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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 특별한 스킬 (1) (56/210)


56화 : 특별한 스킬 (1)
2021.11.08.


어둠이 걷히고 당연히 광명으로 빛날 줄 알았던 그곳은, 검붉은 선혈로 뒤덮여있었다.

“쿨럭!”

“무슨!”

그대로 땅으로 추락하는 흑의 여인을 붙잡아 안았다.

“쿨럭! 컥!”

안색이 심상치 않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분명 요상절초 십팔수를 시전했는데……. 아니지. 그것보다 어떻게 이 몸으로 천마신공을 펼친 거지?’

아아! 전설의 재현은 무슨!!

‘난 끝까지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구나!’

이미 승부는 났다.

이만한 족쇄를 찬 상대와 지금껏 싸우고도 이기지 못한 시점에서, 자신의 패배는 확정이었다.

망연자실한 진천우의 얼굴 위에 유백색 손이 올라왔다.

“기껏 이겨놓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건 패자에게 예의가 아니다.”

“이겼다니!”

이런 몸을 한 당신에게!

뚝!

“컥!”

순간, 목이 직각으로 꺾였다.

“큭! 승부에 이겼어도 방심하지 마라. 가끔 나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패자도 있는 법이니.”

하마터면 의식을 잃을 뻔했지만, 가슴팍에서 울리는 실없는 웃음소리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후후!”

흑의 여인이 낮게 웃었다.

슬슬 시작되는 발작의 기미에 몸을 떨면서, 입가의 미소는 오히려 짙어졌다.

그러더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재밌었다.”

즐거웠다고.

잠시지만, 병을 잊을 만큼 즐거웠다고.

허나 진천우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전 이기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그저 막연한 고집.

그러나 이대로 승부를 인정하면, 흑의 여인은 그대로 웃으며 다른 세계로 갈 것 같았다.

“그래?”

그녀가 곧바로 진천우의 뺨을 쓸었다.

조금 전에 부린 투정 때문일까?

흑의 여인은 자신의 어미를 떠올리게 하는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 입술을 뗐다.

“그렇담, 승부는 나중으로 미루지.”

“약속한 겁니다.”

“그……러지.”

그리 말하며 그녀가 눈을 감았다.

부르르!

곧 발작이 시작된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이 아는 한, 의선의 요상절초 십팔수는 천하제일의 구명법이다.

이마저도 반나절밖에 효과가 없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잠깐, 그럼 식의를 쓰면?’

식의(食醫)는 의선의 두 번째 비급.

확실히 그건 요상절초 십팔수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식의를 펼칠 준비가 무엇 하나 되지 않았다.’

식의에 필요한 재료도 갖추지 않았고, 이를 조리할 솜씨도 없었다.

‘게다가 내가 만일 그 둘을 다 갖췄다 해도…….’

“쿨럭!”

그 순간, 흑의 여인이 검붉은 피를 토했다.

부르르!

각혈과 함께 몸의 떨림이 눈에 띄게 심해졌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 뭐라도 해야 했다.

진천우가 급히 침통을 꺼냈다.

일단 요상절초 십팔수가 짧게나마 효과를 보인 건 사실.

이번에도 그 절반의 효과라도 있길 기대했다.

허나 기해혈에 단침을 놓자, 절망적인 결과가 그의 눈을 가렸다.

[상세가 너무 나빠, 요상절초 십팔수만으로 더는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요상절초 십팔수는 어디까지나 응급조치에 불과합니다.]

정말 실낱같은 희망이었는데, 타이쿤은 곧바로 그 희망을 박살 냈다.

“큭!”

또 흑의 여인이 피를 토했다.

입가로 흘러내린 검은 피가 그녀뿐 아니라, 그녀를 안고 있는 진천우의 옷도 검게 물들였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천형을 고칠 수도, 발작을 진정시킬 수도 없었다.

“젠장!”

하다못해 흑의 여인 대신 자신이 아파해줄 수도 없었다.

“제길!”

진천우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꽈악!

진천우는 흑의 여인의 떨리는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젠장!!”

또 하늘을 향해 욕을 쏟았다.

그는 계속 몸을 떠는 그녀를 보며, 누군가를 떠올랐다.

과거의 자신.

그리고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두 분.

‘아버님……. 어머님…….’

그분들은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옛 기억을 들춰 두 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아주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만 해도 이리도 참을 수 없는 좌절감과 회한에 몸서리치는데.

-천우야, 걱정 마렴! 아비가 꼭 네 병을 고칠 의원을 모셔오마. 대라신선만이 네 병을 고칠 수 있다고? 까짓 거, 신선의 멱살을 끌어서라도 데려오마!

-믿으렴. 네 아비는 반드시 네 병을 고칠 신의를 데려올 거란다.

‘어머님은…… 아버님은 도대체 어떻게 이 같은 마음을 참고, 도리어 절 격려할 수 있었던 겁니까?’

새삼 부모의 위대함을 깨달은 어리석은 자식이 봇물 터지듯 눈물을 쏟아냈다.

“후후!”

“?!”

아차!

품에서 낮은 콧소리가 울렸다.

‘이 상황에 난 또 내 생각만 했구나!’

그녀가 날 보며 얼마나 황당했을까?

“죄, 죄송……!!”

“넌 마지막까지 재밌는 녀석이다.”

하지만 흑의 여인은 되레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난 재밌는 놈이 아니다.

특히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지금도 쉬지 않고 입가에 붉은 피를 흘리는 환자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

“…….”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천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뭘 그리 보십니까?”

“왜? 마지막 가는 길에 얼굴 좀 본다고 뭐라 하느냐? 쿨럭!”

“아닙니다. 마음껏 보십시오.”

“됐다. 나도 저 싫다는 놈의 얼굴은 보기 싫다.”

그리 말하며 흑의 여인은 정말 고개를 휙 돌렸다.

이를 본 진천우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떻게 발작 중에도 저리 말할 수 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그녀가 안쓰러웠다.

‘이리도 강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 고통만이라도 줄여주고 싶었다.

“후우!”

우연일까?

“술이 마시고 싶구나.”

“!?”

아마 흑의 여인은 별 생각 없이 한 소리겠지만, 진천우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이, 있습니다!”

“응? 뭘?”

“술이요!”

때마침 그에게는 술이 있었다.

진천우가 허둥지둥 소매에서 가늘고 긴 죽통을 꺼냈다.

직접 만들었는지 조잡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외형 따위가 아니었다.

퐁!

뚜껑을 열자, 안에서 달콤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 뒤 코끝을 알싸하게 자극하는 무언가에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저번에 약속했던, 벌꿀로 담근 봉밀주입니다.”

“맙소사!”

덥석!

순간, 흑의 여인은 어디서 기운을 얻었는지 발작의 고통도 잊고 진천우에게서 죽통을 낚아챘다.

꿀꺽꿀꺽!

그리고 누운 자리에서 봉밀주를 남김없이 들이켰다.

“너무 급하게 마시면 안 됩니다.”

진천우가 걱정돼 한마디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본래 봉밀주를 만드는 데 최소 보름이 걸린다.

헌데 방금 흑의 여인이 들이킨 건 담근 지 이틀 만에 완성되었다.

처음부터 평범해 보이지 않은 붉은 색 꿀을 써서일까?

그게 아니면 금지의 강한 기운 때문에?

어쩌면 둘 다 적용된 탓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완성된 봉밀주는 너무 셌다.

맛과 도수 그리고 가진 기운까지 전부.

그것들이 얼마나 센지, 숫제 독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진천우는 애써 봉밀주를 완성하고도 바로 알리지 않고, 약초를 사용해 기운을 중화하려 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부족해 중화에 실패했다.

꿀꺽꿀꺽!

흑의 여인이 쉬지 않고 독주(毒酒)를 마셔댔다.

이를 본 진천우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지만, 어떻게 말릴 수 없었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한다.

그리고 사람은 취하면 고통을 잊는다.

비록 독에 가까운 술이지만, 그 덕분에 발작의 고통을 줄어든다면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잠깐 독주에 취함으로써 발작을 줄일 수 있다면, 어쩌면?!’

그 순간, 진천우의 뇌리에 뭔가가 번뜩였다.

“잠깐!”

그가 급히 흑의 여인에게서 죽통을 낚아챘다.

“......!”

그렇게나 바라던 술을 빼앗겨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를 향해, 진천우가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 제안은 무척이나 놀랍고 위험했다.

하지만 이를 들은 흑의 여인의 생각은 달랐다.

“역시 넌 재밌는 놈이다!”

그녀는 바로 진천우의 제안을 수락했다.

* * *

지난 며칠, 많은 일이 있었다.

퀸 메이커도 그중 하나였다.

[퀸 메이커가 반응합니다.]

‘……이게 왜?’

진천우는 손에 든 검은 풀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앞서 벌집을 찾았을 때도 퀸 메이커가 반응했다.

‘아니, 꿀을 찾고 반응한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꿀은 고대부터 활용도가 높은 식품.

그 가치는 달콤함과 높은 영양에 그치지 않고, 약용으로도 큰 효과가 있었다.

무엇보다 흑의 여인이 특히 좋아할 봉밀주를 만드는 데 꼭 필요했다.

‘헌데 이건…….’

손에 든 검은 풀과 눈앞의 푸른 현판을 번갈아 보았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제 손에 들린 풀은 딱 보기에도 몸에 좋지 않은 독초였다.

‘잘못 본 건 아닌데?’

독괴록에도 수록된 독초가 맞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독초를 찾았다.

도원경은 천혜의 자연 보고.

사방에 기운이 충만하니, 강한 악성을 지닌 독초도 어렵지 않게 자랐다.

때마침, 짙게 우거진 수풀 아래 홀로 붉은 빛을 내는 풀뿌리를 발견했다.

울창한 수풀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에 반짝이는 붉은 풀은 품고 있는 독만큼이나 요염하고 아리따웠다.

아마 뭘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 자태에 눈이 멀어 저도 모르게 손을 뻗다 날카로운 잎에 베여 중독됐을 거다.

‘독초 주제에!’

허나 독괴의 진전을 이은 진천우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붉은 풀의 뿌리를 파내 안전하게 독초를 손에 넣었다.

그 순간, 또 현판이 등장했다.

[퀸 메이커가 반응합니다.]

‘대체…….’

왜 독초에 타이쿤이 반응하는 걸까?

그것도 그냥 타이쿤이 아니라 퀸 메이커가.

퀸 메이커는 여왕을 위해서만 반응한다.

여기서 여왕은 흑의 여인.

그런데도 퀸 메이커가 독초에 반응했다면?

‘설마 그녀에게 독을 먹이라는 건가?’

“에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진천우가 코웃음 쳤다.

일단 자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을뿐더러,

‘설령 그런 마음이 있다 해도…….’

흑의 여인 정도로 뛰어난 고수는 독에도 강한 저항을 지녔다.

어중간한 독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고,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자신이 중독됐단 걸 알자마자!

스윽.

손이 어느새 목 언저리로 올라갔다.

부르르!

단순히 생각만 했을 뿐인데, 마땅히 거기 있어야 할 부위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지독한 허전함이 느껴졌다.

“후우!”

‘쓸데없는 생각을!’

그는 다시 헛웃음을 지으며, 방금 꺾은 붉은 풀을 소매에 넣었다.

이후 금지를 돌며 몇 가지 약재와 독초를 더 찾았다.

그때마다 퀸 메이커가 반응했지만, 진천우는 별생각 없이 그것들을 전부 챙겼다.

언제 쓸지 모르지만, 아니, 아마 이것들을 쓸 날은 영원히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그날을 위해.

* * *

‘설마 진짜 그런 날이 올 줄이야!’

진천우가 흑의 여인에게 제안했다.

“제가 만든 독을 드셔주시겠습니까?”

그것도 그냥 독이 아니다.

금지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특별한 독초를, 독을 극한까지 깨우친 독괴의 비법으로 만든 아주 특별한 독.

“오냐!”

하지만 그녀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이 제안을 수락했다.

왜 독을 먹어야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술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진 걸까?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흑의 여인만은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술을 마시지 전보다 훨씬 또렷한 눈으로,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서 빨리 네놈이 만든 독을 내놓으라며.

“여기 있습니다.”

진천우가 그 자리에서 독을 만들어 내놓았다.

이 상황에서 독을 먹게 하는 그의 저의가 뭘까?

설마 독으로 독을 제압하는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원리?

아쉽게도 현재 진천우의 독공 수준으로는 흑의 여인의 발작을 진정시키지 못한다.

대신!

‘독으로 그녀의 발작을 죽인다.’

독의 본래 목적은 무언가를 죽이는 것.

진정 뛰어난 독인은 대상의 정신은 멀쩡히 내버려 둔 채, 호흡만 혹은 몸의 신진대사만 죽여, 대상을 산 채로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즉, 지금 진천우는 독으로 그녀의 발작만 죽이려 했다.

‘물론 그리해도 그녀는 결국 죽는다.’

어쨌든, 독이니까.

독이 퍼진 몸이 멀쩡할 리 없었다.

“후우!”

꿀꺽!

그때, 흑의 여인이 독을 삼켰다.

그녀는 잠시 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예상대로 혼절한 뒤부터 발작이 멈췄다.

진천우가 급히 흑의 여인을 몸을 살펴, 남은 시간을 가늠했다.

‘한 시진!’

한 시진이 지나면, 독이 완전히 퍼져 그녀는 죽는다.

그러니 그 전에 고칠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아버님! 어머님!’

저도 당신들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부디 힘을 주세요.’

슥!

진천우는 짧게 기도를 마치고, 소매에서 중간광고 보상으로 받은 적천석(赤天石)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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