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한 걸음
(59/210)
59화 :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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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 한 걸음
2021.11.15.
‘하늘을 뛰어넘으라고?’
진천우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높다.
높아도 너무 높다.
그야말로 무한히 펼쳐진 하늘.
‘그것을 뛰어넘으라니.’
그런데 어째서인지 고개가 내려가기는커녕 더욱 위를 향했다.
‘재밌겠어.’
꽈악!
저도 모르게 주먹이 움켜줬다.
어느새 자신도 흑의 여인에게 물든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단순히 이성으로서가 아니다.
홀로 우뚝 선 존재로, 흑의 여인은 누구든 눈을 떼지 못할 사람이었다.
자신도 그리되고 싶었다.
어쩌면…… 하늘을 뛰어넘으면…… 그리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팟!
진천우가 하늘로 몸을 날렸다.
대나이신법.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최상위 신법.
그는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큭!”
허나 인간은 새가 아니다.
새가 아닌 이상,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최상위 신법이라도 땅에서 높게 뛴 거지, 정말 하늘을 난 건 아니었다.
물론 경신법이 극치인 능공허도(凌空虛道)라면 능히 새처럼 하늘을 나는 게 가능하겠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까마득했다.
휙!
진천우의 몸이 빠르게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도 신법이 있으니 크게 다칠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건, 다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하늘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이대로는 하늘을 뛰어넘기는커녕 하늘을 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자신은 반드시 하늘을 뛰어넘어야 했다.
휘잉!
돌연 주위에 강풍이 불었다.
금지의 경계가 완전히 복구되었다.
잠깐 흑의 여인에게 양분되었던 정체불명의 기운이 새로운 도전자를 노렸다.
그 기운은 첫 도전자에게 당한 수모를 진천우에게 대신 받으려는 건지, 점점 더 매섭게 휘몰아쳤다.
휘이이이잉!!
거칠고 날카로운 기운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하필 한계까지 대나이신법을 펼친 직후.
이대로는 저것들을 전부 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일부만 막고, 일부를 피한 뒤, 일부만 견디면…….
‘아니다!’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는 몸은 지킬지 모르나, 여전히 하늘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허나 조금 전 번뜩인 생각을 실현하면?
‘어쩌면 하늘을 날 수 있을지도?’
그것만으로 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실패하면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쳐 온몸이 가루가 되겠지만, 그 정도도 각오하지 않고 어찌 하늘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간다!”
휘리릭!
진천우가 다시 대나이신법을 발휘했다.
안전하게 착지하기 위해서도, 자신을 공격해오는 기운을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휘이이이이이이잉!!!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무형의 기운을 되레 이용하기 위해.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 * *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앞을 가로막는 벽이 부서졌다.
후두둑!
곧바로 위에서 파편이 떨어졌다.
현석과 삼살이견이 급히 그것들을 피했다.
무인인 삼살이견이 파편을 피하는 건 별일이 아니었지만, 어떤 무공도 익히지 않은 현석이 그 많은 파편을 피한 건 대단한 일이었다.
진씨세가의 충실한 하인은 제 주인을 구하기 위해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시간이 지나 파편이 떨어지는 게 멈췄다.
현석은 급히 앞으로 나가 주위를 살폈다.
‘여기도 소가주님은 없다.’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안심되었다.
삼살이견의 힘으로 뚫은 동굴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안 그래도 그의 주인은 몸도 허약한데, 이런 데 깔렸다간 무사할 리 없었다.
‘어쩌면, 운 좋게 빠져나가셨을지도?’
제발 그랬으면!
하지만 희박한 가능성만 믿을 순 없었다.
“두 분께선 다시 한번 앞의 벽을 부숴주십시오.”
“이봐!”
“시켜도 적당히 시켜야지!”
아쉽게도 삼살이견은 현석과 생각이 달랐다.
애초에 그들은 진가의 식솔이 아니다.
게다가 여태까지 무너진 동굴을 뚫느라 상당히 무리했다.
그런데 저 망할 놈이 자신들에게 또다시 동굴 벽을 부수라 명령하다니!
깡마른 약초꾼으로 위장한 이가 앞에 나섰다.
“이 이상은 무리일세.”
“…….”
무리란 말에 당연히 펄쩍 뛸 줄 알았는데, 현석은 별말이 없었다.
이에 안도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쯤 하면 되지 않았나? 벌써 이틀째 쉬지 않고 동굴만 팠네.”
“맞아. 사람이 정도가 있어야지!”
장사꾼으로 위장한 삼살이견이 옆에서 맞장구쳤다.
둘이 교대로 불만을 늘어놓았다.
“이미 무너져 내린 동굴을 다시 뚫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나?”
“거기다 벽을 뚫을 때, 그 충격으로 주위가 무너지지 않게 힘 조절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고.”
“그렇지! 네놈이야 무공을 모르니, 우리가 뚫는 걸 지켜보는 게 다지만…….”
장사꾼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도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너진 동굴 벽을 뚫는 동안 현석이 지켜보기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면 삼살이견이 가만있었을 리 없었다.
이 지독한 놈은 그들이 가진 내공을 모두 탕진해 운기조식하려 뒤로 물러나는 동안에도, 전혀 쉬지 않고 파편을 동굴 밖으로 날랐다.
덕분에 현석의 손은 온갖 피멍과 상처로 보기 끔찍할 정도로 짓이겨졌다.
삼살이견은 하루에 검을 천 번 휘두르면 손이 어떻게 부르트고, 만 번 휘두르면 어떻게 뭉개지는지 아는 무인이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적어도 수만 번 이상 검을 휘두른 것 같은 현석의 손을 보고 차마 넌 편히 놀았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자신들은 꽤 노력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진가의 소가주를 위해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
현석은 그들이 모든 불평을 쏟아낼 때까지 묵묵히 들어주었다.
한참 뒤, 삼살이견의 불평이 끝나자.
“……개소리는 다 짖으셨습니까?”
평소 그답지 않은 차갑고 야멸찬 욕설을 내뱉었다.
“뭐?!”
“개소리!?”
이에 삼살이견의 눈이 돌아갔다.
그들은 거침없이 살기를 내뿜었다.
저 썩을 놈이 감히 누구에게 저딴 소리를 지껄인단 말인가!
그러나 현석은 살기에 주눅들기는커녕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개소리가 아닙니까? 열심히 했다고요? 충분히 했다고요?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당신들, 설마 제게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겁니까? 그럼 제가 잘했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진가의 하인은 상대가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쳤다.
“둘 다 크게 착각하고 있군요. 설마 잊었습니까? 당신들은 지금 독에 중독됐단 걸!”
“!?”
잊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지!?
약초꾼과 장사꾼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순간 둘은 무작정 현석의 말을 따르게 되었고, 이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독에 중독된 것도 잊었다.
휙!
그 순간, 그들을 향해 뭔가가 날아왔다.
“오늘치입니다.”
그건 진천우가 동굴에 들어가기 전, 사흘에 한 번씩 복용하라고 만든 해약이었다.
꿀꺽!
삼살이견이 서둘러 해약을 삼켰다.
현석도 제 몫의 해약을 복용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아까 가리킨 벽을 가리켰다.
“어서 저 벽을 뚫으십시오.”
“그러니까!”
“해약을 먹었다고 바로 힘이 나는 게 아닌데…….”
“제가 힘이 나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끝까지 불평을 늘어놓는 두 사람에게 현석이 충격 선언을 했다.
“방금 드신 해약이 마지막입니다.”
“!?”
“?!”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둘은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바보가 아니었다.
“노, 노, 농담이지?”
아니, 장사꾼은 못 알아들었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대꾸했다.
“…….”
허나 굳이 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
“제길!”
“별수 없군.”
삼살이견은 사정을 알게 되자 급히 몸을 돌렸다.
사흘!
사흘 안에 무너진 동굴에서 진천우를 찾지 못하면 자신들이 죽는다.
‘아니, 사흘이 아니라 하루다.’
무인이 아닌 현석에게는 해약의 효과가 하루뿐.
저놈이 죽으면, 진씨세가의 소가주는 절대 자신들에게 해약을 만들어 주지 않을 터.
그제야 둘은 지금껏 야금야금 쉰 지난 과거를 후회했다.
-아니다!
그때, 약초꾼이 굳은 표정으로 장사꾼에게 전음을 보냈다.
둘은 벌써 십수 년 넘게 함께한 이들.
이제는 눈빛만 봐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장사꾼은 약초꾼이 뭔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이라도!
그 직후, 둘이 동시에 정면의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쾅!
곧바로 요란한 굉음이 터지고,
후두둑!
그 여파로 부서진 파편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누군가의 눈앞에 푸른 현판이 나타났다.
[‘조련사(調鍊師)’의 ‘조련 스킬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주종관계에서 주인은 일방적으로 하인의 스킬 숙련도에 따른 추가 보정을 받습니다.]
[주인의 능력치 일부가 소량 상승합니다.]
* * *
휙!
진천우를 향해 무형의 기운이 날아왔다.
하지만 그에게는 역근경과 화후기식법이 있었다.
설령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각성한 감각이 그것들을 선명히 느끼게 해주었다.
즉, 이것들을 피하는 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피한다 한들, 하늘을 뛰어넘는 일은 여전히 요원하다.’
진천우는 한결같이 하늘을 뛰어넘는 것만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날아오는 무형의 기운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제 힘으로 만들어야 했다.
휘리릭!
그가 대나이신법을 펼쳤다.
눈앞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지만, 거기에 분명 뭔가가 있다.
그 말은 곧.
팟!
그것을 밟고 날아오를 수 있다는 뜻!
진천우가 하늘 높이 비상했다.
허나 그 대가로 금지의 경계에 더욱 깊게 들어가 버렸다.
휘오오오!
경계로 깊이 들어가자, 압박하는 기운이 배로 늘었다.
그런데 늘어난 건 숫자만이 아니었다.
배로 날카롭고, 배로 강해진 기운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큭!”
그 기세가 어찌나 지독한지, 마주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우우웅!
그때 몸속 깊은 곳에서 내공이 움직였다.
천마신공.
각각 발바닥 중앙과 정수리 한가운데서 시작된 전혀 다른 기운이 심장에서 한데 모였다.
우우우웅!!
‘엄청나군.’
백회에서 시작된 금빛용은 소림의 비전인 대환단의 기운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흑의 여인에게 빼앗은 흑호는 황금룡과 비할 수 없이 컸다.
-크르릉!
원래라면 이 녀석이 용을 한입에 집어삼키고 진천우마저 해치워야 하건만…….
-크르르르!
놈은 어째서인지 일부러 힘을 빼 균형을 맞춰주었다.
설마하니 제 원주인을 구해준 은혜를 갚으려는 걸까?
어쨌든, 덕분에 심장을 중심으로 몸 전체에 천마신공의 기운이 뻗어나갔다.
‘이 힘과 금지 경계의 기운을 모두 이용하면!’
진천우가 즉시 다음 걸음을 옮겼다.
휙! 휙!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솟구치는 높이가 배로 늘어났다.
이건 대나이신법조차 뛰어넘는 공능.
정체불명의 경신법인 여덟 걸음이 분명했다.
‘된다!’
진천우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여섯 걸음…….
어느새 땅이 까마득해질 정도로 올라왔다.
그런데도 금지의 경계는, 아니 하늘은 여전히 끝을 모를 만큼 높디높았다.
이제 천마신공의 기운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간신히 한 걸음?
그 한 걸음은 땅으로 내려가는 데 써야 했다.
그렇지 않고 이 높이에서 곤두박질치면 살아날 수 없었다.
‘딱 한 걸음이 모자라다니!’
만약 지금이 일곱 걸음이면,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을 거다.
하지만 아직 여섯 걸음밖에 내딛지 못했다.
남은 한 걸음을 사용해도, 여덟 걸음까지 한 걸음이 부족했다.
진천우가 급히 몸에 남은 기운을 모조리 끌어모았지만, 그리해도 간신히 한 걸음 반에 불과했다.
‘딱 한 걸음이면 되는데…….’
하늘의 끝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가 더는 걸음을 옮기지 않자, 차츰 올라가는 속도가 줄었다.
이대로 아예 올라가는 게 멈추면 이제 떨어질 일만 남았다.
한 걸음, 아니 불과 반걸음 때문에!
뿌득!
분한 마음에 이를 가는데, 느닷없이 푸른 현판이 시야를 가렸다.
“이게 뭔……?!”
이게 무슨 일이지?
하지만 여기 적힌 내용대로라면!
슥.
진천우가 일곱 걸음을 내디뎠다.
또다시 몸이 훌쩍 떠올랐고, 그만큼 가지고 있는 내공이 거의 다 소모되었다.
이대로는 정말 떨어질 일만 남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거기서 다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푸른 현판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힘이 부족한 내공을 대신해주었다.
슥!
그렇게 진천우가 마지막 걸음을 옮겼다.
그저 조용히…….
그저 가만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