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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화 : 초한전 (1) (201/210)


201화 : 초한전 (1)
2022.10.12.


“…….”

진천우는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철컹!

그사이 청옥, 홍옥 석상이 전열을 모두 갖추었다.

허나 그게 끝.

한번 전열을 맞춘 석상은 그 뒤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시야 구석의 푸른 현판이 반짝였다.

“흠…….”

조심스레 현판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글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사각 틀 위에 가로, 세로로 반듯한 선으로 여러 칸이 나뉘었다.

거기서 위아래 가운데 부분만 가로세로가 아닌 대각선이 짧게 그려져 있다.

‘이건 장기판이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건 또 하나 있었다.

스윽!

드디어 현판 위에 글이 새겨졌다.

그런데 그 글은 그림 아래가 아니라, 그림 위에 새겨졌다.

한 자, 한 자, 유려한 필체다.

처음 새겨진 졸(卒)은 건장한 사람이 두꺼운 갑옷을 두른 모양이었다.

마(馬)란 글씨는 금방이라도 사각 틀 위를 뛰쳐나올 듯 질주하는 말의 형상이었다.

그 뒤 이어지는 글자 역시 각각의 뜻에 알맞은 형상을 취했다.

그러니 당연히.

“…….”

진천우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사각 틀 중앙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대각선을 획으로 만들어진 작은 궁궐.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현판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고, 실제 궁궐은 달랐다.

높은 단.

“…….”

진천우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오르며 그 단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청옥을 통째로 깎아 만든 단은 화려하기 그지없었으며, 단 위에는 푸른 비단으로 만든 휘장이 사방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비단은 얕고 섬세해서 안이 슬쩍 비쳤다.

진천우가 안력을 돋궈 그 안을 바라보았다.

“큭!”

순간,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렀다.

왕(王).

휘장 안에 분명 왕이 있었다.

왕이 아니고서야 저 거대한 존재감은 설명할 수 없었다.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커다란 존재감이 휘장 안은 물론이고 아예 판 전체에 흘러넘쳤다.

꿀꺽!

휘장 너머 왕의 일면을 엿봤을 뿐인데도 저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기껏해야 옥을 깎아 만든 기물이라 생각했건만, 그것이 내뿜는 기백은 진짜였다.

‘더군다나…….’

진천우가 살짝 질린 눈으로 자신이 서있는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판 위에 왕은 하나가 아니다.

제 쪽에 청옥의 왕이 있다면, 반대쪽에도 홍옥의 왕이 있었다.

홍옥의 왕 역시 크고 높은 붉은 단 위에 휘장으로 가려진 채였지만, 그 또한 청옥 왕 못지않은 강렬한 기세를 사방에 흘렸다.

이것으로 분명해졌다.

‘역시 이건 장기가 틀림없군.’

하긴 본래 장기는 전쟁 모의로 발명된 놀이로 잘 알려져 있으며, 처음 만들어진 다음부터 차츰 발전돼 내려오던 중 어느 시기부터 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의 각축전을 모방한 형태가 정형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장기란 놀이 자체가 어찌 보면 초한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초한전이든 장기든 뭐든, 이게 내 앞에 나타났다는 건…….’

이제부터 자신이 이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우선 말을 어떻게 움직이지?’

진천우의 시선이 지금 자신과 가장 멀리 있는 청옥 석상에 머물렀다.

그건 현판에 졸(卒)이란 글자가 적힌 위치에 놓인 석상이었는데, 그나마 그게 석상 중 가장 작았다.

휙!

진천우가 그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더니 가볍게 제 체구만 한 석상 주위를 돌다 입을 뗐다.

“설마 직접 옮기는 건가?”

제발 아니길!

그러면서 그는 석상의 등에 양손을 가져다 댔다.

“읍!”

그대로 팔에 힘을 주었다.

……석상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더 힘을 주었다.

“흐읍!”

그냥 힘만 주지 않았다.

우우웅!

단전 안에 있는 내공을 꺼냈다.

진천우는 육체는 몰라도 가지고 있는 내공은 또래 중 손에 꼽았다.

절세의 영약으로 불리는 대환단과 그에 비견되는 다른 영약을 다수 섭취했으니 당연했다.

“음?!”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우우우웅!!!

“뭐, 뭐야?!”

몸 안에 내공이 너무 많았다.

이전에 제 몸에 담긴 내공이 작은 옹달샘이었다면, 지금은 무슨 바다였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바다.

문제는 진천우가 처음에는 옹달샘을 생각하고, 가볍게 한 바가지만 푸려 단전의 문을 조금 연 데 있었다.

만약 제 몸에 이런 망망대해가 펼쳐질 줄 알았다면, 문을 지금의 십분지, 아니 백분지, 아니 만분지 일도 열지 않았을 거다.

콰르르!!

귓전에 막힌 둑이 무너져 내려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진천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급히 단전의 문을 닫았다.

그래도 늦을 것이다.

이만한 기운을 어찌 단숨에 닫을 수 있을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 했다.

설령 제 몸이 부서진다 해도…….

뚝!

“응?”

허나 몸이 부서질 각오를 한 게 무색하게, 무너지리라 예상한 둑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밀려오는 해일을 견디는 건 물론 아주 가볍게 수문을 닫아버렸다.

“어어?”

스스로 수문을 닫은 당사자마저 황당해할 깔끔함.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강호초출이 아니다.

빈말로 아직 노련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 여러 경험을 쌓은 어엿한 무림인이었다.

그러나 방금 제 몸에서 일어난 일은 무림의 상식을 송두리째 무너트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진천우가 조심스럽게 제 몸을 살폈다.

어디에도 강대한 기운을 급히 일으키고, 그것을 급히 다시 거둔 것에 대한 좋지 못한 반동이 일어난 흔적이 없었다.

그의 몸은 어디까지나 깨끗했다.

사실 너무 깨끗해서 문제였다.

스륵!

“세상에!”

진천우가 제 몸을 걱정하다 말고 이제는 감탄했다.

스르륵!

어떻게 이렇게 물 흐르듯 매끄럽게 기운이 운도되는 거지?

그리고 여기서 양을 더 늘리면 어찌 될까?

스르르륵!

된다!

양을 더 늘려도 여전히 매끄럽게 기운이 흐른다.

그럼 더?

스르르르륵!!

이것도 된다.

설마 더?

콰르르!

이럴 수가!

이젠 아예 물이 사나운 폭포처럼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만큼 내공이 마치 내 손발처럼 움직였다.

‘잠깐, 그게 가능하려면 기운을 움직이는 능력 외에 그걸 견딜 기맥도 만들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야 그럴 게 내 몸은…….

“?!”

진천우가 다시 한번 제 몸을 살폈다.

설마?

그럴 리가?!

“맙소사!!”

절맥이…….

지난 십수 년 제 몸을 파고들던 끔찍한 천형이…….

……말끔히 사라졌다.

주륵!

이를 깨닫자마자 그의 눈에 투명한 구슬이 흘러내렸다.

주르륵!

구슬이 쉼 없이 흘렀다.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때가 아니면, 도무지 이때가 아니면 언제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

“아버님!”

진천우는 곧바로 제 아비를 찾았다.

-천우야, 걱정 말렴! 아비가 꼭 네 병을 고칠 의원을 모셔 오마. 대라신선만이 네 병을 고칠 수 있다고? 까짓 거, 신선의 멱살을 끌어서라도 데려오마!

이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목소리.

-믿으렴. 네 아비는 반드시 네 병을 고칠 신의를 데려올 거란다.

그리고 어머니!

이때만큼 두 분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소가주님!

그다음, 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는 녀석의 목소리도 들렸다.

현석 역시 두 분 못지않게 그리웠다.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이 일을 제 일처럼 기뻐해 줄 텐데.

어찌해 너는 내 앞에서 사라졌는지…….

주르륵! 주륵!

여러 감정이 격동하는 통에 눈물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제 몸 안의 모든 수분을 앗아가려는 듯 한참이나 흐르고 다시 흘렀다.

“……후!”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진천우는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며 소매로 천천히 달아오른 눈가를 두드렸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그극!

“?!”

눈앞에 있던 청옥 병사가 움직였다.

진열을 갖춘 뒤부터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

진천우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뒤로 물러나 자세를 갖췄다.

허나 청옥 병사는 제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겨우 두 걸음.

그러니까 청옥 병사는 자신이 있던 선에서 바로 다음 선까지만 나아갔다.

그게 끝이었다.

그 뒤 청옥 병사는 오롯이 정면을 주시하며 몸이 굳었다.

다만, 앞서 갖춘 전열에서 움직인 건 그 혼자뿐이라, 전체 판에서 보면 청옥 병사만 덩그러니 앞에 나선 괴상한 그림이 되었다.

허나 졸 하나가 맨 먼저 앞으로 나서는 그림은 보통의 장기판에서 당연한 그림.

그렇담 이건 역시 장기가 맞았다.

‘하지만 어떻게 움직였지?’

진천우가 의문을 표하는 동시에 푸른 현판에 새 글귀가 채워졌다.

[선수가 제한시간 동안 아무 수도 두지 않았기에 자동적으로 말이 움직입니다.]

[초한전의 자동수는 매우 상식적인 형태로만 놓아집니다.]

‘그러니까 내가 두는 게 느려서 자동으로 첫 수를 놓았다고?’

아니, 그러니까 말을 어떻게 움직이는 건데?

‘아니, 잠깐!’

그 순간, 진천우의 뇌리에 뭔가가 번뜩였다.

처음 현판에 새겨진 그림 또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청옥과 홍옥 기물의 배치를 나타낸 그림이 실시간으로 바꿨다.

이 그림에서도 청옥 병사 홀로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그럼 이 그림은 어쩌면?’

아마 평소의 진천우였으면, 시간제한이 다 되기 전에 이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허나 이번에는 자신도 모른 채 절맥을 극복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미처 새로운 판에 적응할 틈이 없었다.

슥!

진천우가 조심스레 현판에 손가락을 대었다.

아마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제 쪽의 청옥 기물은 직접 내려가 힘으로 기물을 미는 게 아니라 현판을 이용해 조작하는 게 틀림없다.

빠직!

“큭!”

그러나 그가 현판에 손을 대자마자 현판에서 강한 뇌기가 흘러나왔다.

놀란 진천우가 급히 현판에서 손을 뗐다.

자신이 틀렸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사실 진천우는 틀리지 않았다.

그의 생각대로 청옥 기물을 조정하는 방법은 현판을 이용하는 게 맞았다.

다만, 진천우가 하나 간과한 게 있었는데.

[지금은 사용자의 차례가 아닙니다.]

그랬다.

이미 청옥 졸이 한 번 이동한 뒤였다.

이다음은 홍옥이 움직일 차례.

그런데 여기서 진천우가 기물을 어떻게 움직이는가와 함께 생각한 두 번째 문제가 있었으니.

“그러니까 내 상대는 누구지?”

스윽!

진천우가 천천히 고개를 위로 들었다.

혹시나 홍옥 기물 쪽에도 자신이 내려왔던 것처럼 커다란 의자가 있어, 거기에 상대가 앉아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살펴도 그러한 의자는 보이지 않았다.

있을 리가 없었다.

만일 그런 게 있었다면, 자신이 어찌 몰랐을까.

‘그럼 도대체…….’

난 누구와 싸워야 하는 거지?

존재하지 않는 적.

그것과 싸워야 하나?

진천우가 잠시 뭘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그때.

슥!

맞은편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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