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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 엇갈린 운명 (2) (99/210)


99화 : 엇갈린 운명 (2)
2022.02.16.


“으윽!”

눈을 떴다.

“여긴?”

낯선 천장.

아니, 그냥 동굴 천장이었다.

“크흑!”

몸을 일으키니 통증이 엄습했다.

그래도 맨몸은 아니었다.

제대로 금창약과 헝겊을 감싸두었다.

비록 투박하지만, 가장 필요한 부위는 감싸둔 걸 보면 의원이 아닌 무림인의 조치였다.

물론 남자는 그 같은 걸 몰랐다.

그뿐 아니라 제 이름도, 출신도, 그리고 가장 소중한 무언가도.

두런두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때 준 약은 참 맛있었지.

약이 맛있어?

뭔가 이상한 이야기지만, 누가 저 말을 하는지는 알았다.

자신을 낚은 사람.

청년은 아니고, 그렇다고 중년도 아닌 그 중간.

그리고 꽤 호탕해 보이면서도 의외로 속이 좁은 것 같기도, 너그러운 것 같으면서도 살짝 무서운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내가 은인에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평가를.’

하긴, 오늘 이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그런 주제에 벌써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도 우습고, 무엇보다 상대는 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저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거로 족했다.

그렇게 잠시 마음을 놓으려는 데 뜻밖의 말이 들었다.

-신의는…….

“음?”

신의(神醫).

사실 그리 신기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가슴에서 뭔가가 꿈틀댔다.

물론 그것보다 더 그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단어는 따로 있었다.

“진…….”

쿵!

제대로 된 것도 아닌, 그저 앞글자만 읊었을 뿐인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단어를 완성시켜야 한다.

그래야 내 기억이 돌아온다.

그런데 조금 전에 들은 신의는, 미완성의 단어만 못하지만 틀림없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

“……!”

게다가 희미하게 들리는 상대의 음성.

자신을 낚은 사내가 아닌 또 다른 이의 음성이 조금이지만 귀에 익었다.

예상하기로 자신과 그리 깊은 관계는 아니지만, 안면 정도는 있는 사이가 아닐까?

“큭!”

남자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뒤로 쓰러졌다.

스윽!

또 배에서 피가 배어났다.

아직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

절대 안정을 취한 채, 반드시 의원이 손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크윽!”

스르륵!

간신히 막아둔 상처에서 피가 더 빨리, 더 넓게 배어났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하필 동굴 입구까지 한 번 꺾어져 있었다.

일단 모퉁이까지 기어가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이나 내밀 수 있었다.

목소리를 내면 좋겠지만, 아까부터 목이 막혀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때, 밖에서 그 기척을 눈치챈 이가 있었다.

‘호?’

물고기 대신 사람을 낚은 사내는 자신의 월척이 벌써 정신 차린 걸 보고 살짝 놀랬다.

‘그 상태로 모퉁이까지 기어 오겠다고?’

왜 굳이 그런 무리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뿐.

‘재밌겠군.’

슥!

사내는 즉시 동굴 입구에 얕은 기막을 펼쳤다.

그 기막은 얕고 은밀해서, 바로 앞에 서 있는 학수선의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기막은 동굴 안의 상황을 모조리 숨겼다.

혹시나 뒤늦게 신의가 동굴 안의 남자를 발견하고 구하겠다고 달려갈까 봐 한 조치였다.

일단 남자가 모퉁이 너머까지 기어 오면 신의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크윽!”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움직일수록 옆구리에서 피가 배어나면서도 그는 팔을! 다리를! 결코 멈추지 않고 옆으로 기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어느새 모퉁이까지 절반 남았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정말 힘들었지만, 딱 여기까지 들인 노력만큼 더 하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고지가 바로 눈앞.

-하하, 농이었소!

모퉁이 너머에 자신을 구해준 사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상대의 목소리도.

역시 들을수록 귀에 익은 목소리.

분명 날 아는 상대다.

적어도 전혀 무관하진 않을 터.

‘저기까지만 기어가면…….’

내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수 있다!

남자가 각오를 다지고 더욱 힘을 내려는데…….

반짝!

“?”

때마침 동굴 안쪽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뭐지?’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눈에 힘을 주자,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검?’

그것도 상당히 정교한 세공이 들어간 화려한 은색 검.

맹세컨대 남자는 저런 검을 처음 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근!

그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그것도 신의란 단어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아직 다 떠올리지 않은 미완성의 단어를 생각했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어, 어떡해야 하지?’

남자는 고민했다.

이제 조금만 더 기어가면, 모퉁이가 나온다.

거기에 신의가 있다.

자신을 구해주는 건 물론, 어쩌면 잊어버린 기억까지 찾아 줄.

그걸 아는데.

그걸 알면서도.

두근두근!

계속 심장이 동굴 속의 검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도대체 저 검이 뭐길래?

“큭!”

주륵!

이제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싸구려 금창약으로 막은 상처가 완전히 터졌다.

서둘러 의원에게 모습을 보여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허나 그걸 알면서도.

슥!

남자는 몸을 돌렸다.

다시 동굴 속으로 기어갔다.

기껏 여기까지 와놓고서, 고지를 코앞에 두고.

그는 조금의 아쉬움 없이 몸을 돌렸다.

‘응?’

동굴 밖에서 이를 눈치챈 사내가 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그는 의원이 아니었기에, 저깟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범인이 저만한 상처로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사내는 알지 못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뭐가 어찌 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가 죽든 말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뭐, 일단 학수선의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살아남으면, 네놈을 신의에게 넘겨주도록 하지.’

그렇게 정한 사내는 이후부터 남자에 대해 신경을 끊었다.

어차피 동굴 속에 다친 채 홀로 있는 놈이 무언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헉! 헉!”

그렇게 남자는 이제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동굴에서 홀로 기었다.

주륵! 주르륵!

몸에서 홀러나온 피가 바닥을 긴 선을 그렸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주르륵!

드디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검이 보인다.

은색 검은 동굴 벽 구석에 무언가에 감싼 채 내팽개쳐 있었다.

주륵!

‘조금만…….’

주르륵!

‘조금만 더…….’

남자가 정말 젖먹던 힘까지 모두 발휘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부르르!

이제 온몸이 거센 경련이 시작됐고, 시야도 침침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주르르륵!

그 덕분에 그는…… 마침내!

‘됐다!’

휙!

손을 앞으로 뻗었다.

아니, 그건 뻗었다기보단 떨궜다는 표현이 옳았다.

결국, 마지막 힘까지 모두 쏟아부은 남자는 이제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대중으로 거기 있으리라 여기는 쪽으로 손을 떨궜다.

철컥!

하필 그 손이 은색 검을 비껴갔다.

이제 남자에게는 다시 손을 들 힘이 없었다.

그런데.

“잡았다!”

처음부터 그가 붙잡으려 한 것은 검이 아니었다.

그 검을 감싸던 붉은 천.

어째서인지 남자는 화려한 은색 검이 아닌 이 붉은 천에 눈이 갔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이 피처럼 붉은색이 아닌 맑은 하늘을 닮은 푸른 쪽빛과 어떤 색으로도 물들일 수 있는 순수한 백색, 마지막으로 어떤 금은보화보다 화려한 황색이 떠올랐다.

그리고 소매 속에 그 모든 것을 숨기고, 간간이 자신에게만 보여줬던 누군가의 모습도.

‘진!!’

누굴까?

그가?

덥석!!

어쨌든, 남자가 마지막 기력을 모두 발휘해 천을 붙잡았다.

번쩍!

그 순간, 붉은 천에서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신기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와 상처투성이인 남자의 몸을 휘감았다.

* * *

현석이 실종된 지 사흘이 지났다.

다그닥 다그닥!

진천우는 지부로 향하는 마차에 앉아있었다.

왜?

어째서 현석을 계속 찾지 않고?

설마 포기한 건가?

뿌득!

그럴 리가 있나!

그는 현석을 구하기 위해 지부로 가고 있었다.

-위에서 자네를 소환했네.

백풍대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손에 쥔 서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진천우는 무시했다.

그에게는 맹보다 현석이 몇십 배, 몇백 배로 소중했다.

그러나 백풍대주가 다시 한번 서신을 내밀었다.

-읽어야 하네.

도대체 왜?

진천우가 어쩔 수 없이 서신을 읽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동시에 백풍대주가 왜 읽으라 했는지 알아차렸다.

서신 내용은 명백히 협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처사인 건 아네. 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으면, 위에서 여기로 차출한 인원을 거둬갈 걸세.

정확히는 지금 지부에서도 인력이 부족하니 잠시 거뒀다가 다시 차출한다는 내용이지만, 그게 언제 다시 차출되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즉, 한번 사람을 거둬 가면 다시 인원을 차출할 시기는 몇 달 뒤가 될지, 반년 뒤가 될지, 심지어 일 년 뒤에 될지 모른다는 소리.

맹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래도 논공행상 자리에서 자네에게 목줄을 채울 생각인 것 같네.

보통 때라면 맹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진천우는 이번에 련의 갑작스러운 도발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협박은커녕 큰 상을 내려도 부족했다.

그러나 당장 눈에 띄는 약점이 너무 컸다.

게다가 그는 학수선의의 사람이었다.

학수선의는 맹에 너무 많은 적이 있었다.

또 진천우만 해도 지부장인 제갈세형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진 공자!

백풍대주가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이건 가야 하네.

아마 맹도 진심으로 지원대를 뺄 생각까진 없을 거다.

그리되면 정말로 진천우와 척을 지게 되니까.

대신 강제 소환에 순순히 응한다면, 그 대가로 인원을 더 차출해줄지도 몰랐다.

이미 사흘째 성과가 없다.

그나마 시신을 찾지 못한 게 다행일 정도.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아주 극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탐색 인원을 배로 늘리는 건 충분히 극적인 조치가 될 법했다.

-내가 자네와 함께 가, 어떻게든 지원 인원을 늘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네.

백풍대주는 기꺼이 자신도 한 힘 보태겠노라 맹세했다.

안타깝게도 그와 함께 큰 힘이 되어줄 정철은 여기 남아야 했다.

누군가 한 사람은 현장에 남아 사람들을 지휘해야 했으니까.

-꼭 좋은 성과를 거둬오길 빌겠네.

그렇게 두 사람은 곧바로 지부로 향했다.

덜컹!

마침내 마차가 멈췄다.

“어서 오십시오. 백풍대주님과 진천우 공자님이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정갈한 복장의 시녀가 그들을 안내했다.

둘은 그녀를 따라 지부의 중앙 회랑으로 이동했다.

-명심하게.

이동 중 백풍대주가 전음을 보냈다.

-필시 위에서는 자네의 공을 깎아내리려 할 걸세.

아까도 말했지만, 진천우 그리고 학수선의는 적이 많았다.

게다가 그는 완전히 새로운 얼굴.

그런데도 너무 큰 공을 세웠다.

그 말인즉, 기존의 세력에게 온갖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킬 조건을 모두 갖췄다.

-회랑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모두가 자네를 공격해 올 걸세.

끄덕!

진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전부 다 안다.

알면서도 찾아온 자리다.

일부러 물어뜯기려고.

그렇게 제 살점을 내주고, 좀 더 많은 인원을 차출 받기 위해.

현석을 위해서라면 그까짓 모욕과 멸시쯤 얼마든지 참아 넘길 수 있다.

-알겠습니다.

진천우의 답을 들은 백풍대주가 그제야 안도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힘든 자리다.

그래도 지금 가장 힘들 진천우만 참아준다면, 자신은 반드시 그를 도울 것이다.

설령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다 많은 인원을 차출 받게 할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회의장은 바로 저 앞입니다.”

두 사람이 다짐을 마친 순간, 중앙 회랑에 도착했다.

회랑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무척 크고 무거운 문.

아직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새어 나왔다.

모두 진천우를 물어뜯을 준비를 마친 거친 야수들의 기운이었다.

-참아야 한다.

문을 열기 전, 진천우가 다시 다짐했다.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오직 현석을 위해.

-모든 걸 내주더라도 지원 인력만 차출 받을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

그래야 현석을 구할 수 있다.

좋아!

다짐을 마친 진천우가 기세 좋게 눈앞의 커다란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갑자기 푸른 현판이 시야를 가렸다.

‘어?!’

지난 사흘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현판이 느닷없이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는 아주 짧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걸 본 진천우의 입꼬리가 아주 거칠게 비틀렸다.

……이제 참지 않아도 된다.

아니!

‘다 물어 뜯어주마!!’

상황이 반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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