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어쭙잖은 실력
(61/210)
61화 : 어쭙잖은 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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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 어쭙잖은 실력
2021.11.20.
“자네인가?”
“?”
처음에는 상대가 누군지 몰랐다.
초면이니까.
적어도 이 정도 장신에, 칠흑처럼 검고 윤기 나는 수염을 가진 인상적인 중년인을 기억에서 잊었을 리는 없었다.
“……?”
허나.
“……!”
설령 초면이어도 한눈에 상대가 누군지 알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진 공자!”
미염(美髥)의 중년인 뒤로 드디어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를 보기 전부터, 진천우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뒤였다.
‘그렇게나…….’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이.
자신뿐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아니 진씨세가의 모든 이들이 그를 보고 싶어 했다.
얼마나,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꿈속에서도 그를 몇 번이나 만났었다.
“때마침 여기서 만나는군요. 안 그래도 저희도 막 진가에 도착한 참입니다.”
아는 얼굴이 곧바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자신이 아주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엄청난 쾌거였다.
설마 자신이 이분을 진씨세가로 모셔올 줄 몰랐으니까.
이번에 진씨세가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맹의 지부에 들렀다.
거기서 우연히 그를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마디 부탁했을 뿐인데, 설마 직접 발걸음을 옮겨주다니!
‘덕분에 진 공자에게 받은 빛 중 일부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
백풍대 제 구십구(九十九)대 대주 백청강이 그 자리에서 동행을 소개했다.
“이분은…….”
자신이 꿈속에서조차 만나고 싶어 한 사람.
그뿐 아니라, 진가의 모든 이들이 반드시 만나길 희망한 이.
진천우는 선 채로 꿈꾸는 게 아는 게 싶은 몽롱한 얼굴로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와중에 백풍대주의 소개가 이어졌다.
“……로 유명한 바로 그 학수선의십니다.”
학수선의(學修仙醫).
인세의 것이 아닌, 신선에게 의술을 전수받았다는 당대 제일의원.
너무나 뛰어난 유명세에 장 의원 같은 숱한 사기꾼이 그 이름을 팔았다.
하지만 진천우는 눈앞의 중년인이 진짜임을 확신했다.
딱히 함께 온 백풍대주의 보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등장하기 전부터 자신은 학수선의의 정체를 꿰뚫었다.
‘진짜다!’
진천우가 익힌 의선의 의술과 독괴의 독술이 눈앞의 중년인에게 반응했다.
각자 그 분야의 전설과 다름없는 기예들이 동시에 반응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굳이 더 떠들 필요가 없었다.
사실 바로 그랬기에…….
“흐음……!”
갑자기 학수선의가 앞으로 한 발 다가왔다.
이에 놀란 진천우가 크게 놀라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덥석!
허나 그는 상대가 물러날 틈을 주지 않고 느닷없이 팔을 붙잡았다.
당장 이 손을 뿌리쳐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한번 손을 붙잡힌 이상, 이제 와 뿌리친다 해도 소용없음을 알았다.
‘이래서 당장은 이자를 절대 보고 싶지 않았는데…….’
학수선의는 과거에 그가 가장 만나고 싶은 이였지만, 지금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이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자네, 절맥이군.”
‘역시!’
당대 제일명의.
그는 가볍게 진천우의 맥을 붙잡는 것만으로, 이전까지 수많은 의원이 몇 날 며칠에 걸쳐 간신히 알아낸 그의 절맥을 알아챘다.
거기다 그는.
[외부에서 당신을 탐지하려는 시도를 발견했습니다.]
[스킬 ‘은폐’가 실패합니다.]
놀랍게도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단숨에 타이쿤의 은폐를 꿰뚫어버렸다.
사실 이전에도 흑의 여인에 의해 은폐 스킬이 무효화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크게 달랐다.
그녀의 경우, 그저 내공의 유무와 따로 익힌 무공 등 어디까지나 무인의 시선에서 피아 확인에 그치며 끝났지만, 학수선의는 무인이 아니라 의원이었다.
“허?!”
검디검은 눈썹이 세차게 물결쳤다.
누구보다 환자를 속속들이 알아보는 게 의원의 속성.
학수선의 역시 이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누구보다 뛰어난 그였기에, 어떤 의원보다 더욱 철저히 진천우의 상세를 알아냈다.
“이 무슨!!”
그가 한 호흡을 크게 숨을 내쉬더니 매우 침통하게, 매우 안타깝게, 그러면서 매우 흥미롭다는 얼굴로 입을 뗐다.
“자네, 정말 재밌는 상황에 빠진 모양이군.”
역시나 이자는 한눈에 진천우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
* * *
‘큰일이군.’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크게 철렁했다.
자신에게는 절대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었다.
‘천마신공을 익힌 걸 맹에 들키면 안 되는데.’
천마신공만이 아니었다.
소림 무공인 금강공과 다른 무공을 익힌 것도, 또 소림의 비보인 대환단과 전설의 영단인 화후의 내단을 삼킨 것도 전부 철저히 숨겨야 했다.
이를 들키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문까지 풍비박산이 날 게 자명했다.
“우선 이것부터 받게.”
한참 이를 어떻게 숨겨야 할지 고민하던 중, 학수선의가 뭔가를 건넸다.
‘이건?’
새끼손톱 크기의 검은 단약.
왜 이걸 나에게?
“뭘 멀뚱멀뚱 보고 있나? 먹게.”
그는 대뜸 약부터 먹으라 권했다.
모든 의원이 이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학수선의라면 그럴 자격이 있었다.
“오!”
동행한 백풍대주도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난번 진천우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어렵게 학수선의를 진씨세가로 모셨다.
첫 대면에 다짜고짜 진단부터 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에게 진맥 받는 기회는 천금보다 귀했다.
거기다 학수선의가 직접 단약까지 건네다니!
“소가주님!”
뒤늦게 현석도 백풍대주에게 중년인의 정체를 들고 눈을 반짝였다.
저 단약을 먹으면, 그간 제 주인을 괴롭힌 천형을 물리칠지도 몰랐으니까.
“흠…….”
허나 진천우는 단약을 바로 삼키지 않고 뜸을 들였다.
학수선의가 내준 단약이라니.
의술을 익힌 그에게 이만큼 탐구심을 자극하는 건 없었다.
‘일단 특별한 냄새는 안 나는군.’
무향(無香).
애초에 향이 강한 약초를 배합한 단약에 향이 없다는 건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굳이 따지면 쓸데없는 수고지. 차라리 독을 만들었다면 또 몰라도…….’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의원인 동시에 독괴의 맥을 이은 독인인 그였기에 할 수 있는 의심.
그러나 학수선의가 뭣 하러 독을 주겠는가?
“뭐 하는가? 어서 삼키래도?”
이때, 진천우가 계속 단약을 들고 머뭇거리자 학수선의가 한마디 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면 괜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터.
‘어쩔 수 없군.’
조심스럽게 손에 든 단약을 삼켰다.
“음……!”
그는 단약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향만 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맛도 없군.’
무미(無味)에 무취(無臭)의 단약이라.
알면 알수록 약보다는 독에 가까운 특징이 아닌가?
꿀꺽!
다행히 단약을 삼킨 뒤에도 타이쿤의 경고는 없었다.
‘애초에 독괴의 전진을 이은 내게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 않겠지만.’
하지만 상대는 당대 제일의원.
만일 그가 정말 독을 내줬다면 절대 평범한 독일 리 없었다.
학수선의가 약을 삼킨 진천우를 보며 한마디 했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아?’
아무리 몸을 살펴도 어떤 약효도 발휘되지 않았는데?
‘설마하니 이자 또한 장 의원과 마찬가지로 사기꾼인가?’
앞서 그가 학수선의라 확신했음에도, 수상쩍은 환약을 삼킨 다음부터 자꾸 의심이 들었다.
그만큼 이전에 사기꾼 장 의원에게 겪은 수모에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그 확신이란 것도 자기 멋대로 정했을 뿐, 따로 상대의 진짜 실력을 본 것도 아니었다.
“잠시 함께 걷겠나?”
그때 학수선의가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
진천우는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다.
“그러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말 당대 제일의 의원인지, 내 눈으로 직접 밝혀내면 그만!’
진천우가 먼저 걸음을 옮기는 학수선의의 뒤통수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 * *
학수선의는 굳이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진씨세가의 담을 따라 가볍게 한 바퀴 돌자고 제안했다.
현석과 백풍대주는 따로 떼어놓았다.
어째서인지 그는 진천우와 둘만 걷기를 원했다.
-저분이 학수선의가 확실하냐고? 물론이지!
혹시 몰라 백풍대주에게 다시 확인했지만, 그는 중년인이 진짜 학수선의임을 강하게 주장했다.
-자네 사정을 모르지 않네. 장가 놈, 그러니까 가짜 학수선의에게 계속 속아왔으니 그런 의심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저분은 틀림없는 진짜라네. 하나부터 열까지 행동에 조심하게나.
백풍대주는 곧바로 몇 번이나 학수선의에게 태도를 조심하라 신신당부했다.
이는 그가 맹에서 중요한 요직을 맡았기 때문도 있지만, 이 기회에 제대로 잘 보여 적당한 영약이나 그게 아니면 따로 진맥이라도 한 번 더 받으라는 나름의 깊은 배려였다.
“이건 녹담이군.”
학수선의가 걷다 말고 잠시 옆으로 새더니, 짙푸른 넝쿨 한 뿌리를 꺾었다.
“호, 이건 황귀신인가? 저건 또 철쭉잎인데?”
그 뒤에도 그는 누런 잡초와 푸른 관목 가지를 차례로 꺾었다.
‘뭐 하는 거지?’
진천우가 되도록 의심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했다.
‘내 앞에서 약초를 꺾으면서, 자신이 진짜 의원이란 걸 보일 생각인가?’
괜찮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건 방금 채취한 녹담과 황귀신, 철쭉잎이 정말 약초일 때의 일.
진천우가 약초 도감과 독괴록의 내용을 떠올렸다.
‘셋 모두 아주 희미하게 약초의 성분을 지녔지만.’
그 효과가 너무 미미해, 약초도감에서조차 약초가 아닌 잡초로 분류하고 있었다.
애초에 깊은 산기슭도 아니고, 하루에도 수십 명이 드나드는 길가에 괜찮은 약초가 자생할 리 없었다.
“?!”
그런데 우연찮게 정말 괜찮은 약초가 저 앞에 보였다.
‘저건 월담초(月潭草)?’
오른쪽으로 꺾이는 길 한쪽에 외롭게 홀로 핀 푸른 꽃.
틀림없이 월담초의 꽃잎이었다.
월담초는 공기 좋고 물 좋은 심산유곡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귀한 약초로, 그 약효도 만능이라 할 만큼 다양했다.
‘저런 게 어째서 가문 외벽에서 자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날짐승에게 뜯긴 듯, 본래 싱그러운 푸른빛을 자랑해야 할 꽃잎이 절반 넘게 뜯겨있었다.
자신도 역근경으로 상승한 오감이 아니었다면 놓칠 뻔했다.
‘오히려 잘됐군.’
아무리 잘 숨겨져 있다 해도, 눈앞의 중년인이 정말 당대 최고의원이라면 월담초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
진천우는 일부러 걸음을 서둘렀다.
슥!
그가 먼저 모퉁이를 지나면, 과연 뒤따라오는 학수선의는 월담초를 알아챌까?
만일 그가 월담초를 알아채는 진짜 학수선의라면…….
자신은 위험을 숨기기 위해 그를 피해야 할까? 그게 아니면, 제 천형을 치료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에게 진맥을 받아야 할까?
“…….”
진천우가 학수선의가 뒤따라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슥!
이제 월담초까지 불과 세 걸음.
슥!
두 걸음.
슥!
마침내 한 걸음.
“자네…….”
그런데 학수선의가 단 한 걸음을 남겨두고 갑자기 말을 걸었다.
슥!
그 직후, 그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바로 옆에 보이는 월담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러면 저자가 가짜 학수선의인지 밝힐 수 없었다.
헌데 그는 진천우가 속으로 분개할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방금 삼킨 약이 효과가 없지?”
“네?”
이건 뭐지?
“보통은 말이야……. 내가 준 약이라 하면, 설령 개똥을 비벼 줬어도 그 학수선의가 내준 약이라며 효과를 보이기 마련이거든.”
“무슨?!”
지금 이 작자가 무슨 헛소리를 해대는 거지!?
진천우가 몸속 깊은 곳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역함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껏 내가 겪은 바로, 내 약이 안 통하는 이는 두 부류뿐이거든. 하나는 태어나 단 한 번도 내 명성을 접하지 못한 시골 무지렁이이거나…….”
부글부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역함이 심해졌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입을 벌려 속을 게워내려 했는데.
화악!
“억!?”
갑자기 몸속 깊숙이에서 정체 모를 기운이 용솟음쳤다.
진천우가 야생마같이 거센 그것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학수선의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면, 어디서 어쭙잖게 의술을 배운 멍청이 정도지.”
“내 의술이 어쭙잖다고?”
“아무렴. 감히 그까짓 수준으로 내 의술을 의심하다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학수선의가 곧바로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손끝이 조금 전, 진천우가 발견한 월담초를 가리켰다.
“네놈의 머릿속에는 무조건 저런 약재만이 귀하다고 여길 테지. 그리 배웠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네놈에게는 방금까지 무시한 녹담, 황귀신, 철쭉잎이 가장 절실하단 것도 몰랐더냐!”
“그 무슨!”
“그것도 모르니까 멍청하다고 하는 거다!”
다른 이도 아닌, 의선의 의술을 익힌 진천우였기에 학수선의의 야멸찬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 충격이 너무나 커 심마(心魔)마저 들 무렵, 학수선의는 곧장 그의 입에 방금 뜯은 잡초 한 무더기를 집어넣었다.
“옜다. 이게 지금 네놈에게 가장 필요한 약재다!”
과연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앞에 푸른 현판이 나타날 리 없었다.
[천하제일 의원에게 쓰디쓴 독강을 경청하였습니다.]
[스킬 ‘약학(藥學)’을 습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