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 경계 너머의 무인 (2)
(169/210)
169화 : 경계 너머의 무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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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 경계 너머의 무인 (2)
2022.07.30.
‘경계…….’
진천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껏 타이쿤이 몇 번이나 경계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간접적이었다.
지금처럼 직접 눈앞에 나타난 건 이번이 처음.
도대체 경계란 뭘까?
진천우가 타이쿤의 경고에 여러모로 긴장하는 사이, 기절한 동료를 살피던 무진이 앞으로 나섰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뜻밖에도 상대는 제 정체를 순순히 알려주었다.
“사패검주다.”
‘사패검주?’
아쉽게도 처음 듣는 말.
진천우는 나름 무림에 입문한 뒤부터 무림인들의 상식이나 정보 등을 습득했지만, 여전히 많이 부족했다.
“사패검주!”
다행히 무진은 그 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날 아나?”
의외로 당사자도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자 놀라는 눈치였다.
“제가 알기로 사패검주는 전전대 정사지간 고수 중 가장 뛰어난 넷을 뜻하던 말입니다만.”
무진이 한껏 찡그린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전대 고수만 하더라도 대개 백발이 장성한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
그런데 전전대?
정말 손가락에 꼽을 수를 제외하면 모두 땅에 묻혀있을 존재다.
그러한 자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매우 젊은 모습으로.
“혹 전설로만 전해지는 반로환동을 하셨습니까?”
무진이 스스로 사패검주 중 하나라 밝힌 이의 검은 머리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머리색뿐이 아니다.
상대는 손과 얼굴도 청년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충분히 진천우나 무진과 같은 또래라 해도 믿을 법한 외양.
누가 봐도 사기 같지만, 무진은 혹시 몰라 되물었고, 상대는 그 질문에 피식 실소를 뱉었다.
“설명한들, 무슨 소용인가?”
“무슨 뜻이지요? 혹 괜찮으시다면, 이 상황에 대해 여쭤도 될는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하께서는 사패검주 중 누구십니까?”
그가 이 참사를 일으킨 장본인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무진은 애써 참을성을 발휘하며 상대에게 계속 질문했다.
특히 마지막 질문이 중요했다.
사패검주에 속한 넷은 모두 정파도 사파도 아닌 정사지간이지만, 그래도 그중 비교적 온건한 정파 성향으로 유명한 자가 둘이나 있었다.
“내 이름은 장길이다.”
장길, 사패검주 중 네 번째인 그는 그나마 정파 성향의 인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제 이름을 밝히는 동시에 검을 뽑더니 곧바로 무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챙!
무진이 기겁하며 사패의 검을 막았다.
“호?”
장길이 가볍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 제 검이 막힐 줄이야.
당연히 단번에 녀석의 몸을 가르고, 그대로 다른 녀석을 베어버리려 했는데?
“제법 괜찮은 무재를 타고났구나.”
그저 괜찮은 무재?
무진은 무왕의 재능이라 불리며, 맹에서 전력으로 밀어주는 인재였다.
휘릭!
무진의 검이 사패의 검을 타고 올랐다.
그 모습은 나무를 빠르게 타고 오르는 뱀을 연상시켰지만, 정작 검에 담긴 웅혼한 기세는 용의 기운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허나.
챙!
사패는 그 상태에서 가볍게 손목을 비틀어, 제 검을 타고 오르는 무진의 검을 쳐내더니, 그대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무진의 요혈을 향해 검을 찔렀다.
“큭!”
다행히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했지만, 대신 가슴팍이 길게 찢겼다.
물론 가슴이 완전히 갈리는 것보다는 월등히 나은 결과였다.
“허!”
이를 본 사패가 또 한 번 감탄했다.
제 검을 무려 두 번이나 피하다니.
자신이 저 또래일 때는 저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그렇기에 욕심이 났다.
“정말 제법이구나. 내 네놈의 재능을 귀히 여겨 제자로 받아주마. 내 제자가 된다면 너는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 거다.”
“그 말인즉, 여기서 일어난 참사가 당신의 짓이란 겁니까?”
“그깟 게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네놈이 궁금해하는 듯하니 알려주지. 맞다. 내가 그랬다.”
“어째서?”
“내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사패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주위 분위기가 급변했다.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진 듯, 몸을 찍어눌렀다.
말 그대로 초고수의 기세.
그는 이쯤 보여주면 당연히 무진이 겁을 먹고 제 제안을 수락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하나만 더 묻고 싶군요.”
“내가 네놈에게 듣고 싶은 건, 질문이 아니라 대답이다.”
쿵!
또다시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무진은 인상을 찡그리기는커녕, 도리에 입가를 가볍게 비틀었다.
“그 대답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이 정도로 반응을 보이니, 사패도 호기심이 들었다.
결국 그는 어디 물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이 천천히 입을 뗐다.
“당신, 검선 어르신보다 강합니까?”
“뭣?!”
검선은 사패검주 시절에도 널리 알려져 있던 이름이다.
사패검주가 기껏해야 정사지간에서 손꼽히는 초고수라면, 검선은 그 당시에도 첫손으로 꼽히는 고수.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아니, 왜 내 질문에 답하겠다면서 검선에 대해 묻는 거지?”
사실 굳이 답을 들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지만, 무진은 예의 바르게 답을 해주었다.
“그건 제가 검선 어르신보다 약한 분의 제자가 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우웅!
대답과 동시에 무진은 자신의 검에 우윳빛 기운을 두르고 앞으로 튀어올랐다.
사패가 맹의 선발대를 습격한 게 확실시 된 이상, 그는 그저 적이다.
쩡!
곧바로 커다란 굉음이 터지며, 그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허나 검을 맞댄 둘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휘릭!
그의 검이 다시 사패의 검을 타고 올라갔다.
그 기세와 속도가 처음과 비교되지 않았다.
검선에게 직접 전수받은 무진의 검법은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검법을 늘어놔도 당연 첫 손에 꼽힌다.
텅!
“큭!”
사패가 아까처럼 손목을 비틀어 무진의 검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되레 자신의 손이 튕기며 시큰한 충격만 받았다.
이딴 애송이가 이처럼 위험한 이빨을 숨긴 채, 자신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다니.
“놈!!”
허나 역시 사패검주는 사패검주였다.
아무리 무진이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대단한 검법을 펼친다 해도, 전전대 정사지간에서 네 손가락으로 꼽히는 사패의 현란한 무공과 묵직한 내공을 생각하면 이깟 애송이쯤.
챙!
“응?”
챙챙!
“이이!”
……쉽게 떨쳐낼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무진은 끈질기게 사패에게 달라붙었다.
제 생각보다 검선의 검법이 훨씬 뛰어난 걸까?
우우웅!
사패가 짜증을 참지 못하고, 제 검에 급히 내공을 주입했다.
그가 무림을 강타할 적 즐겨 사용한 패왕검이었다.
‘설마 이깟 애송이를 상대로 이것까지 사용할 줄 몰랐지만.’
휙!
패왕의 기세를 담은 검이 무진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쾅!
“윽!”
무진이 한껏 창백해진 얼굴로 뒤로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어째서!”
이를 본 사패가 크게 소리쳤다.
본래 그는 방금 일격으로 저놈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겨우 다섯 걸음 물러나는 거로 끝난다고?
놈에게 재능과 빌어먹을 검선의 무공 외에 또 다른 게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뒤늦게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신검! 네놈이 신검을 지니고 있었구나!”
푹!
그 순간, 무언가 사패의 가슴을 뚫고 위로 솟구쳤다.
“…….”
그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진천우가 사패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네놈!”
“뭐? 왜? 사패검주라는 작자가 이딴 기습에 당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맞는 말이다.
그의 명성을 생각하면, 아무리 기습이라도 이런 애송이에게 당한 건 수치나 다름없다.
거기다 사패는 처음부터 진천우가 기습을 할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무진이 검선에 이어 신검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자꾸 꺼내는 탓에, 놈을 경계하는 데 잠시 소홀해졌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진천우가 순간, 그의 감각을 뛰어넘는 속도로 달려왔다는 것 또한 사실.
여덟 걸음.
그가 지닌 최고 절기는 과거 초고수의 감각조차 뛰어넘었다.
“흥!”
그러나 놀랍게도 사패가 심장이 뚫린 상태로 반격했다.
쾅!
예상치 못한 반격에 진천우가 뒤로 날아갔다.
“크으!”
다행히 검집으로 막은 덕에 피해는 크지 않았다.
“멍청한 놈.”
사패가 쓰러진 진천우를 노려보며 다시 검을 들었다.
가슴의 상처?
이깟 것은 경계를 넘은 자신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검도 아닌 평범한 검에 당한 상처 따위는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다.’
당연히 사패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떠벌릴 멍청이가 아니었다.
일단 신검을 지닌 애송이부터 처리한 뒤, 다음으로 제 감각을 속일 정도의 신법을 지닌 놈을 처리하면 그만이다.
그가 즉시 제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려는데.
울컥!
“어?”
갑자기 입에서 피가 한 됫박이나 나왔다.
부들부들!
그리고 온몸이 미친 듯 요동쳤다.
이게 무슨 일이지?
분명 제 몸을 상해할 신검은 방금 날아간 놈이 아닌, 다른 애송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런데 왜 저놈이 찌른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 거지?’
사패는 몰랐다.
확실히 신검의 껍데기는 무진이 지니고 있었지만, 그 안의 내용물인 신검의 의지는 진천우가 지녔다는 걸.
게다가.
푹!
“커억!?”
확실히 쐐기를 박기 위해, 무진 또한 고개 돌린 사패의 가슴을 신검으로 찔렀다.
“이, 이놈이!!”
“어딜 보냐?”
퍽!
사패가 그 즉시 무진을 공격하려던 찰나, 조금 전 날아갔던 진천우가 어느새 다가와 뒤통수를 가격했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아찔한 충격.
“어딜 기절해서 편해지려고.”
쾅!
“컥!”
진천우가 이번에는 면상을 후려치며 놈을 깨웠다.
그러자 그의 검집은 몽둥이로 취급돼 ‘타구 스킬’의 효과를 받았다.
살을 가르고 뼈를 울리는 충격이 전신에 퍼졌다.
“마침 잘됐어.”
진천우가 쓰러진 사패를 스산한 눈으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운 좋게 가장 약한 놈이 나타난 것 같은데, 네놈에게 경계에 대해 물어보면 되겠군.”
가장 약한 놈?
“네놈!”
퍽!
울컥한 사패가 크게 소리 지르려 하자, 진천우가 주저 없이 놈의 이빨을 부쉈다.
퍽퍽퍽!
그리고 쉬지 않고 매타작을 펼쳤다.
확실히 경계에 대해 물어볼 거다.
하지만 멀쩡한 상태로 묻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몸이 멀쩡하면 무슨 거짓부렁을 할 줄 어찌 알고?’
일단 몸과 정신이 넝마짝이 되면 거짓말할 생각조차 나지 않겠지.
퍽퍽퍽퍽퍽퍽퍽!!
그리 정한 진천우는 눈앞의 전전대 고수를 패고 패고 또 패기 시작했다.
* * *
“으윽……!”
사패는 생각보다 입이 무거웠다.
퍽!
“정말 아무것도 몰라?”
“주, 죽여라!”
퍽퍽!
과연 전전대 초고수답게 정신력이 보통이 아니다.
그는 넝마짝이란 말이 아깝지 않도록 후려 맞았음에도, 끝내 경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퍽! 퍽퍽퍽!
“후우!”
때리는 사람의 숨이 찰 정도인데도 굳게 입을 닫다니.
이 정도면 그저 감탄할 지경이다.
그때, 사패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놈…….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래? 그럼 다음에 뭐가 또 있는데?”
당연히 그는 진천우가 자신의 다음 말에서 경계에 대해 알아내려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줘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고 놈이 공포에 질리길 원했다.
“네 말대로 나는 사패검주 중 가장 약하다.”
“그래서?”
“이제 내가 사라지면 나머지 셋이 그 사실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네놈을 찾아올 거다. 기대해라. 그 셋이 반드시 네놈을 도륙 내줄 테니.”
사패가 진심을 담아 저주를 퍼붓는 그때.
“남은 셋이라는 게 설마 이놈들이냐?”
엉뚱한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저주를 퍼붓던 사패는 물론이고, 진천우와 무진도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쿵!
갑자기 나타난 상대는 어깨에 메고 있던 고깃덩이들을 땅에 떨궜다.
잠시 뒤,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챈 사패가 소리를 질렀다.
“삼패! 이패! 일패?!”
어째서 저 셋이?
특히나 첫째인 일패는 자신들 셋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는 절대고수인데?
“네놈은 누구냐?”
“곧 죽을 놈이 알아서 뭐 하게? 아, 그리고 너희들 경계에 대해 궁금해했지. 내가 안다. 까짓 거 알려주지.”
난데없이 나타난 거한이 진천우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잠시 쓰러진 사패를 바라보더니 한마디 했다.
“쯧, 헛맞았구나.”
“으아아아악!!”
마지막으로 저주를 퍼붓기 위해 생명줄을 붙잡던 사패가, 그 한마디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