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뜻밖의 방문자
(60/210)
60화 : 뜻밖의 방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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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 뜻밖의 방문자
2021.11.17.
“…….”
흑의 여인이 갑자기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소주?”
끽?
뒤따르던 백의 여인과 화후가 걸음을 멈췄다.
위에 뭐라도?
허나 둘은 딱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피식!
‘넘었구나.’
오직 그녀만이 진천우가 하늘을 뛰어넘은 걸 알아차렸다.
이 사실을 일행에게 알릴까?
“가자!”
흑의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간단히 입만 떼면 되는 일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두근!
심장이 뛴다.
이건 녀석이 남긴 적호가 전주인의 성공을 기뻐하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생각 이상으로 놈이 내 마음에 든 건지도 모르겠군.’
그녀는 항상 거침없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제 감정을 드러냈지만,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그것이 단순히 호감인지, 애정인지, 그게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함께하는 게 좋았을까?
“가자.”
아니, 흑의 여인은 금지에 진천우를 두고 떠난 걸 후회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걸로 끝이 아니다.
‘틀림없이 다시 만나겠지.’
반드시 그리될 거다.
설령 그것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 한들, 자신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다시 만나는 그때, 우리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후후!”
흑의 여인이 그 순간을 떠올리며 낮게 웃었다.
“소주?”
평소와 다른 들뜬 웃음에 백의 여인이 의아한 듯 다가왔다.
‘소주께서는 금지를 벗어난 뒤부터 전과 많이 달라지신 듯…….’
전에도 종잡을 수 없었지만, 최근 들어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주인의 변화가 오히려 기뻤다.
과거에 그녀는 오롯이 제 천형을 떨쳐버리기 위해 여념 없었다면, 지금 그녀는 보다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후후후!”
흑의 여인은 얼마간 더 혼자 웃더니,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을 위해 따로 준비해야겠다.”
“네?”
무슨 순간? 무슨 준비?
“이랑.”
“넷!”
참으로 오랜만에 이름이 불리자, 백의 여인은 긴장한 듯 몸을 꼿꼿이 세웠다.
주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땐, 언제나 이의를 용납하지 않는 확고한 명령을 내릴 때뿐이다.
“앞으로 내 반신을 위해 천하를 먹겠다.”
“알겠습니다.”
이랑은 즉답했다.
반신이 뭔지, 천하를 어떤 식으로 먹는지에 대한 의문은 없었다.
그것보다 그녀는 방금 주인의 발언에 크게 흥분한 듯 얼굴을 붉혔다.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중요한 건, 소주께서 천하를 먹겠다고 선언했다는 사실이다.
천하를 집어삼키는 데 참으로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아마도 제 주인이 택할 방법은…….
“우선은 교부터.”
교(敎).
천하를 삼분하는 가장 큰 세력 중 하나.
교를 이루는 가장 미약한 존재인 마졸(魔卒)들조차 세상의 눈에는 잔악하기 그지없는 마두로 불린다.
이들 말이 통하지 않는 마귀를 모조리 수하로 거둘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앞으로 날 소주라 부르지 마라.”
“그러면? 앞으로 뭐라 불러야 합니까?”
주인을 올려다보는 시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숨이 달아올라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드디어!
소주께서, 아니…….
“앞으로는 날 천마(天魔)라 불러라.”
천마(天魔).
하늘까지 닿은 진정한 마(魔).
아니, 하늘조차 거꾸러트릴 지고의 마(魔).
아아, 나의 천마시여!!
비록 지금 교에는 역대 최강으로 불리는 또 다른 천마가 존재하지만, 자신에게 천마는 오직 눈앞의 여인, 그녀뿐이었다.
한편, 방금 막 스스로 천마임을 자칭한 어린 천마(小天魔)는 생각했다.
‘진천우!’
나와 육신을 나눈 나의 반신아!
내가 천하를 집어삼킨 그때에는…….
‘몸뿐만 아니라 천하의 절반까지 네게 안겨주마.’
* * *
“하!”
진천우가 급히 참았던 숨을 토했다.
그는 아직 하늘 위에 떠 있었다.
휘오오!
사방에서 부는 강풍에 몸이 떨렸다.
허나 그것은 단순히 살을 에는 추위와 전신을 짓누르는 압박 때문이 아니었다.
금지의 경계를, 아니 하늘을 뛰어넘었다!
끝내 불가능하리라 여긴 걸 해냈다는 강렬한 희열이 전신을 감쌌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아직…….’
이 근처에 있지 않을까?
고개를 숙이자, 놀랍도록 향상된 감각이 하늘 위에서도 탁 트인 시야를 보여주었다.
당장 천옥산 여기저기를 훑어봤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
무언가를 찾고 두 눈을 치켜떴다.
“다…….”
다?
“다행이다.”
휘리릭!
대나이신법을 사용했다.
푸른 현판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생각보다 많았다.
덕분에 이렇게 원하는 방향으로 몸을 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쾅!!
다소 요란하지만, 무사히 땅에 착지할 수도 있었다.
“뭐, 뭐냐?!”
“운석이라도 떨어졌나?”
진천우가 땅에 떨어지면서 일으킨 흙먼지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둘 다 당황하고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하나는 달랐다.
“소……가주님?”
진씨세가의 충성스러운 하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흙먼지를 뚫고 제 주인을 알아봤다.
“소가주님!”
믿기지 않았다.
반나절 가까이 동굴을 파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온 차에 진천우가 나타나다니!
“세상에! 정말 소가주님이십니까? 몸은?! 몸은 괜찮으십니까?”
현석은 가장 먼저 진천우의 몸에 상처가 없는지부터 살폈다.
다행히 그는 멀쩡했다.
“아아, 하늘이 도왔습니다.”
“그것보다 네 몸부터 살피자꾸나.”
진천우가 다짜고짜 현석의 팔을 낚아챘다.
그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소매 안으로 손을 넣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소매에서 여러 풀뿌리가 나왔다.
모두 금지에서 따온 약초와 독초.
진천우는 도원경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그것들을 조합해, 그 자리에서 괴혈독의 해약을 만들었다.
전에 만든 임시방편 해약이 아닌, 진짜 해약이었다.
“먹거라.”
“네.”
현석은 진천우가 내민 고약한 냄새의 환약을 망설이지 않고 삼켰다.
꿀꺽!
해약은 고약한 냄새와 달리, 입안에 넣자마자 순식간에 녹았다.
잠시 뒤, 몸이 붕 뜨는 부유감이 들더니 곧바로 전신에 기운이 용솟음쳤다.
“소가주님, 이건!?”
놀란 현석이 좋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조차 방금 삼킨 해약이 평범하지 않음을 느꼈다.
제 주인이 어디서 이런 약을 구했을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어째서 이런 걸 제게!”
자신에게 중독된 독을 단번에 해독할 정도의 약이면, 어쩌면 주인의 천형에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진천우는 현석의 생각을 눈치채고, 매섭게 눈알을 부라렸다.
조금 전까지 오늘내일하던 놈이 정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지.
그는 즉시 다른 약초를 조합해 누런 연고를 만들었다.
그걸 바로 현석의 손에 덕지덕지 발랐다.
“크으!”
짓뭉개진 손이 불에 댄 듯 화끈거렸다.
하지만 특제 연고를 발랐으니, 내일쯤이면 새살이 돋고 멀쩡해질 터.
“약의 효과가 돌면서 약간 현기증이 날 거다. 그러니 저쪽에 앉아 잠시 쉬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진천우는 현석이 그늘에 앉힌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 문제의 두 놈이 남았다.
“어떻게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거냐?”
“무너진 동굴에선 어떻게 빠져나왔고?”
삼살이견이 차례로 물었다.
허나 진천우는 그들의 질문에 답할 의무가 없었다.
그에게 굳이 의무가 있다면 하나뿐.
“먹어라.”
진천우가 좀 전에 현석에게 먹인 해약을 내주었다.
둘은 한눈에도 엉성해 보이는 해약을 불안하게 쳐다보았지만, 앞서 진가의 하인이 멀쩡하게 삼키는 걸 봤기에 순순히 약을 먹었다.
화악!
“이 무슨?!”
“내공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약을 먹자, 내공이 아주 조금이지만 전보다 상승했다.
약에 잔뜩 벤 도원경의 기운이 범인인 현석에게는 빠른 회복력을, 무인인 삼살이견에게는 미미한 내공 상승을 가져왔다.
놀란 둘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이런 걸?”
“그리고 왜 우리에게?”
진천우는 이번에도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것보단.
“서둘러 운기조식부터 하는 게 좋을 텐데?”
지금 둘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제야 삼살이견도 진천우의 진의를 깨닫고 즉시 가부좌를 틀었다.
진짜 영약과는 태양과 반딧불 이상의 차이가 나도 영약은 영약.
그 기운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흡수하려면, 평온한 마음으로 내공심법을 운용하는 게 최선이었다.
둘은 너무 놀란 나머지, 정말 아무 준비도 없이 심법을 운공했다.
만일 진천우가 조금이라도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생전 처음 영약을 먹은 삼살이견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
다행히 진천우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지 얌전히 물러났다.
되레 둘을 위해 호법까지 서주었다.
물론 호법도, 영약도 공짜가 아니었다.
‘어찌 된 영문일까?’
진천우가 삼살이견과 현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잠시 못 본 동안 이들 사이의 호감도가 대폭 올랐다.
[삼살이견의 호감도 +1000]
분명 자신은 놈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영약에, 호법까지 서며 엄청난 호감도를 얻었음에도.
[현재 삼살이견과 가장 호감도가 높은 이는 ‘현석’입니다.]
‘대체…….’
지난 며칠, 자신의 하인이 이 둘을 어떻게 굽고 삶았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뭐, 그건 나중에 따로 물어보면 알겠지.’
비록 호감도에서 뒤처졌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어쨌든 내 호감도와 현석의 호감도 덕에 이것들이 배신할 걱정은 없겠군.’
사실 삼살이견이 자신과 현석 중 누굴 따르든 무슨 상관인가.
“현석아.”
“네, 소가주님!”
“떠날 채비를 하자.”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어차피 현석이 내 사람인 이상, 저것들도 내 것인 것을.
꿈틀!
현석이 짐을 챙기고, 삼살이견이 운기조식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또 다른 제 것이 어깨 위로 올라왔다.
“잘 지냈느냐?”
진천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휙!
그런데 어째 녀석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꿈틀!
뭐랄까?
화난 듯?
어째서?
꿈틀꿈틀!
독고가 진천우의 어깨 위에서 계속 몸을 떨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아니, 제 주인이 다소 늦게 나타날 건 이미 각오했다.
그것보다 녀석이 화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슥!
독고는 마치 개처럼 주인의 목덜미에 몸을 갖다 대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애벌레한테 표정이라니.’
그러나 달리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게다가 녀석은 정말 사람이 화를 내듯, 몸을 붉게 물들이기까지 했다.
진천우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다, 뒤늦게 독고가 왜 화를 내는지 깨달았다.
‘설마!’
놀랍게도 녀석은 제 몸에 희미하게 남은 화후의 냄새를 맡은 모양.
황당하게도 독고는 마치 바람피운 남편을 타박하는 조강지처처럼, 어깨 위에서 폴짝폴짝 몸을 띄우고 목에 쿵쿵 머리를 박았다.
덕분에 그는 현석이 짐을 전부 챙길 동안 계속 진땀을 뺐다.
녀석은 입으로 하얀 실을 뿜어 진천우의 몸에 얕게 두른 뒤에야 진정했다.
‘영역 표시 같은 건가?’
독고의 실은 말도 안 되게 가늘어서, 따로 역근경이나 화후기식법을 운용하지 않으면 몸에 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이만큼 튼튼한 실은 언제든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독고는 그렇게 진천우를 자신을 실로 칭칭 두른 뒤에야 진정하고 다시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현석이 짐을 챙기는 것도, 삼살이견이 운기조식을 마치는 것도 동시에 끝났다.
“가자.”
가자!
드디어 갈 수 있다.
“진씨세가로!”
“넷!”
그렇게 잠시 산보나 하겠다며 집 밖을 나선 두 주종은 새로운 종, 아니 개 두 마리와 함께 돌아왔다.
“아니?!”
그런데 며칠 만에 돌아온 진씨세가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문자가 있었다.
‘왜 하필 저자가!’
과거에는 가장 만나고 싶은 이였으나, 지금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