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맹으로 가기 전에 (3)
(106/210)
106화 : 맹으로 가기 전에 (3)
(106/210)
106화 : 맹으로 가기 전에 (3)
2022.03.05.
“부, 분타주!”
“정철 대협, 지금 무슨 짓을?!”
놀란 개방 거지들이 노거지를 에워쌌다.
그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협개를 올려다보았다.
감히 오결 제자가 육결의 분타주를 가격하다니.
“이는 명백한 하극상입니다!”
“네놈들은 안 맞을 것 같더냐?”
“네?”
퍽! 퍽퍽!
정의로운 타구봉이 늙은 거지, 젊은 거지 할 것 없이 모두의 대갈통을 차별 없이 쪼갰다.
모두가 그 황당한 광경에 몸이 굳은 순간, 오직 한 사람 진천우만이 마치 예상했다는 투로 백풍대주를 불렀다.
“대주, 가만히 지켜만 볼 겁니까?”
“아! 그, 그랬지. 모두 쳐라!”
“존명!”
대주의 명에 뒤늦게 백풍대 무인들이 앞으로 달려갔다.
“큭!”
“온다!”
“모두 타구봉을 들어라!”
와아아!
개방도 가만히 당하지 않았지만, 이미 결과가 나왔다.
원래는 개방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판이었다.
아무리 백풍대가 맹의 정예라지만, 이곳은 개방의 비밀 분타.
무려 백 개의 대로 이뤄진 백풍대와 달리 여기 거지들은 개방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만 모였다.
허나 개방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협개가 등장하고, 그가 곧바로 분타주를 가격하는 초유의 사태에 거지들은 거센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분타주의 부재는 곧 지휘관의 부재.
결국, 완전히 사기가 꺾인 개방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전력이었음에도 백풍대에게 속절없이 무릎 꿇어야 했다.
“큭!”
“크윽! 분하다!”
개방의 거지들의 차례로 백풍대 무인들에게 포박당했다.
거지들의 제압이 끝나자, 백풍대는 곧바로 폐가를 뒤졌다.
“찾았습니다.”
“여기도 수상한 장부를 찾았습니다.”
“여기 장식장 뒤에 숨겨진 공간이 있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암호가 적힌 죽편을 찾았습니다!”
본래 백풍대의 주 임무는 전투가 아닌 감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 그들은 순식간에 비밀 분타에 숨겨진 여러 은밀한 장치를 속속들이 찾아냈다.
그중 대부분이 조금 전 진천우가 펼친 검은 죽편에 나열된, 개방의 지난 죄에 대한 증거들이었다.
“흠…….”
그러한 증거가 모두 백풍대주의 손에 들어왔다.
백풍대주는 양손 가득 증거를 들고, 고민했다.
그 옆에 진천우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협개 정철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이 증거를 누구에게 줘야 하지?’
원래 계획대로라면 개방에서 수확한 증거는 모두 진천우의 몫이었다.
허나 때마침 협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큰 피해를 볼 수 있었다.
더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정철이면 절대 이 증거를 잘못 사용하는 일은 없을 터.
“그 증거는!”
그때, 정철이 백풍대주에게 다가오며 놀라운 말을 꺼냈다.
“모두 진 공자에게 내주십시오.”
“정철!!”
그 말을 들은 늙은 거지가 포박된 상태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게 뭔지 모르는가?”
“압니다.”
“안다면 더더욱 외부인에게 주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이제 분타주도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급했다.
‘저것만은 반드시 개방도의 손에 들려있어야 한다. 적어도 절대 저 어린놈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놈이 저걸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차라리 정철의 손에 들어가면,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은 피하리라.
“만일 제가 저 증거를 가지게 된다면, 가장 먼저 방주님을 찾아가겠지요.”
방주는 증거를 보자마자 크게 역정을 내며 직접 이번 일을 수습하려들 것이다.
당연히 분타주와 이 일에 관련된 많은 거지가 개방에서 축출되겠지.
그만큼 이번 일은 심각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저는 방주님도 이 일에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그 말이 옳았다.
무려 맹을 속이는 일.
당연히 용두방주가 관여했을 확률이 높고, 그게 아니면 최소 장로급이 관여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더더욱 저 증거는 개방도가 가지고 있어야 했다.
만일 저것을 개방과 상관없는 외부인이 지닌다면!
“자네는 개방을 무너트릴 생각인가?”
분타주가 어떻게든 정철을 설득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결과를 냈다.
“그 때문에 개방이 무너진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뭣?!”
그 무슨 망발인가!
어찌 다른 이도 아닌 개방의 상징이라 불리는 자의 입에서 그 같은 불경한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자네!!”
노거지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시 한번 정철을 설득하려 했다.
“분타주 어르신!”
그러나 그가 설득하는 것보다 먼저 정철이 자신의 굵은 손으로 포박된 늙은 거지의 손을 붙잡았다.
참으로 두껍고 거친 손이다.
개방의 다른 어떤 거지와도 비교되지 않는.
이 손이야말로 가장 낮은 곳에서 밥을 빌어먹고, 다른 누구보다 일찍, 그리고 가장 늦게까지 손에서 타구봉을 놓지 않는 한 명의 거지의 손이었다.
노거지는 정철의 손에 닿자마자 그것을 느꼈다.
“어르신!”
그리고 그가 자신과 눈을 맞추자, 분타주는 아까와 다른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이건!’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정철을 설득할 수 없으리란 확신!
지금 마주하는 저 단단하고 거친 눈은, 자신의 어쭙잖은 설득 따위로 바뀔 성질이 아니었다.
그 눈을 보았기에 늙은 거지는 결국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각오해야겠구나.’
어쩌면…….
‘어쩌면, 내 대에서 개방이 무너질지도 모르겠구나.’
허나 노인과 정반대의 각오를 하는 이가 있었다.
정철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거지를 향해 말했다.
“개방은 맹의 가장 중요한 기둥 중 하나다. 그렇기에 개방은 언제나 정당하고 정의로우며, 항시 가슴 속에 협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어땠지?”
그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포박된 거지들이 차례로 고개를 떨궜다.
지독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 머리를 처박고 싶다.
허나 아직 정철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만일 개방이 무너진다면 모두 너희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막지 못한 나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설사 그런들 무슨 상관이냐!”
“……!”
“무슨?”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언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거지들이 저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소리지?
“드디어 나와 눈을 마주치는구나.”
“아!”
“아아!”
그제야 포박된 개방의 거지들이 정철과 눈을 맞췄다.
아니, 자신들의 처음 개방에 들어올 무렵, 항시 가슴 속에 품었던 협을 마주했다.
누구든 협을 저버릴 수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항시 협을 잊지 않는 거지만, 한번 협을 저버렸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절대 아니다.
협(俠)이 말했다.
“무너진 것은 다시 세우면 된다. 잊었다면 다시 깨우치고, 모자라면 채워라.”
“아아!”
“흑!”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포박된 젊은 거지들이 앞다퉈 눈물을 흘렸다.
이를 본 협개가 여전히 울 것 같은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천만다행히도 개방도의 가슴에는 아직 협이 남아있다.
‘분명 개방은 이번 일로 완전히 박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있다면, 그리고 개방도들이 끝까지 가슴에서 협을 잃지 않는다면.
‘개방의 정신은 영원불멸하리라!’
더불어 만일 개방이 이번 일로 무너지지 않는다면!
‘개방은 반드시 이전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집단이 되리라!!’
뚝!
결국, 정철은 감격에 겨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앞으로 달려가 포박된 다른 거지들을 얼싸안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대성통곡했다.
그 모습을 다른 백풍대원들도 눈시울을 붉힌 채 바라보았다.
당연히 백풍대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
오직 한 사람.
진천우만이 예외였다.
‘저게 다 뭐 하는 짓이지?’
그만이 정말 느닷없이 벌어진 눈물바다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말자.
‘협을 이해할 수 있는 건 같은 협뿐이다.’
협이 아닌 자신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니, 애초에 이해하려고도 하지 말자.
그 대신 나는.
“백풍대주?”
“아! 아아, 그래, 여기 있소. 진 공자.”
일부러 은근한 목소리로 백풍대주를 따로 불러, 서둘러 그가 전해주는 개방의 비리 증거를 모조리 제 소매에 욱여넣었다.
* * *
큰 소동이 있던 날 밤.
휙!
진천우는 또 몰래 지부를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번화가가 아닌 너른 평원.
“왔군.”
평원 한가운데 아는 얼굴이 그를 기다렸다.
여전히 새하얀 경장 차림의 하오문도였다.
진천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오늘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자신도 정철도 아닌, 바로 그녀였다.
“잘 썼습니다.”
진천우가 소매에서 검은 죽편을 꺼냈다.
그간 하오문이 모은 개방의 비리 자료.
이 자료가 있었기에 오늘의 성과가 있었다.
“아냐, 아냐. 잘 썼으면 됐어.”
여인이 히죽 웃으며 죽편을 챙겼다.
“어차피 하오문에서는 못 쓸 정보야.”
하오문에서는 쓰지 못하는 정보?
“궁금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하오문이니까.”
“그게 왜?”
“우리가 개방의 비리 정보를 퍼트려도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거든.”
확실히.
그제야 진천우도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은 본 맹의 백풍대가 주관했다.
다른 이도 아닌 그들이 나섰기에 개방의 비리를 확실하게 밝혀낼 수 있었다.
개방은 정파지만, 하오문은 사파다.
그리고 이 둘은 정보라는 귀중한 보물을 두고 오랜 기간을 끊임없이 다퉜다.
그러니 만일 이 일을 백풍대가 아닌 하오문이 했다면?
틀림없이 사람들은 바로 믿지 않고 의심부터 했을 거다.
그러면 개방은 천하제일 정보단체답게 곧바로 이 일을 은폐하고, 하오문이 허위 정보를 조작했다고 꾸미겠지.
“즉, 네가 일을 벌여 준 덕에 우리 하오문이 아주 큰 득을 봤다는 소리야.”
하오문은 언제나 개방의 반대편에 선 집단.
개방이 실수하고 아래로 떨어질수록, 반대로 하오문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이번에 하오문에서 내 발언권이 아주 크게 올랐어. 그러니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여인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너무 기쁜 나머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덧붙였다.
“오히려 내가 네게 선물을 줄 생각인걸?”
“선물?”
그녀가 자신에게?
도둑이 자신에게?
“하하!”
본래 진천우는 잘 웃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얻은 천형으로 웃을 일이 별로 없었고, 혹여나 감정을 드러내도 그 대상은 한정돼 있었다.
특히 현석이 사라진 지금은 더더욱 웃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하하하!”
이상하게 그는 계속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그러자 여인도 지지 않고 교태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동안, 인적이 없는 들판에서 남녀의 시끄러운 웃음이 이어지다 말고.
뚝!
갑자기 둘이 동시에 웃음을 거뒀다.
그 직후, 그녀는 진천우에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내주었다.
휙!
느닷없이 흰 섬섬옥수가 진천우를 향해 매섭게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