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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 함께하는 싸움 (4) (188/210)


188화 : 함께하는 싸움 (4)
2022.09.12.


쩌적!

이 순간만은 누구도 말이 없었다.

진천우와 가면의 사내는 물론이고 적인 중년인까지.

쩌저적!

그렇게 모두가 입을 다문 그때, 진천우가 든 검은 몽둥이, 아니 진화한 독고의 겉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쩍!

잠시 뒤, 단단한 껍질이 완전히 벗겨지고 안에서 검은 날개를 지닌 한 뼘 크기의 나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수를 내놔라!”

그 직후, 지금껏 가만히 지켜보던 중년인이 돌연 달려들었다.

진천우는 이를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걸까?

아니었다.

그는 굳이 자신이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이제야 긴 잠에서 깨어난 녀석이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파스스!

고치를 깨고 나온 나비가 가볍게 날개를 떨었다.

아무래도 방금 막 고치에서 나온 터라 단숨에 격렬한 움직임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녀석의 능력은 범상치 않았다.

“음?!”

그 가벼운 날갯짓에 중년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 그뿐일까!

“컥!”

그가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녀석의 독이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해졌다.

“빌어먹을!”

휙!

중년인이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처음 중독됐을 때와 상황이 달랐다.

신수도 막 고치에서 나온 참이니, 주위에 미리 독을 퍼트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거리를 벌리면 자연스럽게 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크헉!”

한참 뒤로 물러났음에도 여전히 각혈이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어떻게?”

파스스!

녀석이 아까보다 더 잘게 날개를 떨었다.

고치에서 나온 뒤, 독만 지독해진 게 아니었다.

독을 뿌리는 방식도 훨씬 은밀하고 빨라졌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스윽!

진천우가 조용히 가면의 사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상대도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둘은 잠시 말없이 눈을 맞추며 감정을 나눴다.

주로 의문과 확인.

그 결과는 놀라웠다.

‘멀쩡하다니!’

중년인이 물러날 때, 그 사이에 가면의 사내가 있었다.

독에 중독된 와중에도 추가 하독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가면의 사내를 등지고 달아난 것이다.

아무래도 함께 손을 잡은 상대까지 중독시키지는 못하리란 계산.

그런데 검은 나비는 가면의 사내를 완벽히 피하고 오직 중년인만 중독시켰다.

독의 위력, 은밀함, 속도 외에도 특정 상대만 노리는 능력까지 생겼다는 뜻이다.

파스스!

전체적으로 검은색에 테두리만 오묘한 은빛을 띈 신묘한 외양의 나비가 천천히 진천우 쪽으로 날아왔다.

그가 한 손을 내밀자 나비는 사뿐히 손등 위로 올라왔다.

정말 이 녀석이 내가 아는 독고가 맞는가?

스륵?

‘맞구나!’

진천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전과 너무 크게 바뀌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올려다보며 살포시 고개를 젓는 모습은 자신이 아는 과거 독고의 모습과 마치 탁본을 뜬 것처럼 똑 닮았다.

무엇보다 눈앞의 푸른 현판이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사용자의 펫이 ‘최종 진화’를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 사용자는 ‘만독주(萬毒主) 독접(毒蝶)’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독접?”

파르르!

진천우가 그 이름을 부르자 손등에 올라선 검은 나비가 양 날개를 잘게 떨었다.

처음에는 이게 제 이름을 부른 걸 아는 줄 알았으나.

“컥!”

알고 보니 아까보다 더욱 멀리 물러나 기습할 기회를 노리던 중년인에게 다시 한번 독을 날린 거였다.

중년인은 이제 낯빛이 검붉게 변해, 오래된 먹처럼 탁한 흑혈(黑血)을 쉬지 않고 바닥에 뿌렸다.

“그래, 다시 널 고치 밖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기쁘지만, 일단 급한 일부터 마무리 지어야겠지.”

그제야 진천우도 독접의 뜻을 이해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마무리는 중요했다.

함께 있던 가면의 사내도 그의 말에 곧바로 마도를 들었다.

그런데!

“크헉! 컥!!”

놀랍게도 중년인이 계속 각혈을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에는 억지로 독을 견디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비록 적이지만 정신력만은 대단하다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파스스!

주인을 닮아 인정머리 없고 철두철미한 독접이 바로 다시 독을 날렸다.

아까보다 더 지독하고 강한 독으로.

그것은 여지없이 중년인을 중독시켰다.

“쿨럭!”

이제 그는 아예 내장 조각까지 섞인 피를 토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중년인은 끝까지 쓰러지지 않았다.

파스스! 파스스!!

이를 본 독접도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눈앞의 광경을 부정했다.

놀란 건 녀석만이 아니었다.

진천우는 누구보다 뛰어난 독인이자 의원으로, 지금껏 독접이 날린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여기서 가장 잘 이해하는 이였다.

녀석의 독은 못해도 무인 수천 명을 가볍게 죽일 정도.

‘그런데 그걸 견딘다고?’

차라리 천하의 모든 독인들의 꿈이라는 전설의 만독불침지체(萬毒不侵之體)처럼 아예 독이 듣지 않는다면 또 모르겠으나, 중년인의 몸 상태는 그것과 전혀 달랐다.

“쿨럭! 쿨럭!”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있지만, 지금도 멈추지 않는 각혈은 확실히 독이 통한다는 증거였다.

그런데도 그는 죽어가기는커녕, 도리어 얼굴에 점점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치 독으로 죽어가는 것 이상의 생기를 끊임없이 주입받는 것처럼.

잠깐?!

“그게…… 맞는 건가?”

너무나 황당한 생각이다.

하지만 진천우는 그 생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저자는 자신이 믿을 수 없는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지 않았던가.

옆에 선 가면의 사내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말없이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눈치챈 모양이군.”

마지막으로 당사자가 직접 쐐기를 박았다.

“그래, 너희 생각대로 난 불사신이다.”

불사신(不死身).

죽지 않는 몸이라니!

진천우를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헛갈렸다.

적어도 그가 생각했던 불사신은 저런 게 아니었다.

“흥! 손목도 잘리고, 독에도 중독되는 불사신도 있다더냐?”

“어쨌든 안 죽지 않느냐. 잘린 손목도 다시 자랐고.”

중년인이 여보라는 듯 제 오른손과 왼손을 앞으로 펼쳤다.

손목에 잘린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즉, 네놈들이 얼마나 강하든 그리고 무슨 짓을 하든, 날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중년인이 한껏 으스대며 말했다.

확실히 저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꺾였다.

죽지 않는 적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중년인도 대놓고 자신의 비밀을 내보인 거겠지.

이때, 중년인은 이왕 비밀을 밝힌 김에 또 하나의 중요한 비밀을 선보였다.

“걱정 마라. 경계에 들어온 너희뿐 아니라 경계 너머의 놈들까지 모두 쓸어버려 줄 테니.”

“뭣?!”

“…….”

그 말에 진천우와 가면의 사내가 서로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가면의 사내는 매우 침착했지만, 진천우는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면의 사내가 중년인의 말에도 침착한 게,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겼다.

하지만 자신은 중년인의 말에 어느 정도 짐작되는 게 있었다.

그의 뇌리에 중간광고를 통해 직접 본 장면이 떠올랐다.

“설마 중원에 인외의 괴물을 풀려는 건가?”

“응? 어떻게 안 거지?”

역시나!

진천우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고, 중년인은 이를 재밌다는 얼굴로 내려보았다.

아직 밝히지 않은 자신의 계획을 미리 알아내다니.

‘확실히 놀랍지만, 그뿐이다.’

어차피 이 녀석이 무슨 짓을 하든, 경계 너머의 멸망은 피할 수 없었다.

원래 여기까지 오는 데는 단순히 진법과 기관 그리고 선인 외에도 더욱 위험한 무언가가 침입자를 막아서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나 쉽게 여기로 왔다.

경계를 지키는 주요 병력이 모두 밖으로 나갔기 때문.

“모두 너희가 직접 통로를 열어준 덕분이지. 그것만은 너희에게 아무리 감사를 표해도 부족할 정도야!”

중년인이 진심인지 놀리는 건지 애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진천우가 잠시 발끈했지만, 그는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슥!

반면 가면의 사내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설마 도발에 걸린 건가?

진천우가 급히 그를 막으려 하는데.

“별로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뭐?”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차피 네놈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무슨 소리지?”

“내가 굳이 그걸 네놈에게 알려줄 이유가 있나?”

놀랍게도 가면의 사내는 도발에 넘어간 게 아니라, 도리어 도발한 상대를 더 크게 도발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믿고?

스윽!

가면의 사내가 잠시 뒤로 고개를 돌렸다.

-걱정할 필요 없네.

-어째서?

-말 그대로다. 밖은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진천우는 가면의 사내가 전하는 전음을 듣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자신의 의문에 그 어떤 이유도 대지 않았지만, 그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는 한마디에 정말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걱정이 사라져도, 여전히 눈앞의 상대를 상대할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불사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달칵!

그때, 진천우는 가면의 사내 품에서 울리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파스스!

그 소리가 울리자마자 갑자기 제 어깨 위로 올라간 독접도 동시에 날개를 떨었다.

뭐지?

달칵달칵!

파스스스!

독접은 저 혼자 계속 날갯짓을 하더니, 갑자기 날개에 묻은 은색 가루를 크게 떨어냈다.

그런데 그 가루가 하필 가면의 사내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위험……!!”

진천우가 급히 경고하려고 손을 뻗다 그대로 몸이 굳었다.

달칵!

가면의 사내의 품에서 느닷없이 웬 손바닥 크기의 목각 인형이 튀어나오더니, 방금 독접이 날린 은색 가루를 맨몸으로 받았다.

그러자 인형의 몸이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더니, 그 빛이 서서히 가면의 사내 쪽으로 다시 이동했다.

거기서 끝났다면, 자신이 이리 놀라지 않았을 텐데.

스륵! 스르륵!

“뭐, 뭣?!”

진천우가 두 눈을 치켜뜨며,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때, 그의 시선이 자꾸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

* * *

-크라라!

어느 순간, 허공에서 웬 괴상한 게 튀어나왔다.

곰의 몸집과 범의 이빨, 뱀의 피부, 거기다 두 발로 걷기까지.

그것은 도저히 인계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인외의 괴물이었다.

-크라라!

-크라라라!

게다가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크라라라!

-크라!

-크라라!!

하나, 둘, 셋……. 괴물은 하나씩 숫자가 늘어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 세 자리를 훌쩍 넘겼다.

어느새 그곳은 괴물 무리가 풍기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 넘쳤다.

-크라라?

-크라!!

-크라라라라라!!

그것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으르렁거리더니 갑자기 동시에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작은 인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 방향으로 계속 가면, 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더 큰 마을이…….

-크라라라라!

-크라!!

괴물들은 제 앞을 막는 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쓸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인가가 문제가 아니었다.

마을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들이 노리는 목표는 그것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퍽!!

그 순간, 갑자기 맨 선두에 선 괴물의 머리에 커다란 화살…… 아니 이걸 화살로 봐야 할까?

아주 커다란 창이 박혔다.

아무리 인외의 괴물이라도 머리에 성인 머리 크기의 구멍이 뚫리면 속절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크랏?!

-크라라!

뒤늦게 괴물 무리가 선두의 죽음을 깨닫고 분노했다.

“허허!”

그리고 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본 백발노인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정말 저런 것들이 나타나다니.”

노인이 다시 한번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맹주를 따라온 맹의 정예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쓸어버리게.”

맹주가 그들을 향해 짧게 명했다.

“존명!”

곧바로 천이 넘는 정예 무인들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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