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두 번째 절맥 개방
(51/210)
51화 : 두 번째 절맥 개방
(51/210)
51화 : 두 번째 절맥 개방
2021.10.27.
요상절초 십팔수는 어디까지나 응급조치.
다만 천하제일의 응급조치였다.
진천우는 자신의 기술을 믿고 흑의 여인의 상의를 벗겼다.
옷 위로 침을 놓을 수는 없기에.
한 꺼풀 벗기자 명문(名文)의 필체처럼 유려한 곡선이 드러났다.
허나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남은 속곳도 단숨에 벗겼다.
반쯤 허풍을 섞어, 달빛을 받아 속이 비칠 정도로 맑고 투명한 속살이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여인의 은밀한 부위.
그러나 어째서인지 음심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부르르!
자신이 아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오만한 여인.
그런 그녀가 갓난아이처럼 몸을 떠는 걸 보고 어찌 음심이 솟을까?
그의 가슴에 샘솟는 건 측은지심뿐이었다.
‘서둘러야 한다.’
진천우가 머리카락보다 가는 단침을 들었다.
슥.
맨 처음은 기해혈.
과연 의선의 가르침답게, 떨림이 일 수에 멈췄다.
하지만 이건 일시적일 현상에 불과했다.
제대로 숨을 돌리려면 열여덟 번의 시술이 성공해야 했다.
‘두 번째는 거궐.’
거궐은 배꼽을 중심으로 위로 육촌.
이후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열 번째까지 단숨에 침을 놓았다.
“후우!”
시술의 절반을 넘기자, 흑의 여인이 달뜬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난히 상기된 얼굴에 뜨거운 숨결.
조금 전의 발작으로 몸에 열이 가득 쌓였다.
이를 모조리 뱉어야 했다.
진천우는 즉시 열한 번째 침을 놓았다.
그에게는 다른 조치를 취할 시간도, 실력도 없었다.
그저 요상절초 십팔수와 흑의 여인의 천운만 믿고 시술을 계속할 수밖에.
열둘, 열셋, 열넷, 열다섯.
다행히 침술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몸에 들끓던 열이 빠르게 흩어졌다.
진천우가 한결 편안한 얼굴로 남은 침을 놓았다.
그런데 열일곱 번째 침을 놓는 순간.
“컥!”
“!?”
느닷없이 흑의 여인이 검은 피를 토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다.
침술이 진행될수록 죽은피가 위로 올라와 언제라도 뱉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그가 예상하지 못한 건, 하필 피가 제 눈에 튄 것.
“누, 눈이!”
독……까지는 아니지만, 몸 안의 온갖 나쁜 기운을 모아둔 피라 결코 이롭지 않았다.
그런 걸 뒤집어썼으니, 눈동자가 타들어 가듯 아팠다.
더 큰 문제는, 아직 요상절초 십팔수의 마지막 한 수가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큭!”
잠시 시술을 멈추자 다시 발작이 시작했다.
누구보다 굳건한 그녀가 신음을 흘릴 정도이니, 발작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미친 듯이 흐르는 땀과 쉬지 않고 요동치는 떨림.
‘눈이 다시 뜨일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진천우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은 채 마지막 남은 장침을 집었다.
근 두 뼘에 달하는 장침으로 전중혈을 찔러야 한다.
전중혈의 위치는 양쪽 젖꼭지를 이은 선 한가운데.
천만다행히도 다른 혈도에 비하면 비교적 찾기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요상절초 십팔수의 마무리는 손에 든 긴 장침을 단숨에 찔러 넣어야 끝난다.
만일 조금이라도 망설임이 있으면, 지금까지 한 노력이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떨리는 손이 여인의 몸을 더듬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진천우는 손끝에 모든 감각을 모았다.
슥!
‘여기…….’
슥!
‘여기?’
몇 번이나 확인한 끝에 전중혈을 찾았다.
장침을 들었다.
이대로 한 번에 찔러 넣는다.
혹여나 잘못되면 어쩌냐는 걱정?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단숨에 밀어 넣었다.
슥!!
당연한 말이지만, 보통 사람의 몸통 두께는 두 뼘이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한 뼘에서 한 뼘 반?
헌데 두 뼘 길이의 장침을 단숨에 찔러 넣는다?
등 뒤로 침이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침이 중간에 휘는 건 당연한 일.
진천우는 손끝에 온 감각을 집중하고 있기에 장침이 어디로 휘는지 속속들이 포착했다.
“아!”
그와 동시에 불편한 눈조차 번쩍 뜨일 정도로 크게 깨달았다.
전부터 요상절초 십팔수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건 마지막 단계에서 꼭 전중혈이 아니라 심장에 침을 찌를 때도 있었다는 것.
그 이유가 방금 밝혀졌다.
‘전중혈에 들어간 장침이 중간에서 꺾어 심장으로 들어가는구나.’
결국 마지막에는 심장을 자극하는데, 그 상태의 심각성에 따라 전중혈을 거치느냐, 그렇지 않으면 직접 심장에 찌르느냐의 차이였다.
이걸 깨달으면서 진천우는 의선이 남긴 요상절초 십팔초의 모든 걸 완전히 이해하게 됐고, 그와 동시에 눈앞에 푸른 현판이 등장했다.
[‘요상절초 십팔수의 극의(極意)’를 깨우쳤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몸 안의 기운이 재배치됩니다.]
[재배치로 인해, 가장 최근에 삼킨 화후의 내단의 기운이 사용자의 절맥 중 한 곳을 뚫기 시작합니다.]
“뭐?!”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
그러나 타이쿤은 진천우가 의문을 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쿵!
갑자기 심장을 망치로 내려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한 번이 아니었다.
쿵! 쿵!
내단의 기운으로 뭉쳐진 범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심장을 할퀴었다.
쾅! 쾅!
거기다 대환단의 기운으로 이뤄진 범도 입에서 불을 뿜어 심장을 태웠다.
쿵쾅쿵쾅!!
진천우의 심장은 두 마리 괴물의 공격을 견디다 결국…….
쾅!!!!
폭사하고 말았다.
[천지혈(天地穴)이 영구히 개방됩니다.]
* * *
“크윽!”
끼익?
눈을 뜨니, 웬 징그러운 원숭이 면상이 보였다.
끽!
녀석이 기껏 깨워줬더니 그 무슨 망발이냔 표정을 지었다.
저놈은 남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나?
‘설마…….’
“내가 얼마나 오래 기절해 있었지?”
끽?
화후가 진천우를 향해 손가락을 하나 펼쳤다.
그래, 안 그래도 사람 말을 저렇게 잘 알아듣는 원숭이가 남의 생각까지 읽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나저나 하루?
밖을 보니, 날이 밝았다.
‘다행히 그리 오래 기절한 건 아니구나.’
그는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 원숭이의 반대편에 흑의 여인이 여전히 기절한 채 누워있었다.
슥! 스윽!
진천우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옷을 여몄다.
그다음 화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놔.”
끽!
“다 쓸 데가 있으니까 내놔.”
끼익!
녀석은 몇 번 반항했지만, 결국 순순히 허리에 두른 누런 천을 내놓았다.
그리고 몰래 뒤편에 숨긴 푸른 천과 흰 천도 함께 꺼냈다.
“…….”
청룡기와 백호기까지 숨겼을 줄은 몰랐는데?
끼이익! 끽!
“웃지 마라.”
화후가 겸연쩍다는 듯 실실 웃었다.
그 꼴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짜증이 올라와, 주먹으로 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끽!?
분명 가볍게 내리쳤는데, 화후는 무슨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바닥을 뒹굴었다.
“엄살은.”
엄살이라고 하기에는 눈물 콧물까지 쏟아냈지만, 진천우는 그저 저놈이 이젠 연기까지 하는구나 하며 신경을 껐다.
그는 발광하는 화후를 내버려 두고, 청기와 백기 그리고 황기를 길게 늘어트린 뒤, 그걸로 기절한 흑의 여인을 등에 고정시켰다.
휙! 휙!
그 상태로 몇 번 몸을 움직여, 단단하게 고정된 걸 확인하고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여전히 까마득한 절벽.
위를 올려보면 다를까 싶었지만, 안개에 가려져 봉우리가 보이지 않았다.
끼긱! 끽!
그때, 눈치 빠른 원숭이가 곧바로 한쪽 다리에 매달렸다.
녀석은 이제 진천우가 이곳을 떠날 거란 걸 알고,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소리쳤다.
“거치적거린다.”
그는 정말 순수하게, 녀석이 거치적거려서 비키라고 발을 까닥였다.
쾅!
화후가 벽에 처박혔다.
저놈 저거, 연기를 너무 잘하는데?
끼이익!
원숭이가 그 자리에서 서럽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예 땅이 꺼지라 울었다.
꼴값은.
“안 갈 거냐?”
뚝!
그 한마디에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웃었다.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하긴 애초에 엉덩이에 꼬리 난 원숭이였지.
진천우가 또다시 제 발에 매달린 놈에게 말했다.
“거치적거리니, 다리 말고 등에 매달리라고.”
끽?
녀석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알고 보니 먼저 등에 업힌 흑의 여인이 부담스러운 모양.
‘왜 이러지?’
이 녀석, 분명 절벽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주먹 욕도 날릴 정도로 시건방졌는데,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기절하는 동안, 따로 얻어터지기라도 했나?’
하긴, 이놈이 맞을 짓을 좀 했어야지.
진천우는 화후의 사정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까닥였다.
아무튼 다리에 매달리는 건 안 된다.
흑의 여인과 함께 등에 매달리지 않으면, 여기서 두고 갈 수밖에.
끼긱!
그제야 화후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더니, 그리 넓지도 않은 등 위에서 최대한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피식!
진천우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아래로 몸을 날렸다.
휘오오!
밑에서 거센 강풍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몸이 가볍다.’
어째서인지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웠다.
천지혈을 뚫은 덕분일까?
그게 아니면, 천마신공을 익힌 덕일까?
‘오른쪽!’
그의 눈에 어디를 밟으면서 내려가야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는지가 보였다.
휙!
그의 몸놀림 또한 예전과 달랐다.
머릿속에 상상만 했던 움직임을 한 치의 오차 없이 펼쳐 보였다.
‘믿을 수 없군.’
당사자도 이렇게 느낄 지경이니.
끼익?
등에 매달린 화후는 말도 안 된다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끽끽!
녀석이 인간 주제에 어떻게 제 전성기 때와 맞먹는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지 물었다.
진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네가 뱉은 내단을 먹고 이렇게 됐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거기다 그는 지금 쉽게 입을 열 겨를이 없었다.
쿵쾅쿵쾅!
아래로 내려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본래라면, 향상된 능력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아까부터 기묘한 감각이 자꾸 아래로 내려가라고 속삭였기 때문.
슥!
마침내 멀쩡한 땅에 내려왔다.
쿵쾅쾅!!
바닥에 내려오자 심장이 더 거칠게 뛰었다.
‘뭐지?’
주위를 살폈지만, 눈앞에는 그저 울창한 수풀뿐이었다.
그러나 이 너머에 틀림없이 뭔가 있다.
아까부터 그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는 게 느껴졌다.
그 증거로.
고오오!
발이 땅에 닿던 그 순간, 천마신공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운용되었다.
더 놀랄 일은 다시 제 몸에 나타난 용과 범이 서로 싸우지 않고, 지금 진천우가 느끼는 것과 똑같이 한껏 긴장해 몸을 움츠리는 게 아닌가?
도대체 무엇이 이것들까지 함께 주눅들게 만드는 걸까?
쿵쾅쿵쾅!!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쏴아아!
정면에 울창한 수풀을 손으로 헤쳐 나갔다.
“?!”
마침내 수풀을 다 헤치자, 눈앞에 생각도 못 한 광경이 펼쳐졌다.
“…….”
진천우가 즉시 눈알을 굴려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한적한 장소에, 마치 수십 개 천재지변이 한 번에 휘몰아친 것 같은 지독한 폐허가 펼쳐져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