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받고 하루 더!
(89/210)
89화 : 받고 하루 더!
(89/210)
89화 : 받고 하루 더!
2022.01.24.
“네놈이 의당의 책임자라니!”
“말도 안 된다!”
제갈세형을 따르는 무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 수밖에.
의당은 맹에서 아주 특수한 위치다.
분명 맹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각 지부에 따로 건물이 세워져 있고, 또 해마다 거액의 활동자금마저 주어졌다.
모두 당대 제일 의원인 학수선의를 끌어들이기 위한 맹의 고육책.
여기서 문제는, 현재 의당이 가진 큰 권한을 온전히 부리는 게 정확히는 학수선의가 아니라 의당의 대표라는 점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의당의 대표는 학수선의였다.
그런데 방금 진천우가 자신을 의당 대표라 선언했다.
‘혹시나 이후 신의가 맹을 떠날 때, 꿩 대신 닭이라도 낚을 생각으로 만든 규칙을 이렇게 써먹다니.’
그러니까 이 규칙은 학수선의 아래의 다섯 의원을 노린 것.
헌데 엉뚱한 미꾸라지가 튀어나와, 맹의 고위층이 쌓아놓은 대계(大計)를 엉망진창으로 헝클어트렸다.
“그쪽 분들이 뭐라 하든, 제가 현재 의당의 책임자라는 건 명명백백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천우가 제갈세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 진천우를 내려다봤지만, 어느새 눈높이가 동등해졌다.
“크흠!”
제갈세형은 한껏 불편해하면서도 이를 인정했다.
‘지금은 네놈이 의당의 대표라고 인정해주지.’
그래서 뭐?
설마 학수선의처럼 맹의 장로와 동격의 대우를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럴 이유도, 마음도, 심지어 필요조차 없었다.
맹은 학수선의 역시 그 신기에 가까운 뛰어난 의술이 사라지면, 언제든지 그 자리에서 떨어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애송이에게 어찌 그 같은 대우를 해주겠는가.
진천우도 의당의 대표 자리가 자신에게는 허울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허울도 시기적절하게 쓰면 꽤 실속을 차릴 수 있지.’
“그럼 백풍대주님과 정철 대협께서는 이대로 후발대에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뭐라?”
“사실 저와 관련된 문제가 해결된 이상, 저 두 분이 후발대에 참가할 이유는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나왔나?
그러나 제갈세형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 말대로군. 하지만 이 후발대는 지금 강호에 큰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련의 움직임을 막기 위한 중요한 조치라네. 천하의 안녕을 위해 저들이 두 팔 걷고 나서주는 게 옳은 일이 아니겠나?”
“크흠!”
“그건…….”
백풍대주와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세형은 협을 움직이는 방법을 너무 잘 알았다.
천하를 위해! 혹은 힘없는 누군가를 위해!
이 말 몇 마디면, 반드시 협은 동조한다.
그러나 협을 움직일 줄 아는 건 그만이 아니었다.
“옳은 말씀! 하지만 저 두 분은 저와 함께 학수선의 님을 찾는 게 더 좋다고 생각됩니다. 신의께서는 당대 제일 의원. 혹시나 그분께 영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천하에 온갖 병환으로 고생하는 힘없는 환자에게 얼마나 큰 절망을 안겨주겠습니까?”
“허!”
설마 진천우가 이리 나올 줄 몰랐던 제갈세형은 당황한 나머지 연신 헛기침을 뿜었다.
강건한 맹의 무인과 힘없는 병자라니.
도저히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으려고 했으나, 그보다 한발 먼저 진천우가 쐐기를 박았다.
“두 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비록 학수선의 님과 정식으로 사제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마음속 깊이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는바. 사실 이런 거짓된 사제 관계에 두 분을 끌어드리는 건 예가 아닌 줄 압니다만, 제게는 두 분 외에 따로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당했다!
‘설마 사제의 연을 들이밀 줄이야.’
무림인은 유독 사제 간의 관계에 엄격했다.
이는 그만큼 사부를 모시고 제자를 위하는 걸 중히 여긴다는 건데, 그 정도가 심할 때는 아예 사제 관계를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 이상으로 여겼다.
‘더군다나 일부러 제대로 사제의 연을 맺지 않은 점을 강요하다니.’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으면 어디서 되도 않는 거짓부렁이냐고 꼬집을 수 있지만, 저렇게 먼저 밝히면 오히려 그만큼 애틋한 관계로 보이지 않는가?
“큭!”
실제로 지부의 무인 중 누군가는 남몰래 소매로 눈을 훔치기도 했다.
당장 그를 향해 한소리 외치고 싶었다.
‘속지 마!!’
하지만 그리 말하다 자칫 잘못하면, 도리어 이쪽으로 역풍이 불어올 수도 있었다.
제갈세형이 다시 한번 확신했다.
‘이놈은 정말 학수선의의 사람이구나.’
뱃속에 시커먼 능구렁이라도 하나 집어넣은 것 같은 저 수려한 언변.
그야말로 제갈세가의 뛰어난 지모조차 농락한, 한 마리의 간사한 의원 그 자체였다.
처음 학수선의를 만날 당시에도 도대체 무슨 의원이 저리 세 치 혀를 잘 놀리는지 감탄했지만, 이놈도 만만치 않았다.
“진 공자!”
“공자!!”
백풍대주와 정철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진천우의 손을 붙잡았다.
이걸로 결정 났다.
저 둘은 후발대를 나와 학수선의를 찾는 걸 우선할 것이다.
만일 제갈세형이 지부장의 권한을 억지로 들이밀면 한 명 정도는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리되면 지부와 개방 혹은 백풍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안 그래도 련이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보인 이때, 그같이 멍청한 짓은 제갈가의 한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
“후!”
결국 그는 회유를 포기하고 후발대만이라도 완전하게 준비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또 다시 진천우가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조금 전 지부장님이 말씀하셨듯, 천하의 안정 또한 대단히 중요한 일임을 저도 동의합니다. 천하가 불안하면 결국 신의께서 돌봐야 할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테니까요.”
‘저놈이?!’
설마 의원이라서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도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지?
제갈세형이 자신의 뒤에서는 못 보고 오직 진천우만 볼 수 있는 각도로 한껏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려 명문 제갈세가의 큰 어른이자, 맹의 지부장까지 맡은 이에게 저런 무서운 시선을 받으면 겁을 먹을 법도 한데.
씩!
진천우는 오히려 그를 보고 한껏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상태로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학수선의께서는 원래 맹의 선발대와 합류하기 위해 떠났으니,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 경로가 후발대와 같겠지요. 어쩌면 그분이 사라진 이유도 후발대의 목적과 일치할지도 모릅니다.”
씨익!
점점 더 높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며, 제갈세형의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니 만일 지부와 후발대에서 저와 두 분께 조금의 편의를 봐주시면, 기꺼이 가는 중간까지 후발대와 함께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둘을 데리고 후발대에 들어가 주면 뭘 줄래?
‘하! 썩을 놈! 완전 학수선의보다 더한 놈이지 않은가!?’
제갈세형이 어이없어하여 고개를 위로 들었다.
내려다보던 상대가 어느새 저 하늘까지 솟구쳐 버렸다.
씨이익!
그러자 진천우가 더욱 입꼬리가 짙게 비틀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 * *
진천우는 정면에 보이는 마차에 발을 올렸다.
슥!
성인 한 명이 올라탔는데도 마차에서는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작은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차 내부는 무척 크고 높고 또 안락했다.
이 마차는 학수선의가 지부를 떠날 때 이용했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
‘역시 사람은 출세하고 볼 일이군.’
“소가주님?”
진천우가 잠시 감격에 겨워하는데, 안에 먼저 타고 있던 하인이 그를 불렀다.
현석은 접객당에서 진천우를 기다리며 날을 세우다 갑자기 들이닥친 맹의 무인들에게 강제로 마차에 태워졌다.
안 그래도 불안하던 차에, 드디어 익숙한 얼굴과 마주하니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소가주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진천우가 그간 일을 간략히 알려주었다.
“세상에!”
당연히 지부에서 대기하는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후발대와 동행한다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하신 겁니까?”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아이고!”
현석이 죽을상을 썼다.
그 모습을 보니 진천우도 조금은 미안해졌다.
“꼭 가야 합니까?”
가야 한다.
백풍대주와 정철에게 사제 관계를 운운한 건 완전히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학수선의가 어찌 되었는지 알고 싶었고, 그러려면 백풍대주나 정철과의 동행보다 지부의 후발대와의 동행이 더욱 안전했다.
“그래.”
주인의 단호한 대답에 하인은 입을 다물었다.
일단 현석을 맹에 두고 올 수는 없었다.
어쩌다 제갈세형과 그리 좋지 않은 관계를 쌓은 탓에, 이곳에 현석을 두고 갔다간 무슨 일을 생길지 몰랐다.
안 그래도 녀석은 인질로 가치가 너무 컸다.
진천우에게는 지난 십수 년간 제 수발을 들어준 현석보다 소중한 이는 없었다.
물론 련의 무인들이 나타났다는 장소까지 현석을 데려갈 생각도 없었다.
‘적당한 중간지점에 녀석을 내리고 기다리게 해야겠다.’
연신 불안해하는 현석을 보니 그 생각이 굳어졌다.
“큰일이네요. 행여 제가 거기서 소가주님의 발목이라도 붙잡으면 안 되는데…….”
응?
“그곳에 가는 건 무섭지 않으냐?”
“당연히 무섭지요!”
현석이 드물게 진천우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어찌 그 위험한 곳에 소가주님을 혼자 보냅니까? 오히려 전 그게 더 걱정됩니다!”
굳었던 생각이 산산조각났다.
아무래도 중간에 내려놓고 간다고 하면,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진천우가 가볍게 웃으며 현석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걱정 말거라. 가는 동안 네가 꼭 도와줘야 할 일이 있으니.”
“네? 어떤?”
슥!
그때 마차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정철이었다.
그는 곧 후발대가 출발한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후발대 대장은 화룡도객 종일이 맡는다는군. 그는 신중한 성격에 무공도 출중하니 충분히 믿고 따를 만하네.”
“혹시 저와 지부장 간의 일 때문에 그분과 불편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없을까요?”
진천우가 걱정되는 바를 솔직히 밝혔다.
정철이 그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런 걱정은 말게. 맹의 지부장 자리를 맡은 이가 어찌 공과 사도 구분 못 할까.”
이미 선발대가 당했다.
그런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내는 후발대에 어설픈 사심을 집어넣는다?
그 순간 제갈세형은 맹의 지부장 자격은 물론이고, 명문 제갈세가의 이름마저 잃는다.
제갈세가의 지모가 천하에 으뜸으로 꼽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에 정철 대협이 있다고 들었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오, 종일 대협!”
조금 전 이야기한 화룡도객이 마차 앞으로 찾아왔다.
거칠게 풀어헤친 무복 차림과 사방으로 뻗은 머리칼은 한 마리 사나운 맹수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거친 외모와 다르게 진천우와 정철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건넸다.
“이번에 지휘를 맡은 종일이오. 출발하기 전에 댁들 얼굴이나 보러 왔소이다.”
당연히 그냥 얼굴이나 보려고 온 건 아니었다.
화룡도객은 정철과 진천우 그리고 마차 안의 현석까지 확인한 후, 천천히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미안하지만 두 분은 마차에서 내려줘야겠소. 바로 둘이 탈 말을 준비하지.”
다시 말하지만, 선발대가 당했다.
한가롭게 마차를 타며 이동할 상황이 아니란 뜻.
그는 한시라도 빨리 현장에 도착하길 원했다.
그러려면 마차는 물론이고, 무공도 모르는 하인 역시 포기해야 했다.
“그렇군요.”
진천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종일 대협께서는 며칠 내로 현장에 도착할 생각이십니까?”
“이틀.”
사흘거리를 이틀로 줄인다.
꽤나 강행군을 하겠다는 소리.
“그럼 마차를 버리는 건 안 되겠습니다.”
“뭐?”
진천우가 고개를 젓자, 화룡도객이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기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는 후발대의 책임자였다.
정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의당의 대표고 뭐고 버리고 갈 생각이었다.
설령 뛰어난 고수인 정철과 백풍대주를 함께 포기하게 되어도 말이다.
‘지휘 계통을 무너트리는 고수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
허나 진천우가 납득하지 못한 건, 지휘 계통도 뭣도 아닌 화룡도객이 줄이겠다는 기간이었다.
그가 한껏 입꼬리를 비틀며 한 손을 들었다.
“원래는 사흘거리였죠?”
손가락 세 개가 펴졌다.
슥!
“그걸 이틀로.”
하나가 접혀 두 개만 남았다.
화룡도객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뭘 하겠단 거지?
그 직후, 진천우의 남은 둘 중 하나를 또 접었다.
잠깐, 설마?
“마차와 현석이 있으면 하루 만에 갈 수 있습니다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