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 썰전(戰)! (1) (101/210)


101화 : 썰전(戰)! (1)
2022.02.21.


‘썰전?’

이게 무슨 뜻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팟!

‘억?!’

현판이 느닷없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졌다.

그중 일부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둥둥 떠올랐다.

딱 손바닥 크기의 다섯 패.

그것들은 더 이상 푸르게만 빛나지 않았다.

둘은 여전히 푸른빛을 냈지만, 하나는 녹색으로, 나머지 둘은 붉게 빛났다.

‘이게 도대체?’

각 색마다 다른 글이 적혀있었다.

푸른색은 ‘시절’, 녹색은 ‘도리’, 붉은색은 ‘고사’였다.

“감히!”

“우리가 기껏 생각해서 내놓은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거요!”

“이는 명백히 맹을 무시한 처사요!”

아직 타이쿤의 변화를 다 확인하지 않았는데 맞은편에서 거친 항의가 쏟아졌다.

하긴, 그들의 눈에는 타이쿤이 보이지 않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하!”

그렇기에 진천우도 똑같이 반응해주었다.

“조금 전, 제 주장이 맹을 무시한 처사라 말하셨습니까?”

“당연하지 않소!”

“우리는 맹의 이름 아래 논공행상을 심사하고 있소!”

풋!

저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이를 본 심사관들이 얼굴을 붉혔지만, 그들이 뭐라 하기 전에 진천우가 선수 쳤다.

“어처구니가 없군. 설마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대들이 내놓은 제안이 정말 천하에서 가장 공명정대하다는 맹의 이름하에 내놓은 제안이라고?! 어디, 다시 말해보시오! 방금 내게 제시한 게 정말 내가 세운 공에 걸맞고 정당한, 그러니 도리에 맞는 처사였는지 다시 한번 똑똑히 말해보란 말이오!”

깊게 생각한 발언이 아니었다.

애초에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잘못되었고, 자신은 삐뚤어진 판을 바로 맞추려 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휙!

‘어?’

하나뿐인 녹색의 패가 제 앞으로 다가왔다.

[도리(小)]

그러더니 딱히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뒤집혔다.

녹색 패의 뒷면에 작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는데, 거기 적힌 말들은 조금 전에 진천우가 말한 내용과 거의 유사했다.

“큭!”

“감히! 우리에게 이런 수모를!”

심사관들은 진천우의 말에 제대로 맹점을 찔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깐!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이 패를 볼 수도 있었다는 건가?’

그러니까 패의 내용을 참고해서 다음 말을 내놓아도 된다는 소리?

그게 가능하다면, 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책사에게 얼마나 유용한가?

그리고 이 능력은 확실히 설전(舌戰), 혀로 하는 전쟁이란 이름에 지극히 어울렸다.

“자네!”

심사관 중 둘이 나가떨어지고, 남은 이들 중 한 명이 진천우를 향해 삿대질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패배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부끄러움도.

아마 이기기만 하면, 수단과 과정이 어떠하든 전혀 상관할 게 없다고 믿기 때문이겠지.

‘특히나 그는 내가 인력 차출을 포기하지 못한다고 단단히 믿는 모양이군.’

그러니 아직도 저렇게 눈에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리라.

“우리를 이리 모욕하고도,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생각하는가?”

과연 그는 아주 노골적으로 진천우를 협박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러자 곧바로 백풍대주가 나섰다.

그는 진천우의 갑작스러운 반박에 크게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옆에 서 있었다.

허나 진씨세가의 하인을 찾는 데 가장 필요한 탐색 인원을 차출하지 않겠다는 협박에 즉각 정신을 차렸다.

“큭!”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심사관도 백풍대주의 웅혼한 기세를 온전히 견디지 못했다.

슥!

그때, 진천우가 둘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진 공자?”

“백풍대주님의 진심 어린 염려는 항상 감사드립니다.”

진천우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눈은 아래를 향하지 않고 똑똑히 백풍대주를 향했다.

그가 눈으로 말했다.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알겠소.

결국, 백풍대주가 뒤로 한발 물러났다.

-……믿겠소.

그리고 완전히 뒤로 물러났다.

그가 기세를 풀자, 잠시 겁에 질렸던 심사관이 다시 오만방자하게 나섰다.

저 뻔뻔함도 능력이라면 능력!

“어쨌든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면, 새로운 인원 차출은…….”

“거절하겠소!”

“뭐?”

“인원 차출을 거절하겠다고 했소만?”

심사관들은 진천우의 약점을 확실히 쥐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하나뿐인 약점만 믿고 미쳐 날뛰다가, 만일 상대가 그 약점을 극복하면?

기껏 손에 움켜쥔 승기는 되레 제 등을 찌르는 칼이 되고 만다.

“어엇?!”

제 손의 패를 너무 믿었던 그는 그렇게 크게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하더니.

“그 대신 나는, 보다 확실한 보상을 원합니다.”

“그…….”

“무엇보다 내가 세운 공에 걸맞은 명확한 보상을!”

“그…….”

“맹의 이름을 걸고 나온 심사관인 당신에게는, 내게 그것을 내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서 내놓으세요!!”

“큭!”

결국, 한껏 으스대던 상대도 나가떨어졌다.

이제 남은 심사관은 한 명.

진천우는 당연히 그도 손쉽게 찍어 누를 줄 알았는데.

“영 틀린 말은 아니군요.”

본 맹에서 나왔다는 젊은 심사관.

그는 지금까지 설전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뒤늦게 입을 뗐다.

“허나 시기가 좋지 못합니다.”

“시기?”

팟!

갑자기 그와 나 사이에 정체 모를 불빛이 들어왔다.

‘저런 게 있었나?’

아마 처음에 현판이 나뉠 때, 같이 나뉜 조각 중 하나 같았다.

그건 눈앞의 다섯 개의 패보다 배 이상 컸다.

‘무슨 알림판인가?’

거기에는 푸른색으로 시절이라 적혀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저자의 앞에도…….’

제 앞에 있는 것과 똑같은 패들이 보였다.

자신과 똑같이 다섯.

그리고 그중 하나가 자신 쪽을 향해 뒤집혔다.

[시절(中)]

일단 심사관은 제 앞의 패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대신 그는 진천우를 내려다보며, 한 자 한 자 똑똑히 지금 맹이 처한 상황을 나열했다.

“천하가 어지럽습니다. 이런 때 민심을 사로잡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겠지요.”

‘뭔 헛소리지?’

기가 찼다.

내가 세운 공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달라는데, 천하가 어지러운 것과 민심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가?

하지만 어째서인지 주위 사람들을 그 이야기를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화제가 바뀐 건가?’

이때, 아까처럼 도리를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결국 진천우는 자신이 가진 두 개의 시절 패 중 하나를 택했다.

[시절(小)]

“확실히 최근 맹이 련과 교에 비해 약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웅성웅성.

회랑에 모인 이들이 진천우의 말에 집중했다.

이는 정철에게 들은 말로, 최근 이 문제로 본 맹에서도 크게 주의하는 분위기라 했다.

“바로 그렇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젊은 심사관이 크게 소리쳤다.

“바로 이런 시기이기 때문에 맹은 이번 일이 크게 번지길 원하지 않소. 분명 도리상 진 공자의 공을 덮는 게 되겠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맹이 련에게 당한 일을 널리 퍼트릴 수 없소. 진 공자! 부디 대세를 굽이 살펴, 이번 일은 이쯤에서 넘어가 주길 바라오!”

쿵!

“큭!”

진천우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심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째서?

그 순간, 그의 머리맡에 처음 보는 붉은 막대가 나타났다.

스륵!

막대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크기가 줄어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앞서 물러난 세 심사관의 머리 위에는 이 막대가 손톱만큼만 남아있었다.

대신 눈앞의 젊은 심사관은 자신보다 막대가 길었다.

‘그렇군.’

이 막대가 다 줄어들면 설전에서 지는 건가?

이해했다.

이해가 끝났으니.

‘이제 내가 찍어 누르면 되겠군.’

진천우가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마지막 남은 푸른 패를 집었다.

주제는 여전히 시절이었다.

“이런 시기이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겠습니다.”

“뭐라?”

심사관이 곧바로 크게 인상을 썼다.

이때, 그가 다시 새 패를 내밀었다.

[시절(中)]

그런데 아까와 똑같은 패.

‘그대로도 날 이길 수 있다고 봤는가?’

퍽이나 우습게 보였구나!

비록 그리 보이게 노린 거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 불쾌한 기분을 털어야겠다.

바로 눈앞의 상대에게!

진천우가 손에 든 패를 뒤집었다.

[시절(大)]

“근자에 맹이 련과 교에 비해 약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

이건 ‘시절(小)’에서 한 말인데?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음?!

진천우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회랑에 있는 이들과 하나하나 똑똑히 눈을 맞췄다.

사실 그는 상대가 ‘시절(中)’을 쓴 걸 알면서도 ‘시절(小)’을 먼저 내민 건, 지금 이때 더 큰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

“여기는 맹입니다. 련도 교도 아닌 맹이란 말입니다.”

“무슨 궤변을 하려는 거요!”

“궤변이라니! 다시 말하지만, 여기는 맹입니다. 천하의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곳! 아무리 천하가 어지럽고 민심이 흉흉하다 해도, 맹은 언제나 공명정대(公明正大)해야 합니다. 시절이 어려울수록 천하의 이목이 맹에 집중될 터이고, 그럴수록 맹은 더더욱 천하에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걸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큭!”

어렵고 힘들수록, 아니 그런 때이기에 더욱 정의로워라!

맹의 사람이 어찌 이 말을 부정한단 말인가?

젊은 심사관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 붉은 막대가 절반으로 줄었다.

“다시 한번 묻겠소!”

진천우가 이 기세를 몰아 단번에 쐐기를 박았다.

방금 사용한 ‘시절(大)’ 패가 사라지고 새 패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하필 그 패가.

[시절(大)]

“이런 때이기에 맹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 그건…….”

“조금 전 당신의 말처럼 불리한 건 숨기고, 공을 세운 이를 깎아내리는 겁니까? 정녕 그런 겁니까?”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어째서 당신 따위가 감히 맹의 입장을 대변한단 말입니까! 그것도 맹의 정의를 천하에 울려 퍼트려야 할 이 시기에!!”

“컥!!”

젊은 심사관은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또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스륵!

그렇게 그의 붉은 막대가 완전히 사라졌다.

* * *

결국, 네 심사관이 진천우의 요사스러운 혓바닥에 철저히 난자당했다.

‘대단하군.’

이를 지켜본 제갈세형이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앞의 셋은 그저 평범했지만, 마지막 한 사람은 달랐다.

‘설마 종리 선생이 저리 간단히 당할 줄이야.’

종리 선생은 최근 본맹에서 유능하다는 평을 듣기 시작하는 신진 책사였다.

그런 이가 어디 변방 소가문의 후계에게 낭패를 본 것이다.

‘종리가문에서 어떻게든 이 사실을 은폐하려 들겠군.’

종리세가는 비록 오대세가에는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 이름난 명가였다.

이들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 일을 보고 들은 이에게 함구해줄 것을 정중히, 아주 정중히 부탁할 게 분명했다.

‘허나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저 아이의 입부터 막는 일이겠지.’

제갈세형이 진천우를 노려보았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저놈은 찍어누르려 하면 할수록 되레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는 놈인데?

맹세컨대 진천우를 우습게 봤다간 아무리 종리세가라 할지라도 큰 횡액을 당하리라.

당장 저놈을 봐라.

신진 책사로 이름난 종리 선생을 쓰러트리고도 전혀 기뻐하지 않고 제 쪽으로 똑바로 걸어오는 것을.

우뚝!

그가 지금 막 제 앞에서 멈춰 선 진천우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네 심사관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보았네.”

“아무래도 저들은 제가 세운 공의 정당한 대가를 내주지 못할 것 같군요.”

“확실히…….”

제갈세형이 쓰러진 네 심사관을 잠시 둘러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것 같군. 그래서?”

내게 어쩌란 거냐?

설마 나보고 새로 심사하라고?

물론 제갈세형은 그럴 수 있는 이였다.

지부장이란 위치는 물론이거니와 능력도 출중했다.

당장 그의 앞에는 비록 진천우밖에 볼 수 없지만, 종리 선생도 진천우도 다섯 개밖에 가지지 못한 패가 무려 일곱 개나 들려있었다.

‘아직은 그가 나보다 위란 거겠지?’

역시나 제갈세가.

현자들의 도원경이란 명성은 절대 허명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갈세형은 제갈가에서도 손꼽히는 기둥답게 굳이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을 거부했다.

“난 해줄 수 없네. 차라리 본 맹에서 새로운 심사관이 내려오길 기다리게나.”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럼 나보고 어쩌란 건가?”

다시 말하지만, 제갈세형은 철저히 리(利)로 움직이는 자.

협(俠)을 중시하는 보통 맹의 무림인과는 성격이 크게 달랐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진천우 역시 협보단 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그 역시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제가 여기서 당신을 설득해도 제 정당한 대가는 찾지 못하겠지요.”

“뭐라?”

‘이놈이?!’

다시 말하지만, 제갈세형은 제갈가의 사람.

그는 단번에 진천우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놈은 방금 자신을 모욕한 게 아니라.

슥!

진천우가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 논공행상의 당사자도 심사관도 아닌, 좌우 다섯 칸의 단 위에서 구경하는 참관인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중 가장 구석에 홀로 앉은 백발의 노인 앞에 섰다.

“호?”

노인은 제 쪽으로 다가오는 진천우가 신기한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퍽 노골적이라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그는 조금도 거리낌 없었다.

“아마 제 예상으로는, 당신의 허락을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군요.”

“허허,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백발노인이 정말 재밌어하는 어투로 물었다.

이번에도 진천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 앞에 높인 패는 다섯.

제갈세형은 일곱.

‘아마 확실치 않지만, 련의 만박자도 일곱이나 여덟 개에 불과하겠지.’

그가 타인의 지력을 완전히 평가할 순 없겠지만, 타이쿤으로 얻은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이 그렇게 느꼈다.

그랬는데…….

‘이 노인은 만박자보다 훨씬 위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냐고?

당연했다.

왜냐하면 노인의 눈앞에는 세 가지 색깔로 빛나는 패가, 다섯도, 일곱도, 여덟도 아닌…….

우우웅!!

무려 열 개의 패나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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