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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 약팔이 (75/210)


75화 : 약팔이
2021.12.22.


뜻밖에 소매치기 스킬을 익힌 것도 놀라운데,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하오문식?”

진천우는 본디 무림인이 아니라서 무림 상식에 어두웠다.

그런 그조차 모를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하오문(下午門)이었다.

‘하오문은 도둑, 기녀, 점소이 등 무림의 가장 약한 자들로 이뤄진 전설의 집단으로 알고 있는데?’

왜 전설로 불리냐면, 숭산에 떡하니 본전을 둔 소림과 달리 하오문은 어디까지나 풍문으로만 떠도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하오문이 정말 실존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물론 가장 놀라운 건, 그 하오문의 기술 중 하나가 방금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

‘하지만…….’

진천우가 조심스럽게 제 손을 바라보았다.

새 스킬을 얻은 건 좋다.

이는 매우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필 범죄행위라는 게 문제였다.

‘의술과 달리 함부로 쓸 수 없는 스킬이군.’

타인의 물건을 훔치는 건 누가 뭐래도 나쁜 짓이다.

게다가 그 처벌도 가볍지 않았다.

허나 진천우가 눈살을 찌푸린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소매치기 스킬은 나와 너무 궁합이 잘 맞는다.’

굳이 써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손끝의 감각을 중시하는 소매치기 스킬은 감각을 극대화하는 역근경과 화후기식법의 최고 상성이었다.

여기에 의안까지 가미되면?

그 효능을 제대로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장담하건대 자신은 열 중 아홉, 백 중 아흔아홉에게 들키지 않고 물건을 훔쳐 올 수 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열 중 하나, 그리고 백 중 하나지.’

모든 걸 끝없이 의심해야 하며, 언제나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잊지 마라.

진천우는 타이쿤을 통해 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 스킬은 정말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는 몇 번이나 각오를 다지며 손을 소매에 넣었다.

어쨌든 심상치 않은 스킬을 얻었다.

비록 그 대가로 돈주머니를 잃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진천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을 입구로 돌아가 학수선의 일행을 찾았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일행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객잔을 들어가 쉬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마을 입구 근처에 남아있었다.

‘날 기다린 건가?’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허?”

진천우는 일행을 보고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

“자, 오세요! 오세요! 모두 구경하러 오세요!”

순간 잘못 봤나 싶었다.

하지만 저 붉은 가면은 틀림없이 학수선의가 이 마을에 들르자마자 산 관우 가면이었다.

그 옆에 검은 쥐 가면을 쓴 다섯도 체격을 보아하니 신의를 따르는 다섯 의원이 분명했다.

헌데 저들이 지금 무엇 하고 있느냐?

“네, 여기 아주 진귀한 물건이 있습니다. 모두 구경하세요!”

“하하하!”

진천우가 그들이 하는 우스운 작태에 그만 웃음을 흘렸다.

세상에!

당대 제일 의원으로 불리는 학수선의와 어디에 내놔도 명의 소리를 들을 다섯 의원이 길 한복판에 좌판을 깔고 장사할 줄 누가 알았으랴!

심지어 그들이 지금 파는 건!

“여기 이 붉은 약 하나 먹어봐! 비 오는 날이면 쿡쿡 쑤시던 관절이 말끔해져! 또 이 푸른 약을 먹어봐! 머리 아픈 게 싹 사라져! 이 노란 약은 또 무엇이냐? 이거 한 알이면 속 쓰림, 배 아픈 게 몽땅 날아가!”

약(藥)!

약이었다!

아니, 의원이 약 파는 게 뭐가 어떻냐 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이때 아니면 이런 약, 어디에도 못 구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약장수는 좀…….’

학수선의의 구성진 가락이 사방에 퍼지자, 어디 이야기꾼이라도 온 줄 안 마을 아이들이 좌판 쪽으로 모였다.

그러자 신의가 양손을 크게 휘저으며 애들을 쫓았다.

“어허! 애들은 가라! 여기에 너희 줄 약은 없다. 아니, 어서 가래도! 너희처럼 건강한 아이에게는 이런 약이 필요 없다니까!”

그 직후, 학수선의가 멀찍이 물러나 있는 중년인을 손으로 불렀다.

‘백풍대주?’

틀림없다.

노란 바탕에 눈과 입 주위를 검게 칠한 조조의 장수 중 하나인 전위 가면을 썼지만, 진천우의 눈썰미는 피할 수 없었다.

백풍대주는 신의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지만,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좌판 앞으로 불려갔다.

“이 약 한번 먹어봐!”

“네?”

“글쎄 먹어보라니까.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부쩍 기운이 허하고, 머리가 복잡하지 않았어?”

“확실히 그랬습니다만?”

“그럴 때는 이 녹색 약과 푸른 약이 최고지!”

학수선의가 좌판 위에 놓인 녹색과 푸른 약을 하나씩 집어 앞으로 내밀었다.

“자!”

“네……. 알겠습니다.”

누가 주는 약인데 거절할까.

백풍대주가 그 자리에서 약을 삼켰다.

그러고 잠시 뒤, 놀랄 일이 벌어졌다.

“어?”

그가 가볍게 몸을 한 번 털더니.

“이럴 수가!”

곧바로 환호를 질렀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기운이 샘솟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생긴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믿기지 않았다.

몇 달째 자신을 은근히 괴롭혔던 게 겨우 약 두 알로?

“대, 대단하십니다!”

백풍대주가 진심을 담아 학수선의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의 감사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그냥 짜고 치는 연기 같았다.

웅성웅성!

그래도 확실히 효과가 있어, 구경꾼이 점점 더 몰렸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신의가 이 이상 사람을 모으기 위해 수작을 꾸몄다.

“그래, 이제 몸은 괜찮고?”

“어디 괜찮을 뿐이겠습니까. 온몸에 기운이 넘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습니다.”

“날아갈 필요까지는 없고, 대신 이거나 해보게.”

“이건?”

백풍대주가 다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학수선의가 신호를 보내자, 옆에 있던 산적 의원이 커다란 통나무 토막을 가져와 그 앞에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가져온 까닭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걸 부숴보게.”

설마 차력(借力)을 선보이란 건가?

“아니, 굳이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어허, 약빨이 잘 듣는지 내 꼭 확인해야겠으니, 어서 해보라니까.”

“그게…….”

그는 진심으로 하기 싫었지만, 거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학수선의가 지은 약을 먹고 그 효과를 직접 확인하겠다는데 어찌 감히 거절하겠는가.

“합!”

백풍대주가 짧은 기합과 함께 수도로 통나무를 내리쳤다.

쩌적! 쩌저적!

그 커다란 통나무가 잘 익은 참외처럼 반으로 갈라져 새하얀 속살을 보였다.

와아아!!

이를 본 구경꾼들의 큰 함성이 터트렸다.

결국 백풍대주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우와아아!!

그런데 경공을 써 달아난 까닭에, 그것마저 또 다른 구경거리가 되었다.

“보셨습니까! 저게 이 약의 힘입니다. 이 약을 먹으면 당신도 건강해지고, 행복해지고, 웃을 수 있고, 살도 빠지고, 체구도 커지고, 예뻐지고, 잘생겨지는 데다 저렇게 빨리 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 효과는 대단했다!!

우르르!

곧장 사람들이 좌판을 향해 달려갔다.

“약! 약 파시오!”

“나도 약을 사겠소!”

“잠깐! 여기서 나보다 허리 요통이 심한 사람 있어? 내가 제일 급하니까 나한테 먼저 약을 파시오!”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다.

허나 놀랍게도 학수선의와 다섯 의원은 이런 데 익숙한 듯, 곧장 사람들을 줄 세우고 약을 팔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냥 파는 게 아니었다.

“어허, 그쪽한테 붉은 약은 필요 없는데?”

“녹색 약이요? 아닙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푸른 약입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이를 지켜보던 진천우가 입을 쩍 벌렸다.

‘지금 저 난리통에 진료까지 하는 건가?’

단순한 진료만 하는 거면 이렇게나 놀라진 않을 거다.

허나 지금은 가면 축제 기간.

즉, 약을 사러 몰려온 손님들은 전부 얼굴에 가면으로 가렸다.

다섯 의원은 상대의 얼굴도 못 본 채로, 오직 손목의 맥만 짚어 진료했다.

아무리 이들이 뛰어난 명의지만, 맥만으로 완벽하게 진료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그들이 지금 하는 건 정식 진료가 아닌 약팔이였다.

단순히 대략적인 체질만 읽고 그에 적합한 약을 골라주기에는 맥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저런 식의 훈련을 평소에도 쌓아두면, 정말 급한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테지.’

그랬다.

저게 바로 학수선의의 가르침이었다.

누구보다 실전적 의술.

이를 위해서는 설령 약장수 흉내라도 얼마든지 감수했다.

‘아니지. 지금 신의께서 파는 건 애초에 약장수 따위가 파는 저급한 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니.’

진천우는 먼발치에서도 약의 대단함을 알아차렸다.

‘당귀, 쑥, 진귀, 다래…….’

전부 들과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로만 만든 거지만, 그래서 더 대단했다.

그것들을 어떻게, 얼마나 정성껏 조제했기에, 이름난 명산이나 깊은 산중계곡이 아니면 절대 채취할 수 없는 귀한 약재로 만든 약조차 뛰어넘는 약향이 풍기는 걸까?

진천우의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였다.

그도 의원이다.

어찌 저걸 보고 얌전히 있을 수 있으랴!

“네놈!”

그때, 한참 약팔이 중인 학수선의가 진천우를 발견했다.

“너는 우리가 이렇게 바쁜 게 보이지 않더냐! 당장 와서 거들지 못할까!”

“예!”

그 말만 기다렸다.

진천우가 바로 좌판을 향해 달려갔다.

웅성웅성!

“당신 뭐야!”

“여기 줄 안 보여? 어딜 새치기하려고!”

“약 내놔! 약!!”

하지만 좌판 주위에 인파가 너무 두터웠다.

“잠깐, 난 약을 사러 온 게 아니고…….”

“약 사러 온 게 아니라고? 그럼 여기 왜 온 건데?”

“어디서 되도 않는 수작을! 그리고 정말 약 사러 온 게 아니면 당장 꺼져! 안 그래도 복잡하니까!”

“맞아. 어서 사라져!”

되레 그들은 진천우를 손으로 밀치며 내쫓았다.

‘어쩌지?’

그냥 뚫을까?

내공을 지닌 그는, 그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슥!

그런데 진천우가 잠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하는 중, 시야 구석에서 매우 불편한 장면을 발견했다.

‘저놈?’

정확히는 저 아이.

처음 마을 입구에서 만났던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인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것뿐이라면 무엇이 불편하겠는가.

진천우가 주목한 건 아이의 손이었다.

스윽!

꼬마의 손이 바로 앞에 선 중년인의 허리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허리 요대에 묶인 주머니를 향했다.

소매치기!

허나 일견하기로 아이의 솜씨는 앞서 제 주머니를 훔친 놈에 비하면 미천하기 짝이 없었다.

‘하오문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소매치기인가?’

살짝 화가 났다.

아이의 솜씨가 너무나 보잘것없어서인 것도 있지만, 하필 그 아이가 훔치려는 게 방금 막 학수선의가 판 약이었다.

‘어디 의원 앞에서 약을 훔치려 들어!’

저 약은 다섯 의원이 진단 끝에 내준 거라, 다른 사람이 먹으면 큰 효과가 없었다.

슥!

결국 진천우가 나섰다.

그가 제대로 실력을 선보이자, 앞을 가로막은 인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륵! 스르륵!

오히려 그 인파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는 신들린 은잠술은 마치 진천우가 뛰어난 대도(大盜)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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