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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 현석아! (96/210)


96화 : 현석아!
2022.02.09.


쾅!!

귀를 찢는 굉음이 쉬지 않고 울렸다.

진천우가 발동시킨 함정은 하나였지만, 곧바로 주위 다른 함정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게다가, 터진 건 함정만이 아니었다.

쉬익! 스르륵!

곳곳에 붉고 검은 연무가 퍼졌다.

“이건 독?”

휙!

가장 먼저 독을 알아챈 정철에게 손톱 크기의 환단이 날아왔다.

“바로 씹어 삼키세요.”

진천우가 즉시 해독제를 분배했다.

물론 가장 먼저 해독제를 삼킨 건 현석이었다.

쾅!!

마지막 폭발이 끝나자 사방이 시커먼 흙먼지로 뒤덮였다.

“…….”

진천우는 말없이 정면을 노려보았다.

혹시나 기척을 놓치지 않을지, 그의 눈빛이 사뭇 날카로웠다.

시간이 지나고, 여전히 눈앞에 흙먼지가 자욱했지만 특별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해치웠나?”

후발대 무인 중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 말을 꺼낸 순간!

챙!

백풍대주가 급히 검을 휘둘렀다.

갑작스레 날아온 검은 비수.

끝까지 경계하지 않았다면 저 비수에 누군가 당했으리라.

스륵!

잠시 뒤, 먼지가 완전히 걷히며 놈들이 모습을 보였다.

만박자와 련의 무인들.

“하!”

“대단하군.”

화룡도객과 정철이 순수하게 놀람과 감탄을 동시에 표했다.

그만한 폭발과 독에도 멀쩡하다니.

“후우!”

하지만 붉은 피풍의를 두른 만박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폭발의 여파를 줄이느라 진법을 사용했다.

그 덕에 자신의 진법이 완전히 박살 났다.

‘일이 이리될 줄 몰랐는데.’

만일 알았다면 좀 더 준비했을 텐데…….

그러나 현자는 미리 준비하는 자를 말했다.

준비가 부족하다는 핑계는 스스로 현자가 아니라고 실토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지금 가진 것만으로 눈앞의 놈들을 모조리 도륙 내야 한다.

이는 어렵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휘이잉! 펑!!

설사 하늘로 갑자기 오색 불꽃이 솟구친다 해도.

“만박자, 다 끝났다!”

조금 전 오색 불꽃을 쏜 흰 죽통을 손에 든 채 화룡도객이 소리쳤다.

‘지금까지는 진법에 막혀 쓸 수 없었지만, 진법이 사라진 지금은 꺼릴 게 없다.’

그는 바로 흰 죽통의 진짜 용도를 말해 만박자를 압박할 요량이었으나.

“신호탄인가요?”

상대는 단번에 그 용도를 알아챘다.

아니, 만박자는 앞서 화룡도객과 대치했을 때 벌써 눈치챘었다.

“설마 이제 곧 지부의 무인들이 이리로 들이닥칠 거란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가 한없이 정중한 어투로, 그러나 아주 야멸차게 화룡도객의 비장의 수를 깎아내렸다.

“그쪽이 여기 도착한 지 반나절이 됐습니까? 한 시진이 됐습니까? 그런데도 곧장 뒤따라온 지원부대가 있다는 소리를 우리가 믿을 것 같습니까?”

“…….”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화룡도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뭐라 입을 떼고 싶은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가 입을 열면 열수록 만박자에게 밀릴 건 자명했다.

아쉽게도 이 자리에서 만박자와 설전을 나눌 만큼 뛰어난 언변은 지닌 이는.

“허나 상대는 그 제갈세형이지.”

진천우가 유일했다.

한마디.

“…….”

단 한마디로 만박자가 입을 다물었다.

쩍!

더불어 그의 굳은 불신에도 미세한 실금을 새겼다.

이건 진천우의 뛰어난 언변 덕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만박자의 머릿속에 맹의 인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 제갈세형이라면…….’

제갈세형은 비록 용이나 봉은 아니나 능구렁이 정도는 되는 작자다.

적어도 지자(智者)들의 도원경으로 이름 높은 제갈세가에서 능히 한 축을 담당할 실력자.

결코, 쉬이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부와 여기까지 거리를 생각하면…….”

“그쪽도 내가 만든 환단을 봤을 텐데?”

“그걸 당신이……?!”

만박자의 가는 눈썹이 파리하게 떨렸다.

그는 후발대 무인이 위급할 때마다 복용하던 정체불명의 환단을 기억했다.

확실히 그런 게 있으면, 여기서 지부까지 거리를 확연히 줄일 수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련을 위해 저 위험 분자는 반드시 여기서 제거해야 한다.’

만박자의 두 눈에 서늘한 한기가 맺혔다.

설령 정말 지원군이 오는 중이라 해도, 그들이 여기까지 들이닥치기 전에 먼저 쓸어버리면 된다.

어차피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조금 더 어려워진 것 외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

“…….”

이 사실을 분명 저자도 알 텐데…….

진천우는 만박자의 앞에서 정말 침착하게,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서 있었다.

만박자 정도 되면, 약간의 대화와 그때 표정과 눈빛만으로 상대의 생각을 읽는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게 읽히지 않았다.

[스킬 ‘은폐’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타이쿤 스킬이, 그리고 지부에 들르기 전 하오문 장로와의 승부가 진천우를 살렸다.

“…….”

또 그는 여기서 극도로 말을 아꼈다.

조금이라도 만박자에게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

‘그만한 사람에게는 침묵조차 백 마디 말을 섞은 것 이상의 논의가 된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침묵도 논의가 된다면 당연히.

[스킬 ‘언변’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어떤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언변 스킬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킬 ‘은폐’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스킬 ‘은폐’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스킬 ‘은폐’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

그것도 쉬지 않고.

진천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숙련도가 오르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틀림없이 지원부대는 근처에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을 터.

그리고 그들은 틀림없이 조금 전에 하늘로 쏜 신호를 보았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그들이 빨리 달려와도 만박자가 작심하고 공격해 결과는 내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는 점인데.’

어떻게든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했다.

슥!

그때, 만박자가 손을 들었다.

‘온다!’

막아야 한다.

정말 목숨 걸고.

진천우가 곧바로 현석을 등 뒤에 숨기고, 언제든 공격할 수 있게 자세를 취했다.

저 손이 아래로 떨어지면, 그 즉시 만박자의 지휘를 받는 련의 무인과 후발대가 부딪칠 터.

“음?!”

휙! 펑!

그런데 만박자의 손이 미처 다 내려가기 전에 저 뒤편 하늘에 붉은 불꽃 하나가 떠올랐다.

흰 죽통의 오색 불꽃에 비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신호.

하지만 이를 본 만박자의 반응은 오색 불꽃 때와 비할 수 없었다.

진천우가 함정 한곳에 모아 폭발시켰을 때도, 세 치 혀로 그의 의표를 찔렀을 때조차 보이지 않은 심각한 표정.

“…….”

그는 아주 잠시 어두운 하늘을 흐르는 피처럼 붉게 물들이는 불꽃을 바라보더니.

“쯧! 운이 좋군요.”

정말 생각지도 않게 스스로 먼저 등을 돌려 물러나기 시작했다.

저 신호를 무시하면 자신은 죽는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그렇지만, 누가 안심해도 좋다고 했습니까?”

팟!

그러나 등을 돌리며 내뱉은 짧은 한마디에 련의 무인들이 곧바로 몸을 날렸다.

“이런!”

확실히 몇몇은 만박자가 등을 돌리는 걸 보고 안심했었다.

“핫!”

그러나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백풍대주와 정철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이 둘이 달려들자 련의 무인들은 곧바로 셋으로 나눴다.

챙챙챙!

남은 여섯 중 둘이 백풍대주와 정철을 상대하자 넷이 남았다.

“어딜 감히!”

다행히 앞의 둘이 한 호흡 시간을 끈 동안, 화룡도객이 서둘러 수하들을 모았다.

‘만박자는?’

그 와중에 그는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를 잊지 않았다.

‘없다.’

만박자가 사라졌다.

그는 정말 물러난 게 맞았다.

그렇담 이 습격은 자신이 도망칠 시간을 끌기 위함인가?

퍽! 퍼억!

그 순간, 전방에서 느닷없는 파열음이 터졌다.

“미친!”

그 정체를 확인한 화룡도객이 분노를 터트렸다.

어쩐지 백풍대주와 정철에게 몇 수나 떨어지면서 무슨 생각으로 홀로 달려갔나 했더니.

“련의 지독함은 진작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놈들은 죽기 직전,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삼켰다.

그라자 곧바로 온몸이 부풀더니 그대로 터져버렸다.

무인인 그들은 사방에 살점과 피가 튀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허나 그 살점과 피에 정체불명의 극독이 녹아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크흠!”

“이런!”

순식간에 백풍대주와 정철의 낯빛이 검게 변했다.

다행히 그들에게는 진천우가 준 환단이 있었지만, 이대로는 당장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남은 련의 무인들도 소매에서 정체불명의 환약을 꺼냈다.

“모두 흩어져라!”

퍽! 퍼억! 퍽!

화룡도객의 지시는 재빨랐지만, 그것이 무색하게 놈들은 시간 차를 두고 흩어져 폭사했다.

“크악!”

“컥!”

“빌어먹을!”

사방에 독이 녹은 살점과 피가 흩어졌다.

“썩을!”

선두에 섰던 화룡도객도 독을 뒤집어썼다.

아니, 그는 마지막까지 수하들의 앞을 막느라 가장 심하게 중독되었다.

화룡도객이 서둘러 소매에서 마지막 남은 환단을 꺼내 씹었다.

“……!”

희미해진 시야가 빠르게 회복되는 순간, 그는 보았다.

아직 련의 무인 중 한 놈이 폭사하지 않고 남아있음을.

그놈이 하필이면, 절벽 끝으로 피신한 진씨세가의 하인을 향해 달려갔다.

“안 돼!”

급한 마음에 중독된 것도 잊고 목이 터지라 외쳤다.

그러나 소리만으로 칼을 든 무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푹!

놈의 매서운 칼을 막을 수 있는 건, 똑같이 날 선 칼뿐.

“소가주님!”

진천우의 소도가 련의 무인의 등을 찔렀다.

또 그는 소도를 쥐지 않은 손에 검은 환약을 움켜쥐었다.

하오문의 장로조차 턴 소매치기 기술이 그 짧은 순간, 놈의 폭사를 막았다.

“큭!”

비장의 수가 실패한 탓일까?

정확히 심장을 찔린 련의 무인이 허탈한 숨을 뱉었다.

그런데 놈의 다음 말이 심상치 않았다.

“정확히 만박자 님의 예상대로군.”

“뭐?”

팡!

그때, 갑자기 발밑에서 함정이 튀어나왔다.

왜 여기서 함정이?

굳이 답은 필요 없었다.

만박자가 진법이 완전히 박살 나기 전에 함정 하나를 급히 이곳으로 옮긴 게 분명했다.

으득!

거기다 련의 무인은 빼앗긴 환약이 아닌, 어금니 안쪽에 숨긴 또 다른 환약을 깨물었다.

진천우는 놈의 몸이 빠르게 부푸는 걸 보고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아직 저쪽에 현석이 있다.

녀석이 간신히 제 쪽으로 날아오는 함정을 피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두 발로 땅에 설 자격을 잃었다.

이대로면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현석아!”

팟!

진천우가 급히 몸을 날렸다.

대나이신법의 쾌속함이면 녀석의 떨어지기 전에 붙잡을 수 있다.

퍽! 후두둑!

비록 등에 극독이 녹은 살점을 뒤집어썼지만, 그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잡을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붙잡는다!

진천우가 더욱 걸음을 서둘렀다.

백풍대주와 정철조차 잠시 몸을 추슬러야 했던 극독을 맞고도 상승 신법을 쉬지 않고 쓰자 독이 더욱 빨리 퍼졌다.

‘이까짓 거!’

그래, 겨우 이까짓 거!

진천우는 여전히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현석의 생각은 달랐다.

‘안 됩니다!’

누가 보기에도 정상이 아닌 주인의 혈색.

그 상태로 자신을 구하겠다고 저리 무리하다니.

‘게다가 설령 이대로 제 손을 붙잡으셔도.’

저리 지친 몸으로 자신을 위로 끌어 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틀림없이 함께 떨어질 터.

그리되면…… 그리되면…….

‘그럴 바에는!’

이때, 두 주종(主從)의 눈이 일치했다.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서?

둘은 눈빛만으로 상대의 마음을 읽었다.

‘안 돼!’

진천우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결코 독 때문이 아니었다.

팟!

그는 마치 강궁으로 쏜 화살처럼 빠르게 앞으로 몸을 뻗었다.

허나 화살이 아무리 빨라도, 사람의 말보다 빠를 순 없는 법.

“안 돼!”

“멈춰!!”

처연한 외침과 그것보다 더욱 처연한 명령이 동시에 터졌다.

[‘조련사’가 ‘조련 스킬’을 사용합니다.]

-멈춰!

현석의 처음으로 진천우에게 한 명령.

본래 그 둘은 주종관계로 묶인 사이.

하인은 절대 주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명령이라기보단, 제 목숨마저 건 녀석의 충심 어린 희생.

멈칫!

그 순간, 등에 독을 뒤집어쓰고도 절대 멈추지 않았던 진천우의 발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만큼 현석의 충심은 금강석처럼 단단했다.

“웃기지…….”

허나 진천우의 마음 역시 단단하기로는 지지 않는다.

“웃기지 마라!!”

챙!

그 직후, 몸을 옭아매던 무형의 족쇄가 산산이 부서졌다.

곧바로 다시 몸을 날렸다.

덥석!

진천우가 앞으로 뻗은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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