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 천재지변이 휩쓸고 간 자리에 새겨진 족적 (52/210)


52화 : 천재지변이 휩쓸고 간 자리에 새겨진 족적
2021.10.30.


“신기한 곳이군.”

진천우가 등 뒤의 목소리에 잠시 몸을 떨었다.

“일어나셨습니까?”

흑의 여인이 예상보다 일찍 깨어났다.

그녀는 그대로 등에서 내려와 가만히 제 몸을 살폈다.

그러더니 진천우를 향해 한마디 했다.

“너도 신기한 놈이구나.”

그 순간부터 흑의 여인의 가치관에서 그는 더는 재밌는 놈이 아닌, 재밌고 신기한 놈이 되었다.

평생을 그녀를 괴롭힌 천형.

그걸 어떻게 치료, 아니 잠깐이나마 억누를 수 있었는지 궁금할 텐데, 흑의 여인은 일말의 고민 없이 눈앞의 광경에 집중했다.

“이런 곳은 다시 오기 힘든 장소지. 함께 둘러보자꾸나.”

그리 말하더니, 마치 제집 정원을 둘러보듯 편안히 뒷짐까지 쥐며 걸음을 옮겼다.

너무나 그녀다운 당당한 태도에 진천우가 낮게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흠…….”

“지진(地震)이군.”

처음 눈에 띈 건 사정없이 헝클어진 땅이었다.

마치 양옆에서 커다란 손이 지면을 걸레 짜듯 뒤틀어놓았다.

곳곳에 균열이 벌어지거나, 솟구쳤거나 아래로 꺼졌다.

“흐음…….”

진천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옅은 신음을 흘렸다.

흑의 여인이 말대로, 이 땅에 지진이란 재앙이 들이닥친 데에는 조금도 의문이 없었다.

그러나.

‘좁다.’

그 반경이 좁게 한정돼 있었다.

기껏해야 십 장?

물론 그 범위 안에는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게 초토화되어 있지만, 무려 자연재해란 측면에서 보면 지극히 좁디좁았다.

어째서 이리 한정된 공간에만 지진이 들이닥칠 수 있는지, 진천우는 바로 답을 냈다.

사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게, 고개만 살짝 돌리면 그 답이 눈에 보였다.

“저건…….”

“태풍(颱風)이군.”

이번에도 흑의 여인이 한마디로 정의해 주었다.

그녀 말대로 뒤틀린 땅 바로 옆에 전혀 다른 자연재해가 벌어졌다.

거센 바람이 휩쓸린 자리는 지진이 발생한 땅과 달리 지면이 뒤틀리지도, 그렇다고 지축이 헝클어지지도 않았다.

대신.

“모든 게 쓸렸군요.”

“지나치는 장소에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버리는 게 바로 태풍의 무서운 점이지.”

태풍이 지나친 자리는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주위를 깨끗이 쓸어버렸다.

그저 지면 위에 어지럽게 남은 바람의 상처만이 이 땅에 무엇이 휩쓸고 갔는지를 알려줄 뿐이었다.

하지만 태풍 역시 지진과 마찬가지로 십 장 반경밖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재해의 흔적이 보였다.

“이건 홍수(洪水).”

근처에 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건만, 그 땅은 분명 엄청난 양의 물살이 땅을 한 번 쓸어버린 흔적이었다.

“낙뢰(落雷).”

하늘에서 내려친 눈부신 빛이 땅을 시꺼멓게 태웠다.

그 외에도 여러 재앙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게 뭐냐고 하면, 의외로 큰 고민 없이 정할 수 있었다.

“이건 화산(火山)인가요?”

“맞을 거다.”

흑의 여인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

진천우는 그 땅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곳만 다른 땅과 유독 크게 비교가 되었다.

‘낙뢰 지역도 땅 전체가 검게 그을렸지만…….’

화산 지역은 검게 그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땅 전체가 검었다.

한번 뜨겁게 끓은 땅이 시간이 지나 식으면서 검은 돌로 변한 것.

손으로 가볍게 땅을 쓸자, 식으면서 올라온 기포로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구멍이 송송 뚫렸다.

이러니 앞의 지진과 태풍, 그리고 그 외 다른 재앙들이 넓게 영역을 뻗칠 수 없었을 수밖에.

지진 바로 옆에 태풍이 불고, 그 옆에 홍수가 들이닥치며, 또 그 옆에서 화산이 터지는 말도 안 되는 기사(奇事)라니!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도대체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걸까?

‘이것도 금지 전설과 관련된 걸까?’

하늘의 신선이 개입했다는 도원경의 전설.

솔직히 그것도 믿기 힘들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런 전설 속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이때, 한 발 앞서 주변을 살피던 흑의 여인이 입을 뗐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진천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천마신공이다.”

“네?”

너무나 뜬금없는 소리에 자꾸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그녀는 질문을 무시하고, 홀로 지진 지대 쪽으로 걸어갔다.

“이 땅 한가운데 박힌 족적은 틀림없이 천마의 걸음(天魔步 : 천마보).”

‘족적?’

확실히 지진 지대는 중앙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충격이 뻗어나간 형태.

그러나 제멋대로 어그러진 이곳을 그저 슥 훑어본 것만으로, 언제 새겨졌을지도 모를 그런 흔적을 찾아낸다고?

“아무렴, 내가 그분의 흔적을 못 알아볼 리 없지.”

그녀는 추호의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흑의 여인은 바로 옆 태풍 지대로 나아갔다.

“이 땅을 쓸어버린 강한 풍압은 천하에 오직 하나, 천마의 손짓(天魔流 : 천마류)으로 만든 게 분명하다.”

그 외에도 그녀는 낙뢰와 홍수 그리고 화산 지대까지 하나하나 찬찬히 살피며, 생전 처음 듣는 천마신공의 초식을 언급했다.

자신도 모르는?

즉, 흑의 여인이 천마신공을 모두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

그건 아니었다.

“설마 전설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그녀 역시 직접 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천마의 전설이 실재했다고 믿지 못했을 터니.

천마(天魔).

하늘까지 닿은 진정한 마(魔).

아니, 하늘조차 거꾸러트릴 지고의 마(魔).

현 무림에서는 그저 교의 주인을 일컫는 말에 불과하나, 본디 천마의 뜻은 인세에 존재할 수 없는 천재지변(天災地變) 그 자체였다.

전설대로라면 천마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지진을 일으키고, 손을 흔들면 일만 군세가 그 풍압에 날아가고, 숨을 내쉬면 그 뜨거운 입김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가 타죽는다고 한다.

눈앞의 광경이야말로 전설 그 자체.

하지만 흑의 여인이 이것을 천마신공과 연결한 까닭은 따로 있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뛴다.

그녀 또한 이 땅에 도착하자마자 천마신공이 멋대로 운용되었다.

흑의 여인의 몸에는 진천우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대한 용과 범이 틀어 박혀있었다.

그랬다.

그 두 녀석이 모처럼 신공을 운용했음에도 발광하지 않고 계속 몸 구석에 틀어박혀 있다니.

마치 자신보다 한참이나 상위 존재의 흔적을 발견하고, 겁에 질린 모양새가 아닌가?

‘천마신공은 말 그대로 신공(神功)이다.’

목숨을 걸어도 좋았다.

천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신공절학이 존재하지만, 그 모두와 견주어도 천마신공은 반드시 첫손에 꼽힐 무학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천마신공을 극성으로 익혔다.

그렇게 만들어진 두 신수는 설령 지금 교의 주인인 현 천마가 눈앞에 나타나도 잠시 몸을 떨지언정, 지금처럼 공포로 옴짝달싹 못하지는 않았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경우는 하나뿐.

‘천마 전설이 사실이고, 눈앞의 폐허가 바로 전설의 천마가 이룩한 경지일 때뿐이다.’

그럼 흑의 여인이 지금 당장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가 다시 지진 지대로 돌아왔다.

그곳 중앙, 땅이 움푹 솟아난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땅 아래를 굽어살폈다.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어찌나 집중하는지, 마치 머리에서 금방이라도 김이 날 정도…….

치이익!

아니, 정말 머리에서 김이 난다?!

‘헉!’

진천우는 하마터면 입에서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급히 속으로 삼켰다.

이제부터는 숨소리도 조심해야 한다.

‘뛰어난 무인이 그 경지를 한 단계 넘어설 때, 반드시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더니.’

가문 서고의 잡서에서 읽은 바로는, 운기 중 몸이 공중에 뜨거나, 이마에서 색색깔 기운이 흘러나오거나, 혹은 몸 주위에 꽃이 피기도 한다고 했다.

지금 흑의 여인에게 일어나는 현상도 그중 하나가 분명했다.

이때야말로 무인에게 평생 다시없을 기회이니,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고서야 절대 접촉하지도, 아예 근처에 다가가지도 말고, 멀찍이 떨어져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진천우는 행여나 제 숨소리로 말미암아 그녀가 새로운 경지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을 방해할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후우!”

그는 천재지변 지대에서 확연히 거리를 벌린 다음에야, 간신히 참아온 숨을 아주 옅고 길게 뱉었다.

이때도 흑의 여인의 정수리에서 새하얀 연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몽롱한 눈으로 하염없이 땅을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말도 안 되게 강했는데, 여기서 더 위의 경지를 밟으면 과연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

진천우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

그도 천마신공을 익혔기에, 확실히 ‘내공만이 아닌’ 전설의 천마신공에 욕심이 났다.

허나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내가 부족한 걸 억지 부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흑의 여인과 똑같은 광경을 보고도 자신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이는 그가 그녀보다 천마신공의 경지가 떨어지기 때문.

‘게다가 내 눈에는 여전히 천마의 족적이 보이지 않으니.’

지진을 일으킨 건 천마의 발자취라고 흑의 여인이 따로 설명까지 해줬음에도, 그는 여전히 천마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 어떤 가르침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익힐 수 없으니.

스스로 눈뜬 소경인 것을 누구를 원망하랴.

“후우!”

진천우는 천재지변의 땅에서 더욱 거리를 벌리며 낮게 한숨을 흘렸다.

이쯤 떨어져야 그녀의 깨달음을 방해하지 않을 성싶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 또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활개 칠 수 있겠지.’

무엇을?

왜?

진천우는 이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질문을, 처음 이 땅을 발견하며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러니까 왜 천마는 이곳에서 온갖 천재지변을 일으켰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는 그 해답을 보았다.

비록 자신은 흑의 여인처럼 천마의 족적을 찾지 못했지만, 대신 다른 걸 발견했다.

‘인연이 닿지 않으면 그 어떤 가르침도 소용없다.’

이는 진천우는 물론 흑의 여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아마 그녀도 천마의 흔적에만 신경 쓰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알아봤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다.

흑의 여인에게 천마신공이 주어졌듯, 진천우에게도 다른 무언가가 주어졌다.

‘족적이 여기까지 이어졌구나.’

그가 그녀에게서 떨어진 건, 단순히 무아지경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만이 발견한 흔적을 쫓고 쫓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닿게 된 것.

전설의 천마는 왜 천마신공을 발휘해 천재지변을 일으켰을까?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나?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간단했다.

‘누군가와 싸운 거지.’

그것도 이만한 재해를 연거푸 일으키고도 승부를 짓지 못한 누군가와.

그게 누굴까?

그자는 도대체 어떤 무공을 썼길래 천마와도 대적할 수 있었을까?

그때 진천우가 드디어 최초의 족적을 발견했다.

양발을 가지런히 모은, 무척이나 예의 바른 흔적.

“…….”

뒤늦게 그가 막상 이걸 찾아서 무얼 할지 생각에 빠졌다.

아쉽게도 자신은 흑의 여인과 달리 그저 흔적을 찾는다고 무아지경에 빠지고, 알아서 경지가 올라가는 천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게 있지.’

불확실한 재능 따위보다 더욱 믿을 만한 존재.

천형에 억눌러 언제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자신을 살려주고, 나아가 삶의 목표까지 정해준 그것!

‘믿는다.’

진천우가 희미하게 남은 족적 위로 천천히 발을 올렸다.

그러자.

[특수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천하제일 타이쿤의 하위 타이쿤, ‘보법보법 레볼루션(BBR)’이 개방됩니다.]

“보법보법? 비비……알? 이게 뭔?”

안타깝게도 생각에 빠질 겨를은 없었다.

우르릉!

진천우가 갑자기 하늘을 울리는 굉음에 급히 고개를 들었다.

“어?!”

하늘에서 색색의 족적들이 빗발쳤다!!

1655097134326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