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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 아버지 (2) (155/210)


155화 : 아버지 (2)
2022.06.27.


진씨세가의 가주가 눈을 부라리며 가문 주위를 살폈다.

아무래도 맨눈으로는 자세히 살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는 소매 안에 아들 선물로 챙겨온 물건 중 멀리 서역에서 힘들게 넘어왔다는 천리경을 꺼냈다.

과연 천 리 거리를 바로 코앞까지 당긴다는 기물답게, 가문 주위에 숨은 잡것들을 속속들이 살필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그런데 그 잡것들이 너무 많다.

당장 오른편에는 근방에 보기 드문 검은 무복 차림의 무인들이 두셋 무리를 지어 진가를 살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붉은색 무인들이 뭉쳐있고…….’

더 아래에는 흰 무복 차림 무인들도 보인다.

설마 겨우 저 세 무리뿐일까?

‘틀림없이 인파에 몸을 숨긴 잡것들도 따로 있겠군.’

그런데 이쯤 되면 도리어 의문이 든다.

‘왜 하필 우리 가문에 저런 게?’

진씨세가는 이 인근에서 제법 명망 있는 가문이다.

허나 이곳은 변방 중의 변방.

여기서 아무리 명망이 높아봤자 촌구석 장로에 지나지 않는다.

겨우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 가문에 뭘 먹을 게 있다고 저런 잡것들이 몰려든 거지?

‘가문 안에서 금광이라도 발견했나?’

그게 아니면 도대체 뭐지?

이때, 천리경을 쓰는 가주의 시야에 뭔가가 잡혔다.

“응?”

잡것 중 아는 얼굴이 있었다.

물론 저 잡것은 자신을 모를 거다.

‘저자는 분명 사천백대검수 중 한 명이 아닌가?’

사천에서 백 명 안에 드는 고수라면 천하에는 천 명 안으로 꼽히는 수준.

그 정도면 어딜 가든 어깨를 으쓱대며 돌아다닐 수 있다.

사천에서 독의 명가로 유명한 당가에 혹시 아들의 천형에 대한 해약이 없을까 찾다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딱 한 번 마주쳤지만, 원체 머리가 비상한 그는 한 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서 문제는, 저 정도 거물이 진씨세가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잡것들 사이에 포함돼있다는 점이다.

‘정말 뭐지?’

저만한 거물을 움직일 정도면 천하 삼대 단체인 맹이나 련, 교 중 하나가 움직였다는 소리.

왜 그렇게 되냐면, 저런 거물을 이런 시골 깡촌에 보낼 수 있는 곳이 딱 거기뿐이기 때문이다.

‘설마 나 없는 사이, 가문 중 누군가가 맹이나 련, 교에 사고를 친 건가?’

그런데 그런 거면 진작에 진씨세가가 지도에서 쓸렸지, 이렇게 잡것들로 주위를 염탐하는 귀찮은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 모르겠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문투성이였다.

‘일단 가문으로 들어가서 사정을 알아봐야겠군.’

자신이 없는 동안 진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도대체 뭣 때문에 가문 주위에 저런 자들이 어슬렁거리는지.

‘제발 누군가 알고 있기를!’

진씨세가의 가주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만약 가솔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른다면, 이건 정말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사람들이 지키는 곳에 어떻게 들어가지?

중년인은 다른 이도 아닌 진가의 가주였기에, 필시 문 앞에 모습을 보이자마자 알아보는 이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단 가봐야겠군.’

진씨세가의 가주가 즉시 몸을 움직였다.

* * *

“음?”

진씨세가의 주방을 책임지는 이는 누가 뭐래도 운 숙수였다.

그가 없는 진가의 주방은 상상도 할 수 없고, 그만큼 운 숙수는 진씨세가의 주방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주방 구석에 쌓아둔 밀 포대가 몇 개인지, 냄비와 도마의 수는 얼마고 그 외 각종 조미료의 종류와 양이 얼마인지조차 운 숙수는 하나하나 기억했다.

그렇기에 그는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의아함을 느꼈다.

‘누군가 주방 집기를 건드렸다.’

분명 저쪽에 있는 칼은 저쪽 도마가 아니라, 반대편 도마 위에 놓여 있어야 했다.

그리고 냄비의 위치도 달라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주방 구석 식료품 창고 쪽이었다.

‘잠금장치가 고장 나서 언제나 일부러 문을 조금 열어두는데, 지금은 꽉 닫혀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누군가 진씨세가의 주방에 몰래 들어왔다.

‘어떤 놈이 감히!’

운 숙수는 즉시 가장 가까이 있는 칼꽂이를 살폈다.

없다!

‘여기 있는 열 개의 주방 칼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칼이 없다.’

분명 어제 주방 문을 잠그면서 열 자루가 다 있는 걸 확인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없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철컹!

그 순간, 주방 창고의 문이 움직였다.

철컹철컹!

문고리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만약 저기 있는 게 도둑이라면, 지금 즉시 달아나야 했다.

운 숙수가 설령 여기 있는 주방 칼을 손에 든다고 해도, 홀로 도둑과 맞서 싸우는 건 무리였다.

거기다 도둑이 무공이라도 익혔다면?

만의 하나라도 그가 무사할 확률은 없었다.

슥!

헌데도 운 숙수는 당돌하게도 창고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

아니, 그냥 다가가는 데 그치지 않고, 곧바로 잠겼던 창고 문을 확 열어재꼈다.

예상대로 창고 안에는 주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가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런데 운 숙수는 놀라기는커녕 도리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안에 있는 이는 확실히 주방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맞다.

그러나 그는.

“어째서 가문의 주인께서 이 누추한 곳에 계신 겁니까?”

벌써 수년째 소식이 없던 이곳의 주인이었다.

* * *

덜컹!

“급한 대로 이거라도 드십시오.”

운 숙수는 오늘 아침으로 내놓으려고 어젯밤부터 끓이고 있던 국을 가주 앞에 내놓았다.

“고맙네! 후룩!”

진씨세가의 가주가 헐레벌떡 제 앞에 놓인 그릇을 들이켰다.

붉은 고깃국이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진하고 깊었다.

운 숙수가 수년 만에 주방을 찾아온 가주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대체 어쩌다 가주가 제집 주방에서 먹을 걸 찾다 고장 난 창고에 갇히는 일이 생긴 건지.

“도대체 그동안 어딜 가신 겁니까? 왜 서신조차 전하지 않으신 거고요.”

“그건 미안하게 됐네.”

“휴! 아니,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그건 됐습니다. 그럼 그것보다 왜 가문의 주인께서 멀쩡한 대문을 놔두고, 주방 구석에 남몰래 파둔 비밀 통로로 오신 건지나 설명하시죠.”

비밀 통로?

사실 운 숙수는 가주의 사람이었다.

어디 진가의 식속 중 가주의 사람이 아닌 자가 있을까 싶지만, 그는 특히 더 진 가주의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충복?

그 때문에 그는 가주가 아니면 모를 진씨세가의 비밀의 일부를 알고 있었다.

오늘처럼 혹시나 주방에 침입자가 나타났을 때, 만일 그자가 열 개의 주방 칼 중 자루가 새파란 칼만 가져가면, 그건 가주의 방문을 알리는 신호란 것도 충복이기에 알 수 있었다.

“내 급한 사정이 있어 비밀 통로를 쓰게 되었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내가 들른 곳은 여기뿐이 아니네.”

“네?”

“맨 먼저 가주전에 들렀지. 그런데 없었네.”

“뭐가? 아!”

덥석!

진가의 가주가 급히 운 숙수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어디 갔나? 왜 진가의 가모가 가주전에 없는 거지? 그리고 왜 내 아들이 자기 처소에 없는 건가? 도대체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겼길래!!”

안 그래도 가문 바깥에 깔린 잡것들 때문에 몰래 숨어들어왔는데,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이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아무 가솔을 붙잡고 사정을 묻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여기서 운 숙수를 기다렸다.

운 숙수도 가주의 마음을 알아채고 바로 그간 진씨세가에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뭐라?!”

그리고 그 사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일뿐이었다.

일단 가장 가벼운 일은.

“그러니까 부인은 잠시 친정으로 떠났다?”

“네, 그렇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부인은 단순히 외출한 것이었다.

그것도 홀로 나간 게 아니라 진검대주와 동행했다고 하니, 안전상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부인이 외출을 했다고?’

안 그래도 자신이 없는 가문에 부인마저 없으면 아픈 천우를 누가 돌보지?

그런데 운 숙수가 그 의문을 단번에 타파해주었다.

“가주님, 놀라지 마십시오. 소가주께서 침상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뭣?”

“놀라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정말입니다. 소가주께서 침상에 일어나셨을 뿐 아니라, 제가 만든 요리도 배불리 드셨습니다.”

“뭐라고?!”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진가의 가주는 기뻐하기보다 걱정이 앞섰다.

설마하니 아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게 천형을 극복한 게 아니라, 죽기 직전 마지막 불빛이라면?

이 가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재 가문에는 그자가 있었다.

“장 의원이 내 아들을 일으킨 건가?”

사기꾼, 장 의원.

처음 그를 가문에 들인 건 가모였지만, 그 뒤에는 바로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가주는 장 의원이 사기꾼임을 알았다.

‘허나 그가 익힌 요상절초십팔수는 천우의 발작에 가장 효과 있는 대법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수를 써서 놈을 몰래 가문에 들인 건데.’

아무리 제가 없는 동안 고육지책으로 들여놓았어도, 장 의원은 사기꾼이었다.

혹시나 그사이 어떤 썩을 짓으로 제 아들의 몸을 좀 먹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운 숙수가 뒤이어 또다시 믿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장 의원? 그 사기꾼 장가놈 말입니까? 말도 마십시오. 그자는 진작에 맹에서 내쫓은 지 오래입니다.”

“장 의원을 내쫓았다고?”

“의원이 아니라 장가놈이라니까요!”

“아무튼, 그러니까 내 아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게 장가놈 때문이 아니라고?”

“네, 그렇습니다. 소가주께서는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런!”

분명 아들이 천형을 극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건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다.

당장 가주의 두 눈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허나 그는 사정상 무작정 기뻐하지 못했다.

기쁘지만 동시에 매우 곤란했다.

‘진가의 의지가 발동했구나!’

역시나 가주는 진천우의 예상대로 진가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또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 잠시 다녀올 테니, 운 숙수는 내가 가문에 들렀던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게.”

“네? 어째서?”

“아무튼 반드시 내 말대로 하게!”

가주는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운 숙수에게 다짐받고, 다시 주방에 숨겨진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그는 비밀 통로를 통해 지하로 들어가자마자 없는 체력을 모두 사용해 빠르게 내달렸다.

그런데 그가 지금 당장 찾으려는 이는 제 아들이 아닌, 영 엉뚱한 이였다.

‘현석이! 어서 현석이를 찾아야 한다!’

왜 가주가 현석을??

* * *

“도착했구나.”

현석은 사부와 함께 련을 찾았다.

사파의 전 세력이 모인 련은 정파의 전 세력이 모인 맹과 함께 천하를 삼분하는 가장 큰 세력.

그 둘이 모습을 보이자마자 련이 한바탕 뒤집혔다.

곧바로 수십의 고수가 튀어나와 대로의 양측에 도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련에서 나온 이들의 수가 배의 배로 늘었다.

결국 현석과 그의 사부가 련의 입구에 들어선 순간, 기백이 넘는 련의 고수들이 그들을 에워쌓았다.

평소 잘 놀라지 않는 현석이지만, 그 놀라운 광경에 눈을 살짝 치켜뜨며, 사부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사부의 정체가 뭐길래?’

사실 그는 이미 제 사부의 정체를 대충 예상했다.

이 일은 단지 제 예상을 확신으로 만드는 데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사부는 련의…….’

그런데 갑자기!

척!

사방에 도열한 고수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 무기를 하나같이 제 사부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 저 죄인을 포박해라!!”

뭐, 뭣?!!

현석의 확신이 와장창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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