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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 진법 해체 (1) (121/210)


121화 : 진법 해체 (1)
2022.04.09.


본 맹의 심처.

딱!

마치 그림처럼 펼쳐진 심산유곡 한가운데 반듯하게 세워진 정자에서 두 노인이 한가로이 바둑을 두었다.

촤륵!

검은 장포의 노인이 백돌을 들었다.

그는 본 맹의 최고위 책사인 동시에 맹주 바로 아래인 총군사직을 맡은 자였다.

딱!

총군사가 거침없이 백돌을 두었다.

한 수에 비등했던 전황이 백에게 넘어왔다.

“흐음…….”

흑돌을 쥔 백의 노인이 얕은 신음을 흘렸다.

그 역시 흑의 노인 못지않았다.

맹의 우책사.

이 자리에 없는 좌책사 신안을 제외하면, 천하에 비할 자가 없는 이들.

딱!

좌책사가 새로 흑돌을 놓자, 한쪽으로 기울던 전세가 다시 균형을 찾았다.

허나 이대로는 안 된다.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전을 꾀해야 했다.

문제는 상대가 쉽사리 판을 뒤집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총군사께서 제자를 새로 들이셨다던데…….”

일단 가벼운 주제를 꺼내 주의를 환기해보았다.

본 맹의 총군사직을 맡은 이가 이런 뻔한 수에 당할까 싶지만, 상대는 맹의 삼 책사 중 가장 과격한 책략을 주로 사용하는 우책사였다.

“허허,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그 소식은 어찌 들은 건가?.”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수.

사실 총책사는 바둑을 두기 전부터 제자 자랑에 목말라 있었다.

제 새끼 자랑처럼 남에게 시기와 질투, 지루함을 모두 끄는 이야기가 없지만, 이번만은 참기가 쉽지 않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지요. 총군사께서 딱히 밝히지 않아도 소매 안에 떡하니 송곳을 넣으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법이지요.”

“거참, 우책사의 정보수집 능력에는 당할 재간이 없군.”

아무렴, 자신이 제자의 재능을 섣불리 드러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정체를 알아낸 우책사의 능력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딱!

‘이런!’

역시 바둑판은 두는 이의 마음을 투영했다.

잠시 딴생각을 했다고 금방 악수가 나왔다.

물론 다른 이에게는 상대의 대마를 막고 역으로 반격까지 하는 훌륭한 수였으나, 본 맹의 최고위 책사 둘의 눈에는 한참 못 미치는 악수 그 자체였다.

딱!

역시나 우책사는 곧바로 역공을 펼쳤다.

“새 제자를 들인 지 한 달쯤 된 거로 압니다.”

“거기까지 알아냈나?”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우책사는 간신히 되찾은 승기로 아예 쐐기를 박으려는 듯, 거센 역공을 몰아쳤다.

“이건 제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지난 한 달간 제자에게 얼마나 가르치셨는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네.”

“네?”

그러나 총책사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딱!

그가 막 바둑판 위에 백돌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거칠게 몰아치던 공격이 그 한 수에 틀어막히고 말았다.

“……!”

우책사가 아주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당했군.’

그만 총책사의 화술에 넘어갔다.

“정말일세.”

“네?”

그런데 방금 한 말은 그저 화술이 아니었다.

“정말 그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네.”

“어째서?”

그러자 우책사가 아까보다 더 짙게 눈살을 찌푸렸다.

본래 무공은 하루라도 일찍 익히는 게 중요하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몸에 자연스럽게 탁기가 쌓이는데, 이 탁기는 무공을 익히는 데 아주 나쁜 조건 중 하나였다.

꼭 탁기만이 아니라, 어릴수록 머리가 굳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책사의 지식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몸보다 머리에 치우쳐 있는 책사이기에 그들의 공부는 하루라도 더 일찍 익히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총책사가 기껏 얻은 제자를 한 달 넘게 방치했다고?’

심지어 자신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총책사의 제자는…….

“내 제자는 무려 문왕(文王)의 재기(才器)라네.”

“저도 압니다.”

문왕의 재능은 대단하다면 대단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원래 문왕의 재기라는 말은 없다.

다만 책사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 중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을 능가하면서도 그 성정상 끊임없이 배움을 갈구하고 또 갈구해도 절대 만족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뜻했다.

물론 그 같은 마음가짐은 총책사와 우책사도 지니고 있었다.

애초에 그 정도 마음가짐이 없으면 감히 맹의 최상위 책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최상위가 아닌 그 아래, 그 아래의 아래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 문왕의 재능은 그보다 좀 더 높은,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고차원적인 재능이었다.

아마 얼마 전까지라면, 자신도 그런 게 어딨냐고 대번에 부정했을 터다.

허나 지금의 그는 결코 문왕의 재능을 부정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부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문왕의 재능은 그저 가르친다고 끝나는 게 아니지.”

“네?”

“좋은 부모는 아이에게 물고기를 낚아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낚는 법을 알려주는 법이지.”

그 말은 곧, 총책사는 단순히 제자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지식을 익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는 뜻.

이번에 다소 이르게 모집한 책사부 시험도 새로 들인 제자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군요.”

“후후, 지금쯤이면 진법의 기초를 모두 익혔겠군.”

“대단하십니다.”

우책사가 총책사의 교육 방침에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비록 그 때문에 제자와 함께 시험을 치는 지원자들 대부분이 헛고생을 하게 되겠지만, 잘 키운 천재 하나가 평범한 수재, 기재 열을 웃도는 법이다.

둘은 그 방법이 보다 큰 대의를 위해 당연해 치러져야 하는 수순으로 이해했다.

설령 제갈세가와 종리가가 문왕의 재능에 양분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둘은 그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래, 내 제자 이야기는 이쯤하고, 자네 제자는 어떤가?”

딱!

그 순간, 총책사의 맹공이 들어왔다.

이 또한 뻔한 수였지만 우책사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키워보고는 있지만…… 과연 책사인 제가 그 아이를 맡아도 될는지…….”

맹의 우책사라는 직책은 단순히 머리만 좋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책사인 동시에 한 차례 벽을 넘은 무인이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담은 끝없는 지혜가 벽을 넘은 무인의 가치를 월등히 뛰어넘었기에, 그는 책사로서 본 맹을 지탱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런 우책사조차 꺼리는 제자의 재능.

그것은 문왕의 재기와 정반대인 무인으로서의 재능인 무왕(武王)의 재능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 아이에게 자네는 최고의 스승이 될 터이니.”

“그럴까요?”

“노파심에 한마디 하자면, 그 아이의 재능은 이미 무인의 틀을 벗어났으니, 자네 또한 무인에 국한하지 말고 책사의 능력까지 모두 사용해 제자를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할 걸세.”

“아!”

그 순간, 머릿속의 근심이 사라진 건 물론이고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까지 얻었다.

“후후!”

총책사가 한결 맑아진 우책사의 눈빛에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딱!

“음?”

그러나 입가의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자네!”

제자 육성에 대한 조언은 감사하나, 그것과 승부는 어디까지나 별개.

우책사는 아까보다 더욱 강한 공세를 펼쳤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그때, 정자 앞으로 차분한 검정 장포 차림의 문사가 달려왔다.

“어르신들!”

“사마 선생, 왔는가?”

“자네도 와서 한 수 두겠나?”

둘은 자신의 세수의 절반도 못 미치는 사마중을 거리낌 없이 선생이라 불렀다.

배움을 구하는데 신분고하는 물론, 나이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수세에 몰리는 총책사로서는 이 판을 반전시킬 실마리가 특히 목말랐다.

허나 아쉽게도 사마중은 바둑을 둘 틈이 없었다.

“첫 번째 시험에 관해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렇군.”

딱!

“들어볼까?”

딱!

그 즉시 두 노인이 사마중을 향해 몸을 돌렸다.

딱딱!

그러나 한 손은 여전히 바둑돌을 놓고 있었다.

둘 다 바둑판에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한 수 한 수가 모두 최상의 수였다.

“시험은 잘 끝마쳤나?”

“그게…….”

“문제가 생겼나 보군.”

“그렇습니다.”

“허허!”

사마중이 영 좋지 못한 보고를 올리게 돼 죄송스럽다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두 노인은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예상했다.

“역시 종리세가겠지? 그들 가문은 특히 고집이 세고 편협하니까.”

“허나 그게 나쁘다고만은 할 수는 없지. 그만큼 집요하게 한 가지만 파고드는 점이 종리세가의 큰 강점이니까. 아니면 제갈세가인가? 그들의 고매한 성정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일로 불평을 제기하진 않을 텐데?”

사실 어느 가문이라도 상관없었다.

아예 지원자 전원이 합세해 불평불만을 제기해도 두 노인은 단숨에 침묵시킬 수 있을 만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러나 이후 사마중이 알려주는 내용은 그 둘에게도 충격 그 자체였다.

“무엇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둘의 상상과 권력을 훌쩍 뛰어넘는 일이 벌어졌다.

“여하튼, 두 분께서 서둘러 와보셔야겠습니다.”

사마중이 서둘러 두 노인을 문제의 시험장으로 데려가려는데.

쿠쿠구궁!!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이거면 되겠군.”

진천우가 검을 들고 광장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처음 사마중과 맹의 무인들이 서 있던 간의 천막이 있었다.

딱 적당한 길이.

슥!

즉시 천막을 지탱하는 나무 기둥을 베었다.

진천우는 즉시 잘린 기둥을 뽑고, 그 자리에서 기둥 끝을 검으로 깎았다.

사각사각!

이게 대충하는 것처럼 보여도 나름 철저한 계산 끝에 한 칼 한 칼 장인의 손길로 깎는 거다.

“잠깐!”

그러던 와중에 갈의 청년이 끼어들었다.

“여기 이 부분은 그것보다 반 치 더 깊게 깎아야 합니다.”

그는 바로 진천우의 실수를 지적했다.

만일 진천우가 다소 편협한 사고를 지녔다면 대번 반발했겠지만.

“정말이군.”

그는 순순히 실수를 인정했다.

그러자 문왕의 재능을 지닌 천재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제 능력을 알아봤으면 당장 손에 든 검을 내놓으라는 양.

슥!

하지만 진천우는 그 손을 무시하고 다시 말뚝을 깎았다.

바로 천재가 지적한 부분을 손보았다.

그리고 다음 말뚝을 깎으려는데.

“거긴!”

“굳이 깎을 필요가 없다는 소리지?”

“어, 어떻게?”

정답.

분명 조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어떻게 답을 알아낸 거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스킬 ‘진법’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조금 전의 지적으로 진천우의 진법 숙련도가 크게 상승했다.

아무튼, 이런 식이면 그에게 검을 내놓으라고 할 수 없었다.

갈의 청년 또한 편협하지 않은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자신이 진천우보다 월등히 뛰어남을 증명하지 않고서는 그에게서 검을 뺏을 수 없었다.

“칠(七)에 사(四).”

천재가 갑자기 숫자를 외쳤다.

“이(二)에 오(五).”

그러자 진천우도 지지 않고 다른 숫자를 외쳤다.

모두 진법 해체에 필요한 수치 계산.

[스킬 ‘진법’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당연히 그럴수록 진천우의 숙련도가 눈에 띄게 올랐다.

허나 숙련도가 오르는 건 진천우만이 아니었다.

갈의 청년은 천재다.

그것도 문왕의 재능을 지닌 천재.

“팔에 육에 오.”

“구에 일에 일.”

어느새 둘이 외치는 숫자가 하나 더 늘었다.

둘은 서로를 의식하며, 마치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무섭도록 빠르게 성장했다.

슥!

그사이 진천우가 필요한 말뚝을 모두 깎았다.

그는 총 열두 개의 말뚝 중 절반을 천재에게 건넸다.

둘은 그대로 일언반구도 없이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그 뒤, 서로 경쟁하듯 말뚝을 땅에 꽂았다.

쾅!!

둘이 동시에 마지막 말뚝을 땅에 꽂았다.

진법은 크게는 자연지기를 이용해 법칙을 비트는 학문.

그들은 말뚝을 매개 삼아 땅에 흐르는 강대한 힘인 지맥을 조정했다.

본 맹이 자리한 땅은 천하에 손에 꼽히는 최고의 명당.

우르릉!

그 강대한 지맥의 힘이 말뚝을 타고 올라, 시험장의 진법을 크게 흔들었다.

진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졌다.

당연히 둘은 이대로 진법이 완전히 와해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우르릉!!

“음…….”

우르르르릉!!!

“어…….”

어째 시간이 지나도 진법은 깨지지 않고 진동만 계속 거세졌다.

“엇?!”

“아!?”

둘이 동시에 뭔가를 깨달았다.

“실수다!”

“실수했어!”

아니, 정확히는 실수가 아니었다.

둘은 시험장의 진법을 부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지맥을 이용하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문제는 시험장의 진법이 하나의 독립된 진법이 아니라, 본 맹을 감싸는 가장 커다란 대진법과 연계돼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시험장의 진법을 부수려면, 본 맹을 둘러싼 대진법도 함께 무너트려야 한다.

둘이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자마자!

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이제 진동은 시험장의 진법에만 국한되지 않고, 아예 땅까지 뒤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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