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맹으로 가기 전에 (2)
(105/210)
105화 : 맹으로 가기 전에 (2)
(105/210)
105화 : 맹으로 가기 전에 (2)
2022.03.02.
쾅!
낡은 폐가의 대문이 갑자기 하늘로 솟구쳤다.
쿠당탕! 쾅!
박살 난 문이 바닥을 굴렀다.
……
그래도 폐가에서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저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얕게 휘몰아쳤다.
“어쭈?”
진천우가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등장했는데도 여전히 사위는 조용했다.
슥!
진천우가 부서진 대문 위에 섰지만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래……. 그런단 말이지?”
계속 이렇게 침묵을 지키겠다?
“하지만 이제 달아날 수는 없을 텐데?”
“진 공자.”
또 다른 누군가가 폐가로 들어왔다.
본 맹 소속 제 구십구대 백풍대주, 백청강.
그는 말했다.
“방금 막 내 수하들이 폐가 주위의 포위를 끝냈소. 이제 여기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올 수 없소!”
진천우에게만 전할 말치고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
마치 다른 누군가도 들으란 듯이.
“도대체…….”
역시 이쯤 되니 반응이 없을 수 없었다.
슥!
분명 조금 전까지 어떤 인기척도 없던 폐가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다.
유령?
그럴 리가 없었다.
폐가에서 모습을 보인 자는 낡고 허름한 누더기를 몸에 걸친 늙은 거지였다.
“진씨세가의 소가주, 진천우.”
“날 아는군.”
“어찌 이번에 련의 침공을 막은 영웅의 성명을 모르겠소.”
“얼마 전까지는 몰라서, 웬 거지새끼를 보내 날 납치하려 들었으면서?”
“커험! 그건 어리석은 삼결 제자의 독단행동이었소.”
진천우가 의당에 개방 거지에 숨어든 일을 꺼내자, 늙은 거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슥!
결국 노거지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허나 아랫놈의 실수는 윗사람이 책임지는 법. 내 이렇게 고개 숙여 사죄하겠소.”
“네가 뭔데?”
진천우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보통 이 정도면 격한 반응이 올 법한데도, 늙은 거지는 용케 불편한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거지 인생 중 이 같은 모멸이 어디 처음이겠는가?
노거지는 오히려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까지 띠며 조심스럽게 제 몸의 누더기를 살짝 옆으로 들었다.
그러자 허리춤에 여섯 겹 꼬아 맨 매듭이 보였다.
육결 매듭은 개방 분타주의 상징.
“제법 높은 거지였네?”
허나 진천우의 태도에 변화는 없었다.
늙은 거지가 드디어 얼굴을 굳혔다.
처음에야 제 신분을 몰라서 그런 줄 알았지만, 육결 매듭을 보고도 저런 태도라니.
이건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대로 계속 무시당하면, 그건 곧 개방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다.
“진 공자!”
“뭐?”
“자네는 개방을 무시하는 건가!”
“개방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뭐랏!”
“개방이면, 인두겁을 쓴 짐승 새끼한테도 말을 높여야 하나?”
“진 공자!!”
쫄지에 사람도 아닌 짐승 새끼란 모욕을 당한 노거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슥! 스르륵!
그러자 폐가 안에서 십여 명의 거지가 더 튀어나왔다.
거지들이 진천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눈빛 하나하나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마치 소짐승을 노리는 늑대 같았다.
“어쭈?”
그러나 상대는 진천우.
이제 그는 침상에 누워 골골대던 과거와 달랐다.
“뭣하면 나한테 타구봉을 휘두르겠다?”
“…….”
“하긴, 이미 한번 휘두른 거지 놈이 있는데, 다른 거지라고 왜 못 휘두를까!”
“진 공자, 그때 일은 내 다시 한번 사죄드리오.”
분타주가 얼굴을 크게 붉히며 거듭 사과했다.
그때 일은 노거지에게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통한의 실수.
어떻게든 상대에게 용서를 받아야 했다.
“사죄로 모든 게 끝나면, 관이 왜 필요해!”
하지만 진천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분타주의 얼굴에 낭패인 기색이 드리웠다.
설마 저놈이 이리도 강경하게 나올 줄 몰랐다.
‘언제고 한번 찾아올 줄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풍대를 대동해 올 줄이야.’
최근 백풍대주가 진천우의 싸고돈다는 것쯤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허나 백풍대주가 이리도 생각 없이 나설 줄은 몰랐지.’
어찌 본 맹의 무인이 감히 개방을 압박한단 말인가?
어쨌든 노거지는 제 속내를 여기서 밝힐 순 없었다.
그는 가급적 이 자리를 유하게 넘기려 했다.
따로 뒤통수를 후려 까는 건 나중 일이다.
“진 공자, 내가 거듭 사과하겠소.”
분타주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거진 머리가 땅에 박을 정도.
개방의 분타주라면 결코 낮은 신분이 아닌데, 이 정도로 자세를 낮추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그러나 거지가 자존심을 챙겨 무얼 할까?
‘지금은 간이든 쓸개든 다 내놓고, 이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다.’
분타주는 명예보다는 실리를 챙기는 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진천우 역시 그와 같았다.
“그딴 쓸데없는 허례허식은 필요 없고.”
허허!
세상에 개방 분타주의 사죄를 쓸데없는 허례허식이라 폄하하는 놈이 있다니.
‘강적이다.’
분타주가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그런데 골치 아프리라 예상한 문제가 뜻밖에 아주 간단히 해결되었다.
“대신 여길 쓸어버리는 거로 퉁칩시다.”
내가 잘못 들었나?
‘뭘 쓸어버린다고?’
어딜?
여길?
개방의 비밀 분타 중 하나인 여길?!
“갈!”
노 거지가 곧바로 일갈을 질렀다.
그 표정이 화난 듯, 웃는 듯 미묘했다.
“이놈이 오냐오냐 봐줬더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잘 됐다!
‘녀석이 아직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여기서 실수하는구나!’
진천우는 차라리 개방에게 정보를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했다.
그게 천하제일의 정보단체인 개방에게 뜯을 수 있는 최상의 보상이었다.
분타주도 진천우가 그걸 얻기 위해 찾아왔으리라 예상했다.
실제로 그는 약간의 설전 끝에 원하는 정보를 내줄 생각이었다.
딱 한 번만.
설령 아무리 설전에서 밀리더라도 그 이상은 없다.
‘너는 너무 욕심을 부렸다.’
아마 어떻게든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강짜를 부린 것 같은데, 상대는 개방이다.
구파일방의 일원.
맹의 가장 중요한 기둥 중 하나.
감히 그런 개방에게 이같이 말도 안 되는 협박질을 한다고?!
“백풍대주!”
노거지가 백풍대주를 불렀다.
‘그 또한 느꼈겠지.’
진천우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아마 백풍대주의 성격상 어떻게든 진천우를 보호하려 들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사실 자신들이 먼저 잘못한 게 있으니, 이 무례의 대가는 서로의 잘못을 덮는 거로 끝내리라.
과거의 잘못을 추궁받다가 이렇게 관계가 역전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헌데 백풍대주는 개방의 부름을 듣고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오히려 그 자리에서 가볍게 고갯짓을 해 수하들을 가까이 불렀다.
여전히 포위는 풀리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개방의 거지들이 당황해 소리쳤다.
당연히 백풍대주가 나서서 사죄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압박을 한다고?
“어허! 설마 맹의 위신이 이리도 떨어졌을 줄이야! 백풍대주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 거요!”
“나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반드시 확신을 가지고 행하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또 난 누구와 달리 제 잘못을 어떻게든 말로 넘기려 수를 쓰지 않지.”
그건 조금 전, 분타주가 개방의 삼결 거지가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든 미안하다는 말로 넘기려 한 것을 비꼰 말이었다.
노거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붉어졌다.
부르르!
그러나 여기서 감정을 드러낼 만큼 그는 연륜은 얕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자는 안 되겠군.’
백풍대주는 지나치게 진천우에게 심취되어 있다.
‘허나 다른 백풍대 무인들도 그럴까?’
그들이 대주를 철저히 따른다는 건 잘 알지만, 그렇다 해도 이들은 본 맹에 속한 자들이다.
맹에서 개방의 지위는 확고했다.
“자네들 생각도 그런가! 겨우 이런 일로 개방과 척을 지겠다고?!”
분타주가 목표를 바꿨다.
“설마하니 이런 일을 개방이 그리고 맹이 두고 보리라 생각하는가? 잘 생각하게. 맹은, 나아가 우리 개방은 절대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테니!”
“글쎄 개방이 정말 그럴지?”
‘이놈이 또!’
진천우가 앞으로 나섰다.
노거지가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일단 저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
아무래도 백풍대 무인들에게 자신의 호소가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분타주는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진천우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는 아니 됐다.
슥!
진천우가 소매에서 뭔가를 꺼냈다.
돌돌 말린 검은 죽편.
이때라도 놈이 저걸 못 읽게 막아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반년 전, 죽림보주와 비밀스러운 회동을 했더군요.”
“?!”
‘어떻게 그걸?’
“공교롭게도 당시 죽림보는 적청문과 분쟁 중이었고, 맹이 이를 중재하는 데 개방의 정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더군요. 그 결과 적청문은 일 년간 눈에 띄는 대외활동 금지, 사실상 봉문당했군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러시겠죠.”
진천우가 죽편을 내렸다.
“석 달 전에는 거산파 장로와 접촉. 이때 거산파의 대제자가 아녀자를 희롱한 죄로 맹에 붙잡혔는데, 개방의 조사 결과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아 결국 무사히 풀려났군요.”
“정말 아무 증거도 나오지 않았소!”
“그렇습니까?”
촥!
진천우가 아예 손에 든 죽편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펼쳐 들었다.
“이번에 가장 크게 문제가 된 련의 침공! 그 낌새를 개방이 한 달 전부터 눈치챘다는 건 어찌 생각하는지? 그리고 지금 개방이 이를 어떻게든 은폐하려 한다는 것도?”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그건 현재 개방이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 하는 정보였다.
실제로 한 달 전에 개방의 어린 거지가 어떤 유적의 정보를 가져왔다.
이번에 련이 뒤졌다는 바로 그 유적.
개방의 윗선은 당시 유적에 관해 일부러 맹에 보고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정보를 은폐했다.
대신 가까운 분타의 고수를 모아 은밀하게 유적으로 파견했다.
그들 모두 이번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사실 개방에서 이번 일에 몇 번이나 부족한 모습을 보인 것도 이런 이유가 숨어있었다.
만일 이걸 맹이 알게 된다면!
‘반드시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지금 진천우가 들고 있는 죽편을 처리하는 것.
그러나 주위에 백풍대 무인들이 버티고 있는 한 그건 쉽지 않았다.
“진 공자!”
결국 분타주는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진 공자, 이번 일만 조용히 묻어준다면, 자네에게 내가 허용된 범위까지 개방의 정보망을 이용하게 해주겠네.
그는 전음으로 진천우에게 은밀한 제안을 건넸다.
개방 분타주의 권위는 막강했다.
그 정도의 지위를 지닌 이가 이용할 수 있는 방대한 정보망을 내준다니!
제대로 된 생각이 박힌 자라면, 이런 군침 도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특히나 진천우가 자신처럼 명예보다 실리를 중시한다면 더더욱!
분타주의 생각이 맞았다.
“하!”
허나 동시에 틀렸다.
진천우는 분명 명예보다 실리를 중시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가장 큰 실리를 얻는 방법은 분타주의 제안을 수락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이 폐가를 다 뒤져서, 죽편의 내용을 증명해 줄 증거만 손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
-자, 자네!
-잘하면, 분타주 따위가 아닌 용두방주에게도 같은 제안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분타주가 아무리 대단해도, 개방의 머리인 용두방주와 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큭! 개방도는 당장 타구봉을 들어라!”
“백풍대는 당장 검을 뽑아라!”
더는 회유가 불가능하단 걸 깨달은 분타주가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
백풍대주도 서둘러 무기를 뽑았다.
양측이 무기를 들었으니, 이제 많은 피가 흐를 터!
“……!”
“……!!”
십수 명의 개방도와 백풍대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잠깐!!”
그 순간 커다란 일갈이 사방에 울렸다.
곧바로 누군가 백풍대의 포위를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
백풍대 무인들이 깜짝 놀라 손에 쥔 검에 힘을 더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포위 안쪽만 집중했다지만, 이리도 쉽게 포위가 뚫리다니.
게다가 갑작스러운 난입자의 정체를 깨닫고, 이들은 더더욱 낭패인 기색을 보였다.
백풍대주가 난입자를 향해 소리쳤다.
“정철!”
개방의 기린아.
그는 단순한 오결 거지가 아니었다.
상징성으로만 보자면 개방에서 분타주보다 위인 존재.
어쩌면 아직 정해지지 않은 후개 자리도 노릴 만한 인재였다.
사실 그 모든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백풍대주는 그저 이번에 련의 침입에서 함께 싸운 동료와 무기를 맞대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오, 정철 대협!”
“분타주!”
한편 노거지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천군만마보다 믿음직한 우군의 등장에 크게 기뻐하며 그대로 양팔을 벌렸다.
즉, 자세를 풀어버렸다는 소리다.
퍽!!
“컥!”
그 순간, 분타주의 대갈통에 협개의 정의로운 몽둥이가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