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 맹으로 가기 전에 (1) (104/210)


104화 : 맹으로 가기 전에 (1)
2022.02.28.


진천우가 말없이 타이쿤 문구를 읽었다.

의문은 쉽게 해결되었다.

[학수선의를 따라 맹으로 가는 건, 그저 맹에 방문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용자가 더 잘 알 겁니다.]

맞는 말이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신의를 따라다니다 보니 그의 위치가 어떤지 알게 되었다.

특히 이곳 논공행상 자리에서 더욱 뼈저리게 깨달았다.

‘분명 맹에서 신의를 무시하는 이는 없다.’

어딜 감히 당대 제일 의원을 무시하겠는가.

그러나 대놓고는 아니지만, 뒤에서 수작 부리는 이가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아무래도 무림인은 문(文)과 무(武) 외 다른 능력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 때문인 듯했다.

‘처음 패도의 길이 개방됐을 때, 타이쿤이 내게 말했지.’

-지금 사용자의 가문인 진씨세가는 ‘패도(霸道)’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천하를 ‘경영’하길 원한다면, 그에 걸맞은 기반부터 다져나가길 추천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해석의 여지가 많았다.

‘지금’의 진씨세가.

‘이 말은, 가문을 보다 크게 키우면 가능해진다는 소리지.’

하지만 진천우는 일부러 이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분명 진씨세가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다.

만약 자신이 키워야 할 세력이 있다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진씨세가였다.

그러나 지금의 진씨세가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진씨세가의 가주는 아버님이다.’

그리고 현재 가주 대리는 어머님.

진천우는 두 분을 제쳐두고 가문을 제멋대로 키울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가문에 위기가 닥치면,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구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 내 사정 때문에 진가를 바꿀 생각은 없다.’

현재 진씨세가의 가주는 행방불명 상태다.

이때, 그가 멋대로 진씨세가를 운영하면, 그건 곧 행방불명된 가주가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과 같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천우는 아버지가 돌아오는 그 날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또 기다릴 생각이었다.

대신 그는 언제든 가주가 돌아오면 함께 가문을 하늘로 비상시킬 힘을 키우려 했다.

‘아무튼, 책사부로 들어가는 건 학수선의를 따라가는 것과 다르다는 거지.’

그랬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달랐다.

책사부는 무림인이 인정하는 문과 무 중 문(文).

특히 책사란 행정, 관리, 학문을 모두 포괄하는 동시에 그 꼭대기에 위치했다.

맹의 책사부에 들어간다는 건, 다른 말로 맹의 지배하는 자리에 올라선다는 뜻.

특히나 ‘지금의 맹’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어떤가?”

신안이 다시금 진천우에게 물었다.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맹의 최상위 책사인 그가 특별한 명성도 없고 나이마저 새파랗게 어린, 심지어 신분도 변방 소가문의 후계에 불과한 청년에게 책사부로 들어오라고 제안하고, 답을 기다리다니.

“자네, 무얼 뜸 들이는가!”

옆에서 신안을 부축하던 종리 선생이 보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그는 대놓고 진천우에게 시기와 질투를 드러냈다.

좋게 말하면, 그만큼 종리 선생은 신안을 존경한다는 뜻이었다.

이 이상 내가 존경하는 분을 괴롭히지 마라.

그의 깊은 진심에 진천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괜찮으시다면.”

이미 결론을 내렸다.

‘맹으로 간다.’

이는 학수선의에게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결정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책사부로 간다.’

이 역시 타이쿤이 반응했고, 더 큰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진천우가 즉답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사흘 후에도 어르신께서 제게 똑같이 제안하신다면, 군말 없이 따르겠습니다.”

“사흘 후?”

어차피 신안은 얼마간 지부에 머물 생각이었다.

당장 내상을 다스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결국 이번 논공행상을 다시 치러야 했다.

그것도 공정하게.

당연히 이는 그의 일이었다.

그 외에도 신안은 제갈세형과 논의해 앞으로 련의 행사를 보다 주도면밀하게 감시할 체계를 세워야 했다.

“좋네, 사흘 후에 내가 다시 자네에게 묻지.”

날 따라 책사부로 올 건지를.

“감사합니다.”

진천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왜 사흘이란 기간을 둔 걸까?

‘그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신안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그럼.”

진천우가 다시 한번 신안에게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지부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의당으로.

* * *

구름이 어스러이 뜬 달을 덮는 그 순간.

휙!

누군가 의당을 빠져나왔다.

‘하나, 둘, 셋.’

진천우였다.

그는 주위를 확인하고 곧바로 몸을 낮췄다.

‘넷, 다섯.’

의당 주위에 다섯이 숨어있다.

모두 맹의 무인들.

이들은 행방불명된 학수선의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맹에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게 아니면 겨우 저 정도 수준의 무인만 배치해뒀을 리 없었다.

자신에게도 기척을 들키는 이들에게, 벽을 넘은 무인인 학수선의가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진천우는 잠시 하늘을 한 번 더 살피더니.

슥!

다시 구름이 달을 가리는 순간, 은신술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지부의 담을 넘어 가까운 번화가로 향했다.

그대로 번화가에서 가장 큰 객잔으로 들어갔다.

“어서 옵쇼!”

“간단한 술과 안주 그리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

진천우의 주문에 점소이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손님, 방을 잡으시려면 최소 여아홍 한 병과 세 가지 이상의 안주를 시키셔야…….”

“아, 그래?”

점소이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규칙이 있었구나.

그냥 따로 방값을 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변방 촌놈이 어찌 그런 규칙을 알까.

반짝!

진천우가 소매에서 뭔가를 살짝 꺼냈다.

‘이래도?’

“네, 네! 감사합니다. 손님! 저기 가장 안쪽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여아홍과 저희 객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안주 셋 그리고 여자 하나까지! 손님 아직 이른 시간인데, 보통내기가 아니시네요?”

“하하하!”

쫄지에 이른 저녁부터 여자를 밝히는 화류 공자가 되었지만, 진천우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점소이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잘 꾸민 여인이 주문한 술과 음식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낭랑하게 웃으며 고운 입술을 뗐다.

“죄송하지만, 한 번 더 물건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싫소만.”

진천우가 생긋 웃으며, 여인의 부탁을 거절했다.

“호호호!”

그러자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탁!

여인이 방의 문을 닫고, 천천히 진천우 쪽으로 다가왔다.

새하얀 경장에 고운 화장을 마치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이 환한 미소.

거기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손목과 목선에서 풍기는 단아한 향은 뭇 남정네의 가슴을 들뜨게 하기 충분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맞은편에 앉아주겠소?”

허나 진천우는 평범한 남정네가 아니었다.

물론 그녀도 평범한 여인이 절대 아니었다.

“공자님, 말씀이 너무 섭하십니다.”

여자가 최후의 교태를 부려보지만.

“안됐지만.”

진천우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당연했다.

“난 동업자를 여자로 보지 않는 주의라.”

동업자?

“쳇!”

그 발언 직후, 여인이 갑자기 혀를 찼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거참!”

그녀는 갑자기 입가에 미소 대신 오만상을 찡그리며 진천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제가 가져온 여아홍으로 병나발을 불었다.

꿀꺽꿀꺽!

“크으!”

탁!

여인은 병나발 분 술병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흑월, 그 영감탱이가 어디 어중이떠중이에게 당한 건 아닌 모양이네.”

흑월.

진천우에게 크게 당한 하오문의 장로였다.

진천우는 객잔에 들어가자마자, 점소이에게 흑월에게 뺏은 하오문의 후계자 증표인 혼원옥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점소이의 눈빛이 바뀌었고, 진천우는 바로 객잔에서 가장 은밀한 장소로 안내되었다.

‘천하의 모든 거지가 개방의 문도인 것처럼 하오문은 천하의 모든 뒷세계를 장악했다고 들었을 때, 반쯤은 허풍 섞인 과장으로 생각했건만.’

이렇게 별생각 없이 들어간 객잔의 점소이를 통해 바로 하오문도와 접촉한 걸 보면, 영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콸콸콸! 탁!

“크으으!”

여인이 어느새 두 번째 술병도 화끈하게 비웠다.

“그래……. 정말 오랜만에 나타난 난입자께서 여긴 무슨 용무지?”

“난입자?”

“아, 몰랐나? 우리 하오문도 사이에서 자네는 난입자로 불리고 있지. 느닷없이 후계자 자리를 강탈한 난입자. 흐흐흐, 모쪼록 혼원옥을 잘 챙기고 다녀야 할 거야.”

“그 이상 제가 다가오지 마십시오.”

진천우가 제 쪽으로 몸을 내미는 여인을 다시 밀쳤다.

하는 김에 추가 사항도 일렀다.

“그리고 당장 몸에 뿌린 미혼향도 씻어내시고, 소매도 걷으시죠.”

“호?”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얼굴 표정을 바꿨다.

‘그냥 막연하게 날 경계하는 줄 알았더니.’

날 속속들이 간파한 거였다니.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저 평범한 도둑이 아닌, 하오문에서도 손꼽히는 도비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날 보고 동업자라고 했지?’

동업자.

즉, 진천우도 만만치 않은 소매치기 능력자란 소리다.

과부 처지는 과부만이 안다는 말처럼, 도둑의 심리를 잘 아는 것도 바로 도둑이었다.

진천우는 여인의 뛰어난 외모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흠…….”

“…….”

그렇게 두 남녀는 한참을 좁은 방에서 이상야릇한 시선을 교환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속곳까지 털리는, 도둑들 간의 비무였다.

“쳇!”

다행히 먼저 물러난 건 그녀였다.

“그래, 좋아. 아무튼, 혼원옥을 보였으니 용건을 들어줘야겠지. 뭣 때문에 하오문을 찾았지?”

여인이 조금 전 진천우가 말한 대로 소매를 걷으며 물었다

소매치기는 훔친 물건을 바로 소매에 숨긴다.

그러니 소매를 걷는다는 건, 더는 물건을 훔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정말 뛰어난 소매치기는 설사 소매를 걷은 상태에도 남들 모르게 훔친 물건을 숨길 수 있었다.

“제가 뭣 때문에 찾아온 것 같습니까?”

진천우가 끝까지 의뭉스럽게 답했다.

이것도 시험 중 하나다.

“하! 그쪽에서 우리를 평가하겠다? 끄윽!”

그녀는 술을 두 병이나 비운 게 문제가 됐는지 느닷없이 커다란 트림을 뱉었다.

그러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수십 마디의 말을 그 자리에서 쏟아냈다.

“어디 보자. 진씨세가의 소가주 진천우. 얼마 전까지 병상에 누워 있다가 최근에 자리에서 일어남. 학수선의에게 의술을 사사했을 거라 추정. 그 외에도…….”

놀랍게도 그녀는 진천우의 과거를 속속들이 꿰뚫었다.

‘개방도 저렇게 자세히는 알지 못했는데?’

그때는 진천우가 그리 주목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에 련의 무인과 만박자를 막으면서 그는 제법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은 개방에서도 이 정도 정보는 파악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가 놀라고 있는 동안에도 여자는 계속 진천우의 정보를 쏟아냈다.

“……그러다 최근 친분이 깊은 하인을 잃음. 그 하인은 절벽에서 떨어진 뒤, 계곡에 떠내려갔을 거로 추정. 생사 미정.”

이 뒤에도 아직 한참 더 할 말이 남았지만.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진천우가 하오문을 찾은 이유?

그녀는 지금까지 발언한 정보면 충분히 그 답을 유추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우리를 이용해 그 하인을 찾을 생각인 거지?”

겨우 하인 따위를 찾기 위해 일부러 혼원옥의 존재를 노출하다니.

이후, 모든 하오문도가 진천우를 쫓을 것이다.

‘이 미련한 놈아!’

그녀는 속으로 진천우를 욕했다.

이는 정말 미련한 짓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여인의 눈은 맨 처음 거짓으로 꾸몄을 때보다 훨씬 깊게 파였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이렇게 미련한 놈들이 좋았다.

‘일단 하인 놈은 하오문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찾아주지.’

허나 자신의 배려는 딱 거기까지.

여인은 진천우가 제 맘에 든 것과 별개로, 하오문도로서 할 일은 명백히 구분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가 자신의 답에 고개를 흔들었다.

“틀렸습니다.”

“뭐?”

“제가 하오문을 찾은 건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뭐?!”

다른 이유?

말도 안 된다.

하오문은 정보단체.

그간 모은 정보를 조합해 가장 확실한 결과를 도출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이 모은 정보의 답은 진천우가 하인을 찾는 데 전신전력을 다할 거란 거였다.

‘그런데 아니라고?’

허세인가? 그게 아니면…….

그때, 진천우가 자신이 하오문을 찾은 진짜 목적을 말했다.

“당장 하오문이 가진 개방의 모든 정보를 내놓으세요.”

“뭐!?”

이를 들은 여인이 두 눈을 치켜떴다.

방금 저놈이 뭐라고 했지?

뭐?

개방?!

개방이 어딘 줄 알고!!

‘……이놈!’

다시 말하지만, 하오문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조합해 결과를 내는 집단.

그녀는 자신이 아는 진천우의 정보에 그가 개방의 정보를 원하는 이유를 집어넣었다.

‘이놈은 절대 멍청한 놈이 아니다.’

오히려 매우 위험한 놈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에 진천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아까보다 훨씬 더 깊게 파였다.

‘하아! 어쩌지? 난 멍청한 놈보다 위험한 놈이 더 좋은데!’

……아무래도, 이 여자도 아주 위험했다!

16550976168895.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