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 무한의 계단 (4) (147/210)


147화 : 무한의 계단 (4)
2022.06.08.


“진……?”

현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한 두통이 몰려왔다.

잊었던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조금 전에 한번 떠오른 기억이 다시 지워지는 걸 막는 느낌이었다.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기억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 가.

“…….”

입을 다물었다.

요동치는 두 눈도 곧 평정을 되찾았다.

더는 두 눈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기억을 되찾은 걸까?

그게 아니면…….

“돌아가겠습니다.”

현석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움직임으로 새로 얻은 마도를 챙기고, 흐트러진 옷가지를 정리했다.

“벌써 돌아가겠다고?”

검선이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녀석은 조금 전까지 극도로 괴로워했다.

틀림없이 마도의 두 번째 시험 때문이다.

그는 현석이 어떤 기억을 떠올렸기에 그렇게 괴로워했는지 궁금했다.

허나 당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데, 그걸 억지로 추궁할 수는 없었다.

단, 검선은 현석에게 바로 돌아가는 건 무리라는 걸 알렸다.

“검봉은 오르는 것도 힘들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평범하지 않다.”

무한의 계단.

검봉을 오르는 데 피할 수 없는 관문인 이것은,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한은 방향에 상관없이 무한이기 때문이었다.

방금 막 마도의 시험을 연달아 치러 기진맥진한 몸으로 무한의 계단을 멀쩡히 내려가는 건 불가능했다.

“따로 방을 내주지. 거기서 조금 쉬었다가…….”

“괜찮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그 몸으로는 무리일 텐데?”

“괜찮습니다.”

휙!

그 직후, 현석은 일말의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

그 모습을 검선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만일 그가 하려고만 하면 지친 현석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검선은 그러지 않았다.

“도대체…….”

검선은 현석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마지막 순간, 그는 현석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검선은 똑똑히 보았다.

제가 미처 손을 뻗기 전에 먼저 자신 쪽을 바라보는 놈의 눈을.

그건 한없이 감정을 죽인 눈이었다.

만약 그대로 계속 손을 내뻗었다간, 현석은 그 자리에서 마도를 뽑아 자신에게 달려들었을 거다.

검선은 마냥 호인이 아니다.

상대가 먼저 무기를 뽑고 달려든다면, 아무리 까마득한 후배라 할지라도 봐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현석을 그대로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발견한 마도의 주인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낼 순 없었으니까.

‘재밌군.’

검선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쪽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 대의 마도의 주인은 보통 걸물이 아니다.

‘어쩌면…….’

그가 조심스럽게 제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이 신검의 주인은 녀석에게 먹힐지도 모르겠어.’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슥!

검선이 다시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 이 계단을 통해 신검이 주인의 올라오길 고대하며.

* * *

휙!

검선의 방해 없이 검봉을 내려가기 시작한 현석의 뇌리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세 가지 명을 완수해라.

그의 사부, 그러니까 사도련주의 목소리였다.

현석은 련주가 내린 세 개의 명령 중 하나를 방금 완수했다.

‘이제 남은 건 둘.’

그 둘만 모두 완수하면.

‘나는 자유다.’

현석은 자유가 되기 위해 제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모조리 박살 낼 생각이었다.

설령 제 목숨을 버리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서 자유를 얻어 무엇을 하려는 걸까?

“…….”

그것은 오직 당사자만이 알 따름이었다.

* * *

타탁!

진천우가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무한의 계단.

검봉을 오르는 관문은 생각 이상으로 까다롭고 힘들었다.

단순히 경공과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쉬지 않고 올라야 하는 제약 외에도 계단 중간중간에서 방해물이 쉬지 않고 튀어나왔다.

휘청!

지금처럼 일부러 교묘하게 각 계단의 높낮이를 바꾼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 함정은 평범해 보였지만 아주 큰 효과를 지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다른 계단과 다를 바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걸음이 어긋날 수밖에 없는 함정이기 때문이었다.

“흥!”

허나 진천우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넘어지면 또 처음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시간을 끌어도 처음으로 돌아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휙!

그 순간, 등 뒤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단검?’

그는 단번에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물체를 파악했다.

그래서 더 놀랐다.

‘허공에서 난데없이 단검이라니?’

십중팔구 환영이다.

허나 십중팔구란 말은, 하나 내지 둘은 진짜일 수도 있다는 소리.

더군다나 무한의 계단의 고도의 진법으로 이뤄진 장소다.

따로 숨은 기관이 있어 단검이 날아왔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슥!

어쩔 수 없이 진천우는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단검이 날아오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 손으로 쳐내기 힘들었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단검을 피했다.

스륵!

목표를 잃은 단검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역시 환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휙! 휙휙휙!

그 직후, 사방에서 단검이 날아왔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하지만 진천우는 이미 이 상황을 예상한 듯, 바로 몸을 움직였다.

팔을 들고, 허리를 비틀고, 발을 쳐들어 단검을 피했다.

‘하나하나 전부 정교한 환영이구나.’

모든 단검을 피하자, 그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휙!

눈을 속이는 환영이 또 날아왔다.

진천우는 이번에도 몸을 틀어 환영을 피했다.

이번에 날아온 단검의 방향이 아주 교묘했다.

그 탓에 하마터면 두 계단을 동시에 오를 뻔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한 계단씩 오르지 않는 행위도 처음으로 돌아가는 조건임을 깨달았다.

슥!

역시나 비껴낸 단검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허나 진천우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휙! 휙휙!

그 뒤에도 단검이 계속 날아왔지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저게 정말 환영이라면 굳이 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눈을 어지럽히는 환영을 무시하고 묵묵히 위로 올라가는 게 무한계단의 의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환영을 전부 피하면서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게 더 어렵지.’

진천우는 타이쿤을 잘 안다.

알아도 너무 잘 안다.

-확실한 성과에는 명확한 보상을.

이 규칙은 설령 타이쿤의 의도가 아니고, 자신이 일부러 조건을 어렵게 한 경우에도 적용되었다.

그는 진실로 타이쿤을 믿고 위로, 계속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쉬지 않고 날아오는 환영을 얼마나 피했을까?

심지어 그것들 중 단 한 개도 진짜 단검이 없었지만, 진천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계속 그것들을 피했다.

얼마 안 가 눈앞에 푸른 현판이 나타났다.

[‘시련 안의 시련’을 달성하였습니다.]

[사용자는 무수히 날아오는 환영 속에서 그것이 환영임을 인지하면서도 그 모든 환영을 완벽히 피하며, 계속 위로 올라갔습니다.]

[특수 조건을 이행했습니다.]

[무한계단 속에 숨겨진 ‘비밀 루트’가 개방됩니다.]

‘비밀 루트? 그러니까 샛길 같은 건가?’

하지만 그저 위를 향해 뻗은 계단에 무슨 샛길이 있다는 거지?

쿠쿠쿵!

진천우는 잠시 뒤, 자신의 무지를 반성했다.

그렇게나 타이쿤을 겪었으면서도 아직 믿음이 부족했다.

“하하!”

부족한 믿음 때문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계단이 둘로 나뉘었네?’

쭉 길게 뻗어나가던 계단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두 계단의 색이 완전히 달랐다.

하얀 계단과 검은 계단.

“하!”

그런데 진천우는 그것들을 확인하더니, 또 한 차례 소리를 질렀다.

어쩔 수 없었다.

저것들을 보자마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어쩜 이리도!

‘노골적이지?’

하얀 계단은 올곧았다.

그리고 잘 닦인 관도처럼 크고 넓었다.

계단의 높이도 일정해서 어려움 없이 올라갈 수 있어 보였다.

특히나 진천우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계단 중턱에 웬 호리병이 보였다.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게 절로 시원해 보였다.

꿀꺽!

호리병을 보자 저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아까부터 쉬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일체 내공 없이 순수한 육체 능력만으로 올라온 탓에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차갑게 식힌 호리병이라니.

안에 술이 들었을지 물이 들었을지 몰라도, 당장 마개를 따고 안의 내용물을 마시고 싶었다.

반면 하얀 계단 옆의 검은 계단은 최악이었다.

‘우선 좁고.’

또한 가팔랐다.

경사가 너무 가팔라 자칫 굴러떨어질 정도였다.

허나 진천우가 검은 계단을 경계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우웅!

계단 전체가 낮게 진동했다.

거기에 더 귀를 기울이면 낮은 기계음까지 들렸다.

‘진법에 이어 기관까지 설치돼 있군.’

처음에는 둘 다 함정이라 생각했다.

대놓고 함정인 검은 계단은 제쳐두고라도, 흰 계단에도 틀림없이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타이쿤이 곧바로 샛길이 의도를 알려주었다.

[시련 안의 시련을 통과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저게 보상이라고?’

[숨겨진 비밀 루트를 따라가면, 보다 편하고 안락하게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밀 루트’ 초입에 놓인 ‘목숨주’를 마시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효과를 세 번까지 무효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적어도 타이쿤은 보상에 있어 거짓이 없었다.

그러니 저 글귀는 사실이 분명했다.

‘게다가 처음으로 돌아가는 효과를 세 번이나 무효화할 수 있다니.’

이 보상의 가치는 상당했다.

지금까지 대충 절반쯤 올라왔다.

남은 절반에서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세 번이나 주어진다는 건, 이미 무한계단을 점령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진천우가 발걸음을 서둘렀다.

얼마 안 가 갈림길에 도착했다.

여기서 오른쪽은 하얀 계단, 왼쪽은 검은 계단이었다.

씨익!

진천우가 입꼬리를 가볍게 비틀며, 바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선택이었다.

쿵!

그의 오른발이 다음 계단을 밟았다.

검고 검은 계단을.

진천우가 굳이 하얀 계단을 내버려 두고, 검은 계단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확실한 성과에는 명확한 보상을.

자신은 아직 무한계단을 모두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중간에서 보상을 받아봤자 감질만 날 뿐이지.’

이왕 보상을 받으려면 모조리 털어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전부 잃는 게 낫다.

‘어차피 난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실패?

까짓 거, 그냥 처음부터 다시 도전하는 게 다다.

그런데 일부러 중간 보상을 받아 최종 보상을 깎을 이유가 없었다.

그거야말로 진천우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진짜 이유였으며.

[사용자가 중간 보상을 거절했습니다.]

[사용자가 무한계단의 난이도를 억지로 상승시켰습니다.]

[만일 이대로 사용자가 무한계단을 공략한다면, 보상이 두 배로 적용됩니다.]

타이쿤이 그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쿵!

그리고 진천우가 검은 계단에 첫발을 들인 그 순간.

“억?!”

그의 몸에 생각지도 못한 효과가 펼쳐졌다.

1658364981786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