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여덟 걸음
(53/210)
53화 : 여덟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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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 여덟 걸음
2021.11.01.
하늘에서 갖가지 색깔의 족적이 떨어지는 말도 안 되는 기현상.
허나 진천우는 이제 이 정도로 일일이 놀라지 않았다.
코앞에서 붉은색 족적이 떨어졌다.
“…….”
그는 그것이 땅에 떨어지는 걸 묵묵히 바라보더니.
슥!
족적이 땅에 닿기 직전, 재빠르게 발을 내밀었다.
펑!
그러자 땅과 진천우의 발에 동시에 닿은 족적이 느닷없이 폭발했다.
그건 단순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사르르!
터지면서 가루가 된 족적이 진천우의 발끝에 흡수되었다.
‘발이 가벼워졌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다른 족적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즉시 푸른색 족적을 밟은 뒤 녹색, 노랑 족적을 차례로 밟았다.
팡팡팡!
역시나 이번에도 땅에 닿은 족적이 터지면서 발에 흡수되었다.
이를 보며 진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 전, 세 번의 기회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일부러 땅에 닿는 순간보다 조금 일찍, 조금 늦게, 그리고 완전히 늦게 밟았다.’
그러자 각각 흡수되는 양이 달랐다.
앞의 두 번은 처음보다 흡수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완전히 늦게 밟은 건, 오히려 앞서 제대로 밟아 얻은 만큼이나 기운을 뺏겼다.
이걸로 하늘에서 빗발치는 족적, 아니 ‘BBR’의 규칙을 이해했다.
남은 건 그 규칙에 따라, 족적이 정확히 땅과 닿는 순간 발을 옮기는 것뿐.
슥! 슥슥슥! 슥슥! 슥슥슥슥!!
물론 타이쿤도 가만있지 않았다.
녀석은 진천우가 규칙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엄청난 양의 족적을 떨궜다.
그것도 전부 처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하지만 이 정도로 겁먹을 순 없지!
‘간다.’
바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너무 빠른, 너무 많은 족적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지만.
자신 또한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제 그는 전처럼 천형으로 언제 쓰러질지 모를 환자가 아니었고, 대환단과 화후의 내단이란 희대의 영약까지 흡수했다.
거기다 여러 걸출한 무공, 심지어 천하제일의 기공으로 불리는 천마신공까지 익히지 않았는가!
휙!
진천우의 몸을 앞으로 뻗어나갔다.
그 쾌활함이 마치 한 줄기 바람 같았다.
그리고 청명한 바람이 지나친 자리마다.
팡! 팡팡팡! 팡팡! 팡팡팡팡!!
크고 작은 폭음이 연이어 터졌다.
* * *
팡! 팡팡팡팡!!
연신 폭음을 터트리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스륵! 스르륵!
그때마다 족적이 폭발하며 발생한 가루가 몸에 흡수되었다.
그것들을 흡수할수록 진천우는 점점 더 빨라졌다.
허나!
‘이게 아냐.’
팡팡! 스르륵!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속도로 내달렸지만, 어째서인지 계속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아냐! 이게 아냐! 이게 아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꾸 뭔가가 걸린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음속에 걸리는 그 무언가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
‘도대체 뭐지?’
분명 결과는 순조로웠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족적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짓밟았다.
타이쿤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진천우는 정말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놓치고 있다.’
그게 뭘까?
내가 뭘 놓친 거지?
알아내야 한다.
반드시!
진천우는 이를 알아내기 위해 크나큰 결단을 내렸다.
“…….”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슥!
눈앞에 붉은 족적이 떨어졌다.
순간 몸이 움찔했지만, 애써 참았다.
가볍게 한 발만 내밀면 되는데.
그럼 바로 강해지는데.
하지만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강함은 용납할 수 없었다.
팡!
붉은 족적이 코앞에서 터졌다.
족적이 터지면서 나온 가루가 몸을 감쌌다.
이는 자신에게서 힘을 빼앗기 위한 것.
아예 건드리지도 않은 탓일까?
상당한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팡! 팡팡! 팡!!
주홍, 노랑, 녹, 청색 족적이 차례로 눈앞에서 터졌다.
그때마다 기껏 백보(百步)를 밟아 쌓은 힘이 빠르게 흩어졌다.
그런데도 진천우는 꿈쩍하지 않았다.
아니, 되레 두 눈을 크게 치켜뜨고 그 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찾아야 한다.
자신이 놓친 것.
그걸 찾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팡!
남색 발자국이 터졌다.
이제 제 몸에 남은 힘은 기껏해야 한 줌.
슥!
그 와중에 하늘에서 자색(紫色) 족적이 아스라이 떨어졌다.
저것마저 놓치면 힘을 모조리 빼앗기고, BBR마저 끝나게 될 터.
물론 시간 끌 방법이 없진 않았다.
저 족적을 밟고, 다시 백보를 쌓은 뒤, 문제를 찾으면 된다.
“훗!”
허나 진천우는 그 방법을 떠올리자마자 코웃음부터 쳤다.
그러지 않을 거다.
자신은 절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을 거다.
‘의미가 없으니까.’
포기한다거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타이쿤을 너무 잘 알았다.
‘이 녀석은 절대 그 같은 회피법을 용납하지 않겠지.’
천하제일 타이쿤이 자신에게 제시한 길은 패도(霸道).
패왕이 되기 위해서는, 어쭙잖은 방법 따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설사 여기서 실패한다고 해도.
‘그러면 이건 내 첫 실패가 되겠군.’
그간 타이쿤이 몇 번이나 뜬금없이 눈앞에 여러 말도 안 되는 퀘스트와 이벤트를 던져줄 때마다 진천우는 반드시 그것들을 성공시켰다.
그 성공 신화가 이렇게 끝난다는 게 심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
그의 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색 족적에서 떨어졌다.
마지막 순간, 사람은 미래와 현재보다 자신이 지나쳐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법.
빨주노초파남.
그가 놓친 색색의 족적이 땅에 얕고 깊게 박혀있었다.
“?!”
얕고 깊게?
팡!
그 순간, 자색 족적이 터졌다.
폭발과 함께 흩어진 보랏빛 가루는 이후, 싱그럽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실려 하늘로 날아갔다.
바로 진천우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불러일으킨 바람이었다.
‘이거였구나!’
팡팡팡!
그는 곧바로 빨, 주, 노, 세 족적을 연거푸 터트렸다.
산들바람이 순식간에 강풍으로 성장했다.
‘이거였어!’
드디어 놓쳤던 무언가를 찾았다.
진천우가 더욱 거센 기세로 남은 발자국을 차례로 밟았다.
아주 강하게, 그리고 아주 약하게.
지금껏 지나온 발자취는 모두 땅에 파인 깊이가 달랐다.
‘힘의 가감(加減)!’
무작정 족적만 쫓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빗발치는 족적에 눈이 멀어, 본래 목적을 잊었다.
BBR.
그러니까 보법보법 레볼루션을 시작한 이유.
‘과거 전설의 천마와 일전을 겨눈 누군가의 걸음걸이(步法 : 보법)를 배우려 한 거잖아!’
보법이라 함은 단순히 땅을 밟는 게 끝이 아니라, 땅을 밟는 강약의 조절과, 물러남과 나아감의 계산을 모두 포괄한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팡!
진천우가 남색 족적을 터트렸다.
‘겨우 여섯 걸음 걸었을 뿐인데…….’
매 걸음 나갈 때마다 몸 안에 힘이 걷잡을 수 없이 쌓였다.
백번의 의미 없는 발자취는 진정 앞으로 나아가고자 각오한 한걸음에 비하지 못했다.
그 걸음이 일곱 번 이어졌다.
팡!
일곱 번째 자색 족적이 터지자, 진천우의 몸속에 정체 모를 기운이 끝없이 휘몰아쳤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이대로 뒀다간 몸이 터질 것 같았다.
당장 이 힘을 내뿜어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스륵!
바로 그때, 하늘에서 단 하나의 족적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까지와 달리 검디검은 족적.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저게 마지막 족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휙!
마지막 족적은 앞의 다른 것들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빨리 떨어졌다.
그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어마어마한 무게가 그 발자국에 실린 것 같았다.
그렇담, 나 역시 지금까지와 비교되지 않는 힘으로 저놈을 짓밟아야 줘야 한다.
“?!”
그런데 진천우는 검은 족적이 떨어지는 걸 지켜보다, 또 다른 문제를 발견했다.
너무 멀다.
단순히 한 번 크게 뛰는 거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달리기 시작해도, 검은 족적이 땅에 닿기 전에 도착하는 건 무리.
헌데 무슨 생각인지, 진천우는 달리기는커녕 가만히 제 자리에 섰다.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검은 족적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깊이 땅에 떨어질지 머릿속으로 계산한 뒤.
팟!
족적이 땅에 닿기 직전, 느닷없이 몸을 날렸다.
그 움직임이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그것은 진천우가 익힌 유일한 보법.
바로 진퇴보(進退步)였다.
진퇴보는 좌우로 꺾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대신 앞으로 나가고 물러서는 동작만은 최상위 신법 못지않았다.
‘게다가 지극히 단순한 만큼 힘의 가감 또한 자유자재지.’
쉽게 말해, 지금껏 쌓인 힘을 이 한 걸음에 전부 쏟아낼 수 있다는 뜻.
휙!
처음에는 산들바람에 불과하던 그가 몇 걸음 만에 강풍이 되더니, 마지막 한 걸음을 두고 결국 돌풍이 되었다.
갑자기 일어난 돌풍은 홀연히 하늘로 솟구치더니, 정확하게 검은 족적이 땅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쾅!!
족적이 떨어진 소리인지, 돌풍이 휘몰아치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진천우의 눈앞에 푸른 현판이 등장했다.
[초월 달성!]
[초월 달성을 했기에, 기존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현판이 빠르게 내용을 갱신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바로 쫓지 못할 정도였다.
[보법보법 레볼루션, 달성 보상으로 ‘대나이신법(大那移身法)’이 주어집니다.]
‘대나이신법!’
대나이신법은 소림의 비전 신법 중 하나로,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따라가는 최상승 신법이었다.
정말 엄청난 걸 얻었다.
그러나 놀람도 잠시, 이로써 진천우는 천마를 상대한 이가 소림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소림의 어느 누가 전설의 천마와 그만한 격전을 치를 수 있는 거지?’
천마 전설을 상대할 소림의 전설이라면, 혹시나 달마(達磨)!?
‘세상에 천마와 달마의 싸움이라니!!’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현판을 살폈다.
대나이신법에 대한 추가설명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적어도 소림의 비전 절기는 절대 이런 취급을 받을 게 아니었지만, 아쉽게도 새로운 주인의 호기심을 다 억누르지 못했다.
[초월 달성으로 보상이 추가되었습니다.]
[추가 보상 : 여덟 걸음]
‘?’
고생해 얻은 추가 보상에 진천우가 고개를 저었다.
난데없이 여덟 걸음이라니.
이건 무슨 뜻일까?
잠깐이지만 그의 호기심이 꺾이려던 찰나.
“찾았다!”
하필 그 아래에서 자신이 찾았던 문구가 나타났다.
[사용자는 타이쿤이 알려주지 않은 공략을 스스로 찾아냈습니다.]
[이에 대한 두 번째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두 번째 추가 보상으로 ‘중간광고’ 시청권을 획득했습니다.]
[‘중간광고’를 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여덟 걸음도 궁금하지만, 여기선 일단 망설이지 말고 ‘예’부터 누르려다가.
“어?”
갑자기 몸이 굳었다.
중간광고 수락 문구 바로 아래에, 시청하면 누구의 기억을 볼 수 있는지 적혀 있었다.
여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왜?”
어째서 거기에.
“왜 여기서 당신이 나와?!”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누군가의 이름이 나온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