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마지막 수단
(50/210)
50화 : 마지막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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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 마지막 수단
2021.10.25.
정신을 잃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진천우가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낯선 광경.
‘당신이 왜?’
한평생 제 뜻대로 해보지 못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을 것 같은 여인이 지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을 차렸군.”
‘무……!’
이게 다 무슨 일이냐?
분명 그리 물으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뿐만 아니라 온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우웅!
간신히 눈알을 굴려 몸을 살피니, 흑의 여인이 한 손은 단전에, 다른 손은 이마에 대고 끝없이 내공을 불어넣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올리고 있다!
“쿡! 다른 건 다 제쳐두고 그런 걸 가지고 놀라느냐?”
흑의 여인은 눈빛만으로 진천우의 생각을 읽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우웅!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내력 운용을 멈추지 않았다.
경악스러운 능력!
허나 흑의 여인은 아직 본 실력의 절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좋을 때 정신을 차렸군. 지금부터 무공 구결을 알려줄 테니 그대로 따라 해라. 부족한 내력은 내가 받쳐줄 테니, 넌 구결대로 운기하기만 하면 된다.”
내력 운공 중에 무공을 전수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와 달리 장난기를 찾을 수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저 얼굴 앞에서 대꾸는 허락되지 않았다.
“하늘의 기운은 가볍고 부드러워 천변만화라, 반대로 땅의 기운은 무겁고 단단해 결코 바뀌는 법이 없다.”
첫 구결을 따라 하자 정수리와 발바닥에 미약한 기운이 모였다.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구결이 이어질수록 두 기운은 점차 크기를 불렸다.
‘이건?’
운기가 계속될수록 불안감이 커졌다.
애초에 두 개의 기운을 동시에 운공하는 무공은 손에 꼽았다.
무당의 태극신공(太極神功)과 양의신공(兩儀神功)이 그나마 비슷하겠지만, 그것들은 처음부터 두 기운을 조화시켜 호응 작용을 얻는 데 의의를 두었다.
‘절대 지금처럼 몸의 끝과 끝에 기운을 풀어 무슨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게 내버려 두는 무공 같은 건 아닐 터!’
그 말대로, 운기를 계속할수록 정수리와 발바닥에서 시작된 기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진천우가 맨 처음 익힌 금강공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금지의 특성으로 외기를 비정상적으로 받아들일 때와 비교해도 배, 아니, 배의 배 이상.
정수리의 기운은 구름 위를 흘러가는 용처럼 표홀히 아래로 내려왔고, 발바닥의 기운은 맹호같이 사납고 거칠게 몸을 타올랐다.
“구결을 의심하지 마라. 넌 그저 내가 이끄는 데로만 따라라. 장담하건대, 내가 널 신세계로 보내주마.”
“……!”
흑의 여인이 불안해하는 진천우에게 한마디 했다.
신기하게도 그녀에게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눈을 감았다.
몸속에서 활개 치는 두 짐승을 다루기 위해.
다행히 아직 운공에 서투른 진천우를 위해, 흑의 여인이 밖에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녀의 기운이 제멋대로 날뛰는 용과 범의 머리를 찍어눌렀다.
그 뒤 은근한 힘으로 둘을 특정 혈도로 유도했다.
‘대단하구나!’
진천우가 제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진정으로 감탄했다.
그는 이제야 지금껏 몰랐던 흑의 여인의 진면목을 엿보았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내공이 마르지 않는다?’
사실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다.
어쨌든 저 용과 범은 자신의 내공으로 만들어진 존재.
그런데 내 몸에 저 정도의 기운이 있었던가?
‘용은 아직 다 흡수하지 못한 대환단의 기운이다.’
그렇다면 범은?
대체 자신의 몸에 소림의 비보인 대환단에 필적할 기운이 어디 있어서…….
‘아!’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화후의 내단!’
백호기의 기운을 보충하고 남은 반쪽짜리 내단이 분명했다.
‘그럼 정말 그녀는 내단을 포기하고 내게 먹인 건가?’
세상에!
화후의 내단이 지닌 가치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만한 보물을 포기하다니.
진천우가 진실로 탄복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흑의 여인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제 제 몸도 한계에 가까웠다.
“하늘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맑아지고(天得一以淸 : 천득일이청), 땅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평온해진다(地得一以寧 : 지득일이녕).”
열 번째 구절과 함께 용과 범이 잠잠해졌다.
‘이럴 수가!’
그 사납던 두 존재가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걸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허나 그건 한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늘은 다시 둘을 얻음으로써 무너지고(天得二以崩), 땅 또한 둘을 얻고 무너질지니(地得二以崩).”
우우웅!
기껏 억눌렀던 짐승을 다시 풀어헤쳤다.
앞서 한번 억눌렀던 만큼, 고삐가 풀리자 흉포함이 배가 되었다.
“하늘이 셋을 얻으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땅이 넷을 얻으면!!”
용과 범은 몸에 있는 기운을 단 한 톨도 남기지 않고 흡수했다.
이건 위험하다.
정말 위험하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경종이 울렸다.
하지만 진천우는 그 모든 경고를 무시했다.
‘한번 믿기로 하면 끝까지 간다.’
더군다나 그에게 무조건 믿으라고 말한 이는 바로 흑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절대 허투루 그런 말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 순간 마지막 열다섯 번째 구절이 이어졌다.
“그대로 하늘과 땅을 한데 묶어라(天地合一 : 천지합일). 그것이 바로 혼원일기(魂元一氣 : 태초의 기운)이니!!”
“…….”
정말…… 정말 한순간 저 말을 따라야 하나 고민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젠장!’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진천우가 곧바로 몸 안의 성난 용과 범을 풀었다.
용은 아래로, 범은 위로, 커다란 포효를 지르며 부딪쳤다.
그 장소는 천지혈(天地血).
왼쪽 가슴에 있는…… 심장 바로 위였다.
콰르릉!
“컥!”
고고한 용이 꼬리를 휘두르자, 심장이 그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부풀어 올랐다.
“참아라!”
흑의 여인이 급히 등에 손을 대주었다.
우우웅!
그녀의 내공이 심장을 보호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심장이 곧바로 진정되는 듯했으나.
크어어!
“크윽!”
용 다음에는 범이 날뛰었다.
놈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자, 심장을 두른 내공이 종잇장처럼 찢겼다.
게다가 이번에는 진천우만 피해를 입은 게 아니었다.
주륵!
한참 내공을 주입하던 흑의 여인도 입가에 피를 흘렸다.
그녀는 외부에서 내공으로 개입한 만큼 그 피해가 훨씬 컸다.
그러나 여기서 손을 뗄 수 없었다.
‘내가 손을 떼면 이놈의 몸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폭사한다.’
마지막이다.
자신의 생의 불꽃을 태워 만든 마지막 기회.
그러니 어떤 희생을 치르든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흑의 여인은 방금 입은 내상에도 불구하고 양손을 진천우의 등에 가져다 댔다.
우우웅!
들끓던 두 짐승이 그녀의 압도적인 내공에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허나 이대로 억누르기만 해선 소용없다.
용과 범은 본래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제 이 둘을 한시바삐 천지혈로 몰아넣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이것만은 자신도 어쩌지 못한다.
오직 진천우만이 할 수 있는 일.
이때, 진천우는 눈을 감고 한없이 무언가에 몰두했다.
쿵!
심장이 뛴다.
쿵쿵!
두 괴물의 싸움으로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둥!
그런데 거기에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소리도 함께 울렸다.
둥둥! 쾅쾅! 둥둥! 쾅쾅!
제 심박과 정확히 딱 맞아떨어지는 소리의 정체는 바로 흑의 여인의 것.
‘이 또한 그녀가 의도한 걸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일까?’
뭐든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심박에 두 괴물이 반응을 보였다는 것.
진천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눈을 떴다.
우우웅!
즉시 남아있는 모든 내공을 쥐어짜 내, 용과 범을 천지혈로 밀어 넣었다.
물론 둘은 처음에는 말을 따르지 않고 반항했지만,
쿵쿵! 쾅쾅! 쿵쾅쿵쾅!
두 개의 심장이 시끄럽게 소리치자, 뭔가에 홀린 듯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콰르르!
크허엉!
놈들이 심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로 모든 게 순식간에 끝났다.
쾅!!!!
이걸 뭐라 형언할 수 있을까?
고통? 환희? 충격? 공포?
아니, 그 모든 감정이 깡그리 뭉쳐 천지혈로 흘러들어왔다.
진천우가 지극한 성취감에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어느새 나타난 현판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여왕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줍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 (레전드)’을 습득했습니다.]
“천마신공?!”
그 즉시 눈이 떠졌다.
정신을 잃을 때가 아니었다.
* * *
[천마신공(天魔神功) - (레전드)]
-천마(天魔)의 무공.
설명이 짧다.
짧아도 너무 짧았다.
혹시나 숨겨진 설명이 더 있나 현판을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어디에도 추가설명은 없었다.
다행히 흑의 여인이 천마신공에 대해 알려주었다.
“네게 알려준 무공은 천마신공이다.”
“…….”
“놀라지 않는군. 아니, 얼어붙은 건가? 아무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천마신공은 그저 말도 안 되게 강하고 순수한 기운을 다른 어떤 심법보다 빠르게 쌓는 게 전부니까,”
사실 대부분의 무공이 내공으로 좌지우지된다.
그러니 그 설명대로라면, 천마신공은 최강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걸 정말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하다니.
“남들 눈앞에서 천마신공을 운공하는 모습만 보이지 않으면, 누구도 네가 천마신공을 익혔다는 걸 알지 못할 거다. 설사 교주(敎主)라 할지라도.”
그녀는 단언했다.
그만큼 천마신공으로 쌓은 내공은 극히 순수한 자연지기에 가까웠다.
물론 다른 어떤 심법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운이라, 어쩌면 그 부분을 찔러 천마신공임을 짐작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네가 알아서 주의할 일이고…….”
흑의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그거야말로 자신이 걱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그녀는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었다.
“큭!”
주륵!
입가에 피가 흘렀다.
발작이 시작되었다.
부들부들!
오한과 함께 몸이 떨렸다.
이번 발작은 전보다 훨씬 거셌다.
천마신공을 전수하느라 상당히 무리했기에, 이걸 견디는 건 아마 힘들겠지.
“후우!”
흑의 여인이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꽈악!
눈치채 보니, 어느새 둘의 자세가 바뀌었다.
진천우가 그녀를 제 무릎에 올리고 시선을 맞춘 채, 떨리는 손을 붙잡아 주었다.
한껏 떨리는 시야는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녀석의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 일수도.
“걱정 마라. 천마신공을 알려준 대가로 네게 뭔가를 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자신은 이대로 아무 미련 없이 깔끔히 사라질 거다.
그게 천하를 위해서도 옳은 일.
“무슨!”
그러자 어째서인지 진천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죽는 건 자신인데?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이게 마지막인데…….’
부르르!
흑의 여인이 더 거세게 몸을 떨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매 순간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달려왔다.
그랬기에 조금이라도 재밌어 보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품었고, 또 아낌없이 내주었다.
진천우 또한 그중 하나.
언제나 오롯이 재미만을 위해 살아왔는데.
“…….”
어째서인지 마지막만은 그리 재밌지 않았다.
부르르르!!
“제길…….”
마지막 순간에서야 그녀는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본심을 깨달았다.
‘살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 말만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제길……!”
그녀는 그렇게 끝까지 본심을 숨긴 채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당신의 마지막 말은 잘 들었습니다.”
분명 흑의 여인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건만, 진천우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그걸 들은 자신이 할 일은 명백했다.
촤륵!
그는 소매에서 급히 침통을 꺼내, 눈앞에 펼쳤다.
“지금 즉시 요상절초 십팔수를 펼치겠습니다.”
진천우는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