의 숨결은 정말 필요할 때만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끼기긱!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입에서 불을 내뿜는 것 따위가 아니라, 저 불 원숭이를 붙잡는 거다.’

“먼저 가마.”

그때 흑의 여인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가공할 정도로 표홀한 신법.

저도 모르게 눈이 그녀를 쫓아가는 그런 신법이었다.

“소주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백의 여인이 낮게 경고했다.

그 뒤, 그녀도 제 주인 뒤를 쫓았다.

흑의 여인의 것과는 달랐지만, 놀랍도록 조용하고 빠른 신법이었다.

“흥!”

떠나면서 백의 여인이 지은 비웃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럴 만도 했다.

당장 자신이 익힌 진퇴보로는 저 둘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두 여인이 진천우의 보조를 맞추다간 눈앞의 화후를 놓칠 게 자명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숨겨진 한 수가 있었다.

“스읍!”

진천우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불 원숭이가 토해내는 호흡을 따라 하자 금세 감각과 기감이 활성화되었다.

이 주위는 정말 거센 기운들이 사방에 요동쳤다.

그 기운에 제 몸을 온전히 맡겼다.

그러자 몸이 한줄기 화살이 되어 쏘아졌다.

쉬익!

쭉 뻗은 화살대가 여러 기운의 소용돌이를 거쳐 낭창낭창 휘어졌다.

“아니?!”

귓가에 백의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그는 그녀의 턱 밑까지 쫓아왔다.

“……!”

어느새 제 옆에 바짝 붙은 진천우를 보고, 백의 여인은 묘한 눈빛을 지었다.

이놈은 뭔데 매번 자신을 놀라게 하는 걸까?

그때마다 백의 여인의 가슴 속에 묘한 파문이 일었다.

한두 번이면 무시했을 텐데, 언제부터 그것은 물살이 되고 격랑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마 백의 여인이 조금이라도 악독한 마음을 품었다면 진천우를 가만두지 않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속으로 그를 인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끽!

휙!

그때, 갑자기 앞서 달리던 화후가 방향을 꺾었다.

흑의 여인과 백의 여인도 따라 방향을 꺾었다.

하지만 진천우는 그러지 못했다.

그가 몸을 맡긴 기의 흐름은 옆으로 꺾이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나마 다른 신법이 있으면 억지로 방향을 틀겠지만, 진퇴보는 꺾는 걸음이 아예 없다.

어쩔 수 없이 크게 돌아서 가려고 했는데.

“엇?!”

앞서 불 원숭이와 두 여인이 방향을 꺾은 지점 너머로 땅이 아래로 움푹 꺼져있었다.

대충 삼 장 높이의 벼랑.

이대로 떨어지면, 죽지는 않겠지만 무사할 수 없었다.

“이런!”

뒤늦게 이를 눈치챈 백의 여인이 급히 손을 뻗었다.

왜 저기서 혼자 앞으로 달려간 거냐!

그녀의 손에서 질책과 걱정이 느껴졌다.

진천우가 서둘러 마주 손을 뻗었지만, 아쉽게도 손 하나만큼 모자랐다.

둘의 손이 허공을 훑고 멀어졌다.

‘떨어진…….’

휙!

그 순간, 팔이 붕 뜨더니 강제로 오른쪽으로 끌려갔다.

덕분에 무사히 방향을 틀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

놀랄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체 모를 힘이 아예 그의 몸을 들어 올렸다.

진천우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흑의 여인의 옆구리에 바짝 붙잡혀 있었다.

“아직 많이 멀었구나.”

“당신이 절 구한 겁니까?”

들어본 적 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고강한 내공을 쌓은 고수가 기(氣)로 멀리 떨어진 사물을 움직이는 기예.

허나 흑의 여인은 진천우의 대답에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딱!

대신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의 뒤통수를 갈겼다.

손끝으로 튕겼을 뿐인데 골 전체가 울릴 정도의 충격.

“금지의 중심에서는 제대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눈 깜짝할 새 죽는다.”

“금지의 중심?”

“그래, 이곳은 특히 땅이 거칠고 험하지. 방금처럼 지형의 단차 때문에 뜬금없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절벽은 예사이고, 느닷없이 기의 흐름이 뒤틀려 신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

그렇기에 화후를 계속 쫓다 보면 항상 여기로 향했다.

아무리 뛰어난 신법이라 해도 사람이 만든 거라 일정한 규칙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금지 중심은 말도 안 되는 괴이한 환경 탓에 그 규칙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오직 짐승의 기민한 움직임만이 그것에서 자유로웠다.

녀석이 지금껏 무사한 것도 그 점을 십분 활용한 덕분이다.

게다가 놈은 그것 외에도 또 하나의 비장의 수를 지니고 있었다.

“앞을 똑바로 봐라.”

“네?”

그녀의 말대로 고개를 들었다.

한참 달아나는 화후의 뒷모습.

그런데 녀석의 움직임이 어쩐지 낯익다.

“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하긴, 화후기식법은 애초에 독괴가 놈의 호흡을 본떠 만든 무공.’

즉, 진천우가 불 원숭이의 호흡으로 기의 바다를 주파할 수 있듯, 화후 역시 그것이 가능했다.

아니, 녀석은 진천우보다 훨씬 유려한 몸놀림으로 기의 틈새를 빠져나갔다.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 건가?’

그 모습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 큰 공부가 되었다.

확실히 짐승의 움직임 외에 기의 틈새를 찌르는 신비한 이동술까지 있으면, 그간 그녀들이 번번이 화후를 놓친 것도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흑의 여인이 똑바로 보라고 한 건 저 움직임이 아니었다.

녀석이 달려가는 방향 앞에 또다시 벼랑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기의 흐름은 벼랑을 향해 쭉 이어져 있었다.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치지 않으려면, 당장 기의 흐름에서 빠져나와 방향을 틀어야 한다.’

진천우는 당연히 불 원숭이가 제 예상대로 움직일 줄 알았다.

화륵!

그런데 놈은 예상을 깨고 입에서 불을 토했다.

그러자 눈이 번쩍할 일이 벌어졌다.

화후가 토하는 불은 보통 불이 아니라, 영물의 기운이 잔뜩 머금은 불.

즉, 농후한 기운 덩어리였다.

그것이 기의 흐름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스륵!

불 원숭이가 바뀐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벼랑 직전에서 방향을 틀었다.

쿵!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

그건 그야말로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화후의 숨결’의 응용법을 직접 두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불완전한 화후기식법의 남은 조각 중 하나를 획득했습니다. (2 / 3)]

“보았느냐?”

흑의 여인이 상념을 깨웠다.

“네, 보았습니다.”

“그럼 되었다.”

그녀는 진천우를 작은 소동물 버리듯 수풀에 휙 하고 던졌다.

그대로 흑의 여인은 엄청난 속도로 화후를 쫓았고, 백의 여인이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

홀로 남겨진 진천우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지켜보다가.

“스으읍!”

곧바로 숨을 길게 들이켰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감각이 활성화되었다.

그 직후, 그의 몸은 눈 깜짝할 새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시금 기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아니, 이제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나도 화후처럼 흐름을 조율해야 한다.’

나아가고자 하는 쪽으로 흐름이 이어져 있길 바라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흐름이 이어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불 원숭이의 말도 안 되는 이동법의 비결이었다.

‘이걸 깨달았으니, 이제 놓치지 않는다!’

진천우가 서둘러 이차 추격전에 돌입했다.

* * *

끼기긱!

화후는 소름 끼치게 빨랐다.

녀석은 금지 안의 숲이 제 몸의 일부인 양, 그 속에 녹아들고 튀어나오기를 반복했다.

화륵! 화르륵!

거기다 중간중간, 입에서 불을 토해 추격해오는 인간들의 발걸음을 늦췄다.

하지만 셋 다 만만치 않았다.

특히 놀라운 건 가장 뒤에서 쫓아오는 인간 수컷이었다.

끼긱?

불 원숭이는 그를 볼 때마다 기분 아주 나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 수컷이 보이는 움직임은 아무리 봐도 자신의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원숭이의 움직임을 할 수 있는 거지?

저놈은 도대체 정체가 뭐길래?

“날 두고 어딜 한눈을 팔아?”

우끽?!

일 났다.

아무리 놀랐다지만, 어떻게 가장 위험한 인간 암컷을 잊었을까!

암컷의 희고 긴 섬섬옥수가 자신을 향해 뻗어왔다.

이걸 피할 방법은 하나뿐.

화르륵!

화후가 또 한 번 금빛 불꽃을 토했다.

덕분에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녀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걸 하루에 두 번이나 사용하다니.

이제 다음은 없다.

끼이익!

녀석이 거칠게 이를 갈며 앞으로 내달렸다.

이제 지형뿐 아니라 경사도 심해졌다.

하지만 추적은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쫓은 끝에 짐승 한 마리와 세 인간은 다 함께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섰다.

간신히 목표까지 도달했다.

맨 먼저 절벽 위에 선 원숭이가 인간들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보였다.

‘뭐지?’

화후, 흑의 여인에 이어 세 번째로 절벽에 올라온 진천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금지는 녀석의 영역.

그렇담 이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걸 놈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여기로 올라왔다?

‘그리고 어째서 퇴로가 막힌 상황에 저런 웃음을 짓는 거지?’

고개를 돌리는 다른 두 여인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쳇!”

흑의 여인이 혀를 찼다.

진천우가 영문을 몰라 이유를 물으려는데, 그녀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걸 봐라.”

스륵!

“아니?”

화후의 하반신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녀석은 상반신만 공중에 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 절벽이 바로 금지의 중심이다. 여기선 사방에 저것 같은 신기루가 펼쳐지지.”

“신기루?”

“그래, 눈앞에 보이는 건 전부 신기루다.”

휙!

흑의 여인이 가볍게 소매를 흔들자 무형의 기파가 쏘아졌다.

칼날처럼 사나운 기세였지만 상반신만 남은 화후를 베지 못했다.

신기루.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건 환상이고, 진짜 놈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확실히 화후기식법을 사용하자 사방에 갖가지 기운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이런 곳이라면, 저런 말도 안 되는 신기루가 나타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눈앞의 썩을 환상이 자신들을 향해 여봐란듯이 무인들끼리 은어로 쓰는 주먹 욕을 날렸다.

“저 빌어먹을 놈이 전에도 그러더니!!”

백의 여인이 분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만큼 방금 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망측한 욕이었다.

그 사이, 불 원숭이는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물러난다.”

신기루마저 사라지자 흑의 여인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이곳은 무인도 오래 견디지 못하는 장소다. 즉시 내려간다.”

그녀의 말처럼, 이처럼 괴이한 장소는 인간이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잠시…….”

진천우가 흑의 여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짓이냐!”

기껏 그를 좋게 보기 시작한 백의 여인도 소주의 말을 따르지 않는 진천우에게 크게 역정을 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양,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계속 걸어갔다.

‘분명 신기루가 다 사라지기 전에 놈의 허리춤에서 잠시 금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진천우는 그것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마침 그의 양손에 그것과 매우 유사한 효과를 내는 푸른 천과 흰 천을 들려있었다.

비록 두 천은 아직 반밖에 복구되지 않았지만.

‘금지 중심의 기운을 조금만 밀어내는 것 정도는 이걸로 충분하다.’

우우웅!

과연 예상대로.

사방에 요동치던 기운이 청기와 백기의 인도에 따라 조금씩 옆으로 흩어졌다.

“이게 대체?!”

“하하하!”

두 여인도 기현상에 크게 놀라며 눈을 치켜떴다.

허나 아직 놀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청기 백기 다 내려, 그 상태로 청기 백기 다 올려!

진천우가 양손이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가 그대로 위로 솟구쳤다.

그 순간!

쩍!!

공간이 갈렸다.

우킥?!!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던 불 원숭이가 튀어나왔다.

“잡았다. 요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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