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109/210)
109화 :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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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2022.03.12.
달칵!
제갈세형이 차를 타기 시작했다.
아주 느긋하게.
그 와중에서 신안은 눈을 거두지 않았다.
슥!
잠시 뒤, 잘 우려낸 찻잔이 신안의 앞에 놓였다.
“자네도 들게.”
진천우의 앞에도.
“…….”
그는 끝까지 말이 없었다.
투명한 녹색을 띠는 차에서 뿌연 김이 올라와 둘 사이의 시야를 잠시 가렸다.
그제야 처음으로 손이 움직였다.
달칵!
진천우는 두 손으로 공손히 다기를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신안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군.’
솔직히 하오문의 첩자 소리는 심증뿐.
그런데 진천우의 반응은 평온 그 자체다.
신안 정도 되는 현인이면, 바라만 봐도 상대의 감정을 알아챈다.
특히나 진천우 같이 혈기 왕성한 나이대라면 당장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맞힐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의 진천우에게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혈기 왕성한 나이?
그는 남과는 조금 다른 성장 과정을 거쳤다.
한 번 발작할 때마다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타이쿤을 얻은 다음에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단순히 사선을 넘은 횟수만 치면, 진천우는 온갖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노장과 다름없다.
게다가 그에게는 타이쿤이 준 아주 귀중한 선물이 있었다.
[외부에서 당신을 탐지하려는 시도를 발견했습니다.]
[스킬 ‘은폐’가 이 시도를 무효화합니다.]
은폐 스킬.
비록 때때로 은폐에 실패하고 간파당했지만, 그럴 때마다 숙련도가 크게 올랐다.
적어도 앞서 치른 썰전으로 큰 내상을 입은 신안의 눈을 속일 정도는 됐다.
슥!
진천우가 다시 차를 마셨다.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지만, 절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윽고 차 한 잔을 모두 비워냈을 때쯤,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하오문의 첩자라고요?”
“그렇다네.”
대꾸하는 순간, 신안이 눈을 반짝였다.
입을 닫는 동안은 감정을 철저하게 숨길 수 있다.
하지만 한번 입을 열면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 틈을 노려야 한다.
어떻게든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녀석의 감정을 헤집어놔야 한다.
그리해야 놈의 결백을 완전히 증명할 수 있다.
‘기껏 내가 키우려고 마음먹은 인재가 하오문의 첩자 따위일 수는 없지!’
그는 아직도 학수선의에게서 진천우를 훔쳐 제 사람으로 만들 생각을 거두지 않았다.
이때, 진천우가 다시 입을 뗐다.
“아닙니다.”
“첩자가 아니라고?”
“절대!”
짧은 두 마디.
여기서 신안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감정이 전혀 읽히지 않았다.
설마 불가에 전해지는 부동심(不動心)이 이 청년에게 깃들어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참인 걸까?’
참이다.
확실히 진천우와 하오문의 관계는 맹에 밝힐 수 없는 성질이지만, 적어도 그는 하오문의 첩자 같은 건 절대 아니었다.
진천우는 자신이 명확히 밝힐 수 있는 것만 밝히며, 가장 중요한 것은 굳이 떠벌리지 않았다.
진실 뒤에 거짓을 숨긴다.
어느새 그의 언변이 현인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직 제대로 선을 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것이 효과를 보인 건, 역시 신안이 내상으로 제 능력을 온전히 다 보일 수 없는 탓이 컸다.
그러나 시기를 적절히 택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
“더 물을 것이 있으십니까?”
“그래,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내 몇 가지 묻겠네.”
“모두 솔직하게 답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할 걸세.”
신안이 다시 눈을 반짝였다.
진천우는 그 눈빛을 부담스러웠지만, 애써 무시하고 평온한 얼굴로 질문에 답했다.
그렇게 몇 번의 문답이 오갔을까?
‘확실히 하오문의 첩자는 아닌 것 같군.’
드디어 오해가 풀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다만 모든 오해가 해소된 건 아니었다.
진천우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제안했다.
아니, 이미 자신이 한번 했던 제안을 상대에게 상기시켰다는 게 맞았다.
“이틀 남았군요.”
“응?”
“잊으셨습니까? 사흘 뒤, 제게 다시 맹으로 가자고 제안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지.”
확실히 진천우는 썰전을 마치고, 자신과 함께 맹으로 가자는 제안을 사흘 뒤로 미뤘다.
그때는 그저 결정을 내릴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결정을 내릴 사람이 나였던 건가?’
잠깐!
‘그럼 이 녀석은 그때부터 일이 이리될 줄 알았다는 건가?’
“허허!”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기껏 지금까지 깎아낸 의심이 다시 하늘 끝까지 치솟게 된다.
허나.
‘점점 더 탐이 나는군.’
그 덕분에 모든 것에 달관한 줄 알았던 신안의 가슴에, 참으로 오랜만에 욕심이란 감정을 불 지폈다.
그는 이제 눈앞의 청년을 가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설사 그가 정말 하오문의 첩자라 해도,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래, 아직 우리에게는 사흘이란 기한이 남았군.”
“그때를 기다리겠습니다.”
“내 자네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하지.”
방금 신안의 말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진천우를 실망시키지 않겠다.
거기에는 그때의 제안에 좋은 답을 하겠다는 의미 외에도.
-맹이 자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가 되도록 만들어주지.
그리되면, 진천우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는 절대 맹을 배신할 수 없을 테니까.
이걸로 모든 게 결정되었다.
이제 진천우가 하오문의 첩자인지 아닌지 따위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만 나가보게.”
그러니 더는 그딴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사라졌고.
“네.”
진천우 역시 이를 알아채고,
조금의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
신안이 문을 나서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처음 저 문으로 들어왔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커 보이는 건 단순히 노인네의 착각일까?
* * *
오늘 하루 많은 일을 겪은 진천우가 처소로 돌아왔다.
처소에는 미리 온 방문자가 있었다.
“여어!”
“오셨습니까?”
그가 담담히 방문자를 맞았다.
이리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곧 찾아올 거라 예상한 이였다.
“생각보다 늦었군.”
“하오문의 첩자로 몰렸습니다.”
“하!”
방문자가 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웃음이 한동안 이어졌다.
정말, 정말 유쾌하단 듯이.
뚝!
웃음이 그치자마자 진천우가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질문의 의도는 간단했다.
지금 의당은 지부의 무인들이 감시하고 있다.
그게 학수선의 때문이든 자기 때문이든, 아무튼 외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냥 들어왔는데?”
하지만 방문자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진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다.
무엇보다 상대는 하오문 제일의 도둑인 도귀였다.
그녀는 자신이 몰래 들어온 재미없는 이야기는 옆으로 치우고, 당장 중요한 주제부터 꺼냈다.
“선물을 일찍 주길 잘했군.”
선물?
-오히려 내가 네게 선물을 줄 생각인걸?
도귀는 이 말을 꺼낸 직후 진천우에게 손을 뻗었다.
기습 전에 떠보려는 건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녀와 하오문은 정말 진천우에게 크나큰 선물을 주었다.
탁!
“상처에 좋은 금창약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진천우가 하오문에게 받은 선물인 ‘옆구리의 상처’에 바를 또 다른 상처를 받았다.
첩자란 의심을 받기 전에 한 차례 싸우고, 옆구리에 큰 상처가 난 게 신안의 의심을 걷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의심을 완전히 걷을 수 없을 거야.”
“의심을 완전히 걷는 건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할 겁니다.”
현인은 끊임없이 모든 걸 의심하는 존재다.
그들은 어떤 것에도 절대적인 믿음을 주지 않는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의심하고 검증받고, 다시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진천우는 이걸로 첫 검증을 성공적으로 해낸 셈이다.
슥!
이때, 도귀가 금창약 외에 또 다른 선물을 건넸다.
그건 손바닥 크기의 검은 흑단 나무로 만든 목패였다.
“이건?”
“앞으로 하오문에서 정보를 구할 때 이걸 쓰면 될 거야.”
진천우에게는 이미 혼원옥이 있다.
“그렇지만, 매번 혼원옥을 꺼내면 귀찮아질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목패를 받았다.
이미 한 번 혼원옥을 쓴 자신에게 이걸 준 의도는 명백했다.
‘내가 혼원옥을 쓴 기록을 지웠구나.’
아마도 그 의도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기 위해서겠지.
그러니까 이 목패는 도귀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기보단, 앞서 준 선물의 대가로 볼 수 있었다.
진천우는 이를 받아들였다.
어쨌든 이 목패를 사용하면 다른 하오문도들, 특히 도귀 외 다른 하오삼귀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이건 그에게 득이 됐으면 득이 됐지, 절대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럼!”
“가보시는 겁니까?”
“내 방문 목적은 이걸로 끝났으니까.”
도귀는 곧바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하오삼귀 사이의 후계전.
여기에 진천우도 포함돼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존재까지 손패로 쥐었다.
도귀는 외부에는 도귀(盜鬼 : 훔치는 귀신)로 널리 알려졌지만, 하오문 내부에서는 도귀(賭鬼 : 도박하는 귀신)로 더 유명했다.
그녀는 이 숨긴 패를 가장 필요할 때에 쓰기 위해 그 밑 준비를 머릿속에 그리며 의당을 떠났다.
* * *
스륵!
도귀가 창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진천우가 곧바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의당을 주시하는 이들에게 수상쩍은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참으로…….”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여자다.
진천우가 감탄하며 창을 닫았다.
……
그녀까지 사라진 의당은 적막했다.
원래 주인인 학수선의까지 행방불명된 건물.
그리고 자신 또한 사흘 뒤, 아마 신안이 다시 같은 제의를 하면 여길 떠날 예정이었다.
“…….”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자신이 의당에 머문 기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곳은 진씨세가 다음으로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장소였다.
당장 함정 해제와 설치도 이곳에서 배우지 않았던가.
“그래, 새 함정을 설치해야겠군.”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무려 사흘.
그 정도 시간이면, 의당에 새로운 함정은 물론이고 이번에 만박자와 싸우며 새로 익힌 진법도 함께 녹여낼 수 있었다.
그럼 어디부터 손보면 좋을까?
“일단 이 층부터 할까?”
학수선의의 처소인 이 층은 본래 의당의 중심.
즉, 의당 전체에 함정을 설치하려면 가장 먼저 건드려야 하는 장소였다.
덜컹!
“응?”
그런데 아직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의당의 함정이 저 혼자 발동되었다.
철컹철컹!
갑자기 발동된 함정은 벽 쪽.
“?”
진천우는 살짝 경계하는 시선으로 그쪽으로 다가갔다.
당연히 언제 어떤 함정이 발동해도 피할 수 있도록 준비를 모두 끝내두었다.
철컹!
잠시 뒤, 함정이 발동함과 동시에 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어?”
“억?!”
놀랍게도 벽 뒤에 사람이 튀어나왔다.
“다, 당신은!?”
그런데 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