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엇갈린 운명 (1)
(98/210)
98화 : 엇갈린 운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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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 엇갈린 운명 (1)
2022.02.14.
“그러니까…….”
낚싯대를 짊어진 사내가 물고기 대신 낚인 사내를 앞에 앉혀놓고 물었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네.”
“정말 아무것도? 이름도? 나이도? 자신이 뭘 했는지도?”
“네.”
“그럼 왜 저 격류에 떠밀려왔는지도 모르겠네?”
“네, 그렇습니다.”
“허, 거참!”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별달리 뾰족한 수도 없다.
‘이놈이 내게 거짓말할 이유도 없을 테니.’
둘은 오늘 처음 보는 사이.
하필 그가 이 늦은 시각에 뜬금없이 낚싯대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때 마침 이 남자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계곡에 빠져 흘러들어오지 않았다면, 둘이 만난 일은 결단코 없었다.
그야말로 천고에 몇 없을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산물.
“거참!”
그러한 귀한 산물을 사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연신 헛기침만 했다.
이 와중에 물에서 건져진 남자는 아까부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뭔가가…… 아주 중요한 뭔가가…… 머릿속에서 떠오를 듯 말 듯…….
“지…….”
“응?”
“지…… 지…….”
“뭔가 떠오르는 게 있나?”
슥!
남자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지금 아주 중요한 게 떠오르려고 하니 옆에서 부산떨지 말고 조용히 해달라는 뜻.
‘이놈이?!’
이를 본 낚시꾼 사내가 표정이 묘해졌다.
확실히 예(禮)에 어긋난 태도.
그러나 얼마나 다급하면 저러는지 이해는 갔다.
게다가 지금 이마의 미간을 깊게 모으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정말 다급해 보였다.
아마 자신도 제가 손을 올렸다는 걸 깨닫지 못한 게 분명했다.
이를 두고 따지는 것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예(禮)에 어긋나는 일.
하지만 사내가 묘한 표정을 지은 건,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거참, 내게 감히 저런 손짓을 보이는 놈을 본 게 얼마만이지?’
그는 뜬금없이 이 상황에서 아주 오래된 추억을 회상했다.
겨우 손을 내밀어 말 좀 잘라먹었다고 회상에 빠지다니.
이 사내도 평범한 자가 아닌 건 분명했다.
“지…… 그래, 진!”
그때, 남자가 드디어 뭔가를 떠올린 듯 소리를 질렀다.
“진?”
“네, 진! 그러니까 진! 아주 중요한, 정말 중요한 진! 진……!!”
그렇게 남자가 간신히 제 머릿속에 가장 깊게 각인된 기억을 떠올리려던 찰나!
“큭!”
갑작스러운 복통과 함께 앞으로 꼬꾸라졌다.
“…….”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되자, 일부러 회상도 그만두고 남자의 말을 기다린 낚시꾼 사내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뭐야?”
참으로 당황스럽다.
마치 뒷간에 갔다가 중간에 억지로 끊고 나온 기분.
스륵!
땅에 꼬꾸라진 남자의 몸에서 피가 배어났다.
하긴, 저 거친 물살에 이리저리 떠밀려 온 자였다.
외공의 고수가 아니고서야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일단 따로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군.’
사내가 가볍게 남자의 몸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 몸이 너무 좋아. 손에 제법 굳은살은 박인 것 같지만, 그건 무공을 익혀서가 아니라 마치 하인처럼 궂은일을 해서 얻은 건데…….’
대충 눈대중으로 살핀 건데도 놀랍도록 정확했다.
그래서 사내는 자신의 관찰 결과에 더 신기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공을 익히는 데 적합한 골격이지?”
농담이 아니고, 정말 꽤나 좋은 골격이었다.
아마 나이만 어렸다면, 소림이나 무당 등 소위 명문이란 곳에서도 눈독을 들일 정도로.
‘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
당연한 말이지만, 무슨 학문이든 어릴 때 익힐수록 그 성취가 빠르고 단단해진다.
딱 보아도 이 자는 진작에 약관을 넘긴 나이.
이때부터는 아무리 몸이 좋아도, 대성하기 힘들다.
물론 말도 안 되게 좋은 무공을 익히거나, 말도 안 되는 강한 의지만 있다면 그것도 극복하겠지만, 세상에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는 이는 많아도 정말 강철같이 굳건한 의지를 지닌 이는 한 손 가득 쥔 모래 중 불과 한두 톨뿐인 게 냉혹한 현실이었다.
“쿨럭!”
스르륵!
아차, 상념이 너무 깊었다.
쓰러진 사내가 다시 괴롭게 기침했고, 몸에 밴 피가 점점 더 짙어졌다.
‘어쩌지?’
고민되었다.
사실 이대로 남자를 놔두고 가도 큰 문제는 없다.
어차피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타인이고, 애초에 그는 그리 호인도 아니었다.
게다가 어쩌면 쓰러진 남자의 지인이 이 근방을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게 누구든 지금 당장 찾거나, 찾아도 상당한 의술이 없으면 이 자는 죽겠지.’
과연 그 두 개의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힘들어 보이는데?
심지어 이 자는 아까 관찰한 바로 그저 평범한 하인이다.
어디 유력 가문의 후계자도 아닌 자를 그렇게 열성적으로 찾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럼 어쩔까?
슥!
사내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쓰러진 남자를 낚싯대와 함께 제 어깨에 들쳐메었다.
건장한 성인 남성에 심지어 옷에 물을 잔뜩 먹어 말도 안 되게 무거울 텐데도, 사내는 무슨 가벼운 봇짐 들듯 한 손으로 가뿐하게 들었다.
“이 녀석, 정말 운이 좋군.”
그래, 나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넌 정말 운이 좋다.
게다가 때마침 이 사내가 곧 만날 자가 있는데, 그는 무려!
“아주아주 뛰어난 의원이거든.”
그자에게 던져주면 되겠지.
비록 그 의원과는 좋은 일로 만날 예정이 아니기에 상당히 분위기가 험악할 예정이지만, 설마하니 의원이 환자를 거부할까?
팟!
그 직후, 사내와 그의 어깨에 짊어진 남자의 모습이 눈 깜짝 사이에 사라졌다.
……
정말로 순식간에.
콰콰콰콰!!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있던 장소에는 그 어떤 사람이 서 있던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저 시끄러운 물소리만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그 뒤, 대략 일각 정도 지나자.
“여기도 없습니다!”
“여기도? 큰일 났군. 여기서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럼 정말 하류 끝까지 흘러갔다는 소리인데, 거참!”
현석이 떨어진 절벽에서부터 빠르게 아래를 훑어 내려가던 지부의 지원부대원들이 그곳을 살피다, 결국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만 했다.
* * *
“오셨소?”
낚시꾼 사내가 동굴 앞에서 손님을 맞았다.
날이 여전히 어두운 걸 보니, 낚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니, 실은 동굴에 돌아와 물고기 대신 낚은 사내를 눕히고 얼마 안 돼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그렇구려. 한 삼 년 만입니까?”
분위기는 좋았다.
알고 보니 손님은 의원으로, 삼 년 전 사내의 몸을 살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둘은 얼마 동안, 당시 치료가 좋았다느니, 그때 조제한 약이 참 맛났다더니, 혹 또 몸을 살펴줄 수 없냐느니 따위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대로 물러나 주실 수 없으십니까?”
그러다 갑자기 의원이 본심을 꺼냈다.
“왜?”
의원의 물음이 짧은 답으로 돌아왔다.
왜?
말 그대로.
왜 내가 물러나야 하지?
사내는 평범한 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가 한번 나서면 반드시 뭔가가 일어난다.
뭔가가 일어나지 않으면, 뭔가를 일으켜서라도.
아마 자신이 이렇게 몸을 움직인 게 삼 년 만인가?
“정확히 의원님께서 내 몸을 살핀 뒤군.”
그때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그러니 딱 그 정도 깽판은 쳐야지.
“아니지. 사람은 향상심이 있어야지.”
그래, 딱 그때의 두 배면 되겠군.
안 그래도 삼 년이면 한 명의 사내가 배로 성장하기에 딱 좋은 기간이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의원이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의원는 어디 가서 절대 쉽게 고개 숙이는 사람이 아니다.
이를 알고도 의원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삼 년 전 일을 생각해서라도.”
“그때 진료비는 부족하지 않게 치렀던 거로 아는데?”
그랬다.
자신은 분명 삼 년 전에 확실히 값을 치렀다.
만일 의원이 그때 일을 빌미로 걸고 넘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게다가 겨우 그런 말이나 하자고 내 앞에 서슴없이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 역시 당시의 진료비에 포함돼 있단 걸 알아야지.”
겨우 대면하는 것에도 값을 매긴다.
언뜻 듣기로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 말을 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 불평을 제기하지 않았다.
둘 다 그게 맞다고 인정하기 때문.
그만큼 사내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의원이 눈앞의 사내를 설득하려면, 반드시 상대의 신분에 부족하지 않은 진심을 보여야 했다.
슥!
의원이 고개에 이어, 또 다른 것을 숙이려 했다.
세상에!
당대 제일 의원으로 불리는 학수선의가 먼저 무릎을 꿇다니.
그는 무림맹주 앞에서도 고개 숙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휙!
학수선의의 무릎이 막 땅에 닿으려는 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하하, 농이었소!”
눈앞의 사내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도 설마 상대가 이리 진지하게 나설 줄 몰랐다.
그냥 근처 맹의 지부 한두 개만 박살 내고 말 생각인데, 신의가 왜 이리 진지하게 나오는 걸까?
그는 학수선의가 여기서 가장 가까운 지부에 제 사람을 남기고 온 줄 몰랐다.
“아무튼, 우리끼리 그간 쌓은 정(情)이 있는데, 신의를 겨우 이런 일로 무릎 꿇릴 수 있나!”
물론 크게 마음 쓴 말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사내가 직접 움직인 이상 삼 년 전보다 배의 성과를 내야 했다.
그런데 이미 그만한 성과를 낸 뒤였다.
아마 그게 아니었으면, 신의가 제 앞에 무릎을 꿇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겠지.
사내는 이미 충분한 성과를 거뒀고, 그 성과는 저 동굴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아주 기분이 좋았다.
쓸데없이 물고기 대신 낚은 남자를 치료해줄 정도로.
다만, 그 남자를 치료하느라 이미 상당한 자비를 베푼 탓에, 아무 대가 없이 학수선의의 부탁을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도통 이해하기 힘든 기준이지만, 원래 그는 모든 걸 제 마음대로 정했다.
그리고 사내는 충분히 그럴 자격을 갖췄다.
“어디 보자, 그래도 내 면이 있어 신의의 부탁을 마냥 들어주기는 힘들겠소. 그러니 뭔가 조건을 걸어야 할 텐데, 뭐가 좋을까? 그래, 신의가 맹을 떠나는 게 어떻소?”
어처구니가 없는 조건.
현재 맹에서 장로와 동격의 대우를 받는 학수선의에게 그 관계를 모두 끊으라니.
적어도 이 자리에서 쉽게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학수선의는 너무나 간단히 이를 수락했다.
아니, 그는 오히려 속으로 안도의 한숨까지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건이 너무 좋았다.
‘그가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군.’
도대체 이 사내는 누구길래 학수선의가 이리도 긴장하는 걸까?
“하하하! 좋군. 좋아!”
신의가 제가 내민 조건을 흔쾌히 수락하자, 사내의 기분은 더욱 하늘을 찔렀다.
그는 이것으로 용건이 끝났다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방금 이상한 놈을 하나 주웠는데. 신의가 그걸 좀 데려가 주겠소?”
마치 길 가다 주운 동물을 떠맡기는 듯한 태도.
실제로도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환자입니까?”
“매우 특이한 환자요.”
학수선의는 가급적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지만, 환자를 돌보는 건 의원의 해야 할 당연한 일이다.
신의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바로 몸을 돌렸다.
번쩍!
“음?”
그런데 그가 몸을 돌리자마자, 동굴에서 느닷없이 붉은 불빛이 터졌다.
일단은 그것뿐이다.
매우 눈부신 빛이지만, 굉음은 없고 폭발도 없었다.
학수선의도 그 빛을 기이하게 여겼지만, 눈앞의 상대가 상대다 보니 별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
그러나 그 빛을 바라보는 사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저 빛은?!’
마침 신의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사내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들켰을 테니까.
그리고 학수선의는 그 표정을 보고 겁에 질렸을 게 분명했다.
‘어째서?’
그는 저 빛의 정체를 잘 알았다.
잘 알기에 더 믿기지 않고,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려 자신이 직접 나서야만 했던 일.
그 덕에 간신히 회수한 보물.
그게 왜 갑자기 동굴 안에서 빛을 내뿜는 거지?
그것도 홀로…… 아니, 혼자가 아니다!
‘그놈!!’
팟!
사내가 뒤도 보지 않고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