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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화 : 초한전 (3) (203/210)


203화 : 초한전 (3)
2022.10.17.


천마가 등선을 거부했다.

그러나 아무리 천마라 할지라도 이미 진행된 등선을 막는 건 쉽지 않았다.

스륵!

그의 몸이 빠르게 흩어졌다.

그만큼 천마의 경지가 까마득히 높다는 소리.

허나 이번에는 그 점이 독이 되었다.

“제길!”

천마가 어느새 삼분지 이 이상 사라진 몸을 보고 낮게 이를 갈았다.

이 같은 경우는 처음이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은 이미 치른 적이 있다.

바로 반로환동을 이뤘을 때.

‘그때도 몸이 내 의지를 벗어났었지.’

몸에 있던 흉터들이 사라지고 피부가 뽀송뽀송해졌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작 문제가 되는 건 점차 시야가 낮아진다는 점이었다.

-이 무슨?!

당시 천마는 기겁하며 반로환동을 멈추려 했다.

분명 젊어진다는 건 매우 매력적인 일.

그러나 이때 천마는 충분히 젊었다.

여전히 전성기 때의 육체를 지닌 천마에게 반로환동은 어떤 득도 되지 않았다.

되레 팔다리가 짧아지고, 단전이 줄어들 뿐.

손해도 그런 손해가 없었다.

종국에는.

-응애!

“큭!”

두 번 다시 떠오르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자 천마는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그때의 경험이 영 쓸모없지만은 않았다.

그 수치를 겪었기에 천마는 등선에 저항할 수 있었다.

꽈아악!

주먹을 움켜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러자 희미해진 몸이 잠시 또렷해졌다.

사라졌던 하반신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르륵!

이미 한 번 흩어졌던 몸은 곧바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

“건방지게!”

어딜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려 하느냐!

우우웅! 꽈드득!

천마가 곧바로 다시 흩어진 몸을 모았다.

손에 힘을 주면 줄수록 잃어버린 몸의 윤곽이 되살아났다.

하반신에 이에 상반신 역시 다시 돌아왔다.

설마 정말 자력으로 등선을 거부하려는가?

등선조차 오래된 문헌에서 전설로만 전해지는 경지건만, 스스로 등선을 거부하는 일은 아예 기록조차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천마가 최초인 일.

지금 천마는 지금껏 무림사에 존재하지 않던 새 역사를 써내려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

천마가 이를 악다문 채 집중했다.

이제 몸의 대부분을 거의 되찾은 상태.

여기서 한 번만 더 힘을 주면, 머릿속을 배회하는 정체불명의 깨달음을 완전히 꺾어 누를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아!”

천마가 갑자기 입을 벌리며 몸에서 힘을 뺐다.

스르륵!

그러자 곧바로 그의 몸이 빠르게 흩어졌다.

왜 갑자기?!

허나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몸에 힘을 주면, 등선을 멈출 수 있다.

다시 이 세상에 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천마는.

“…….”

하반신이 사라지고, 상반신마저 사라지고, 시야마저 완전히 사라지는 그때까지 다시 힘을 주지 않았다.

왜? 어째서?

스륵!

결국, 마지막 남은 얼굴까지 전부 완전히 흩어지려는 찰나.

씩!

천마는 허공을 바라보며 한껏 입꼬리를 비틀었다.

스르륵!

그러나 그 미소는 지어지고 얼마 안 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천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속내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행하고 사라졌다.

어째서일까?

정말 어째서 그는 이리도 허무하게…….

“큭!”

천마가 사라지고 얼마 뒤.

저 바닥 아래에서 낮고 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덜컥!

천마가 사라진 자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무너진 건물 잔해가 잠시 들썩였다.

그리고 잠시 뒤, 잔해 아래에서 누군가 힘겹게 기어 나왔다.

“쿨럭!”

검은 중년인이 검붉은 피 섞인 기침을 내뱉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본디 불사신인 그는 이깟 상처쯤은 한 호흡 만에 떨치고 일어나야 정상.

그러나 이상하게 조금 전부터 몸에 불사의 힘이 깃들지 않았다.

“어째서?”

중년인은 경악했지만, 사실 그 이유는 이미 짐작한 뒤였다.

‘그놈들이구나!’

자신과 천마를 붙여놓고 사라진 둘.

그것들이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녀석들이 내 불사성의 원천을 건드렸다면?’

필연적으로 그다음에 건드릴 건…….

“안 된다!”

중년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래로 몸을 날렸다.

넝마같은 몸으로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지 신기했다.

비록 불사성을 잃었지만 정신마저 꺾이진 않은 건 분명했다.

슥!

그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잠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자신의 불사성을 빼앗은 그것들을 응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려 불사신인 자신을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트린 천마야말로 진정 주의해야 할 자였다.

‘어째서 그는 날 마무리 짓지 않고 떠난 거지?’

중년인은 천마가 등선한 사실을 몰랐다.

그걸 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그저 천마가 자신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었다.

중년인은 행여나 천마가 마음을 바꿔 자신을 다시 마무리 지으러 올까 겁나,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위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가는 도중.

“?”

무언가가 중년인의 눈에 띄었다.

‘저건?’

그것은 그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떤 것.

‘저게 왜 여기 있지?’

아니, 저게 저기 있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그건 저 물건이 지금 자신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란 사실이었다.

‘이거야말로 천운이다!!’

중년인이 그 즉시 그 물건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천마가 등선하고, 중년인이 아래로 내려오는 그때.

슥!

철컹!

진천우는 한창 장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히이잉!

적의 기병이 움직였다.

자신은 기병 하나를 잃었지만, 적은 여전히 기병을 둘이나 가지고 있었다.

“흥!”

그러나 진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푸른 현판을 조정해 기물을 움직였다.

쾅!

하늘에서 느닷없이 뭔가가 떨어졌다.

흡사 운석과 같이 단단하고 커다란 무언가.

그 아래 붉은색 졸이 깔려있었다.

철컹!

운석인 줄 알았던 그것은 몸에 두른 단단한 갑옷을 가볍게 털며 움츠렸던 몸을 풀고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포(包).

상하좌우 어디든 기물 하나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것은, 조건만 제대로 주어지면 장기판 끝에서 끝까지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요주의 기물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제 쪽에 무려 둘이나 있었다.

반면 붉은 왕이 지닌 포는 불과 하나.

진천우가 고도의 수 싸움을 통해 상대의 포 하나를 빼앗은 덕분이었다.

이로써 기병 하나를 잃은 손해를 무마했다.

그리고 방금 적의 졸까지 해치웠다.

-……!

붉은 휘장 너머에서 은은한 분노의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나 상대는 과연 왕답게 그 이상 티를 내지 않고 다른 졸을 움직였다.

‘이때다!’

-뿌오오오!

적의 졸이 옆으로 비키자마자, 진천우는 난데없이 자신의 코끼리를 앞으로 돌진시켰다.

-?!

휘장 너머에서 붉은 왕의 당황한 기색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앞으로 나온 청색 코끼리는 정확히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 전에 졸을 옆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고민 없이 저 코끼리를 처리했을 텐데.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한번 움직인 기물을 다시 무르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자신을 노리는 코끼리를 피하는 건 사실 간단했다.

왕은 궁전 안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상하좌우뿐만 아니라 대각선까지도.

그게 아니면 궁전에서 자신을 지키는 두 명의 충성스러운 무사(士)를 앞으로 보내 코끼리를 막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간…….

-!!

그러나 그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슥!

붉은 왕이 제 옆에 바짝 붙어 자신을 지키던 무사를 앞으로 내보냈다.

이로써 코끼리의 진격을 막았다.

-뿌오오오오!!

그러자 청색 코끼리가 곧장 방향을 틀었다.

궁전 반대편으로.

우지끈!

코끼리의 커다란 발이 화려한 수레를 짓뭉갰다.

그 즉시 붉은 기병이 코끼리를 처리했지만, 장기판에서 왕 다음으로 중요한 기물로 꼽히는 차(車)와 상(象)을 교환한 건 매우 뼈아픈 일이다.

‘됐다!’

그야말로 승패를 결정한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응?”

그때 갑자기 푸른 현판이 시야를 가렸다.

[특수 이벤트 ‘초한전’에서 결정적 한 수를 달성했습니다. (1 / 3)]

[이후부터 ‘경계 시스템’의 접속이 허가됩니다.]

‘경계 시스템?’

이게 무슨 말이지?

-지잉!

그 직후, 귓가에 이명이 울렸다.

“큭!”

가는 실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는 감각.

허나 고통은 짧았고, 이명이 멎자 진천우는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그런 거군.”

경계 시스템이란 이곳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법칙을 다루는 힘.

아마 얼마 전까지 이전에 만난 검은 중년인이 이 힘을 지배했을 거다.

그것을 이제 진천우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단, 아직 부족했다.

자신이 검은 중년인과 같은 수준으로, 아니 그의 권한을 뛰어넘으려면 초한전에서 승리해야 했다.

‘간단하군.’

하지만 진천우는 이것을 아주 쉬운 일이라 확신했다.

실제로 조금 전의 결정적 한 수로 매우 큰 이득을 보았으니, 이후로는 안전하게 방비만 굳혀도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쾅!

그 직후, 벌어진 커다란 변수만 아니라면.

“무슨?!”

진천우가 붉은 왕이 앉아있는 단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서 뭔가가 단상 위로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포를 확인했다.

그러나 진천우는 포를 움직이지 않았고, 당장 그의 포는 단번에 왕을 잡을 위치가 아니었다.

그럼 저건 도대체 뭐지?

아쉽게도 그 정체는 붉은 휘장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펄럭!

그런데 잠시 뒤, 휘장과 함께 의문이 걷혔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군.”

“당신은?!”

자지가 어떻게 여기에?!

“불사성이 사라진 이상, 천마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을 텐데?”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다.”

왕을 찍어 누르고 태사의마저 빼앗은 중년인이 짧게 대꾸했다.

사실 그건 당사자도 모르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무튼, 내가 온 이상 더는 네놈 마음대로 설치지 못할 거다.”

“웃기는군.”

상대의 말에 진천우가 코웃음치며 기물을 움직였다.

아까 중년인은 늦을 뻔했다고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다시 말하지만, 승부는 벌써 난 뒤다.

-뿌오오오!

진천우가 하나 남은 코끼리를 앞으로 냈다.

그런데 그곳은 사지(死地)였다.

-히이잉!

곧바로 붉은 기병이 코끼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뿌오오!

푸른 코끼리는 격렬히 저항했지만, 안타깝게도 기병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헌데 왜 진천우는 일부러 코끼리를 사지로 보낸 걸까?

그건 그곳이 코끼리의 사지인 동시에 바로 적의 기병의 사지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가라!”

그는 바로 현판에 손을 올렸다.

쾅!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포가 온몸을 움츠려 커다란 구 형태를 이루더니 그대로 하늘 높이 올라갔다.

목표는 적의 기병.

이리 되면, 진천우는 자신의 코끼리와 적의 기병을 교환하게 된다.

기병은 코끼리보다 좀 더 상위의 기물.

그야말로 완벽히 승패를 결정짓는 한 수나 다름없었는데.

“흥!”

“?!”

이때, 중년인이 난데없이 단장에서 몸을 날렸다.

무슨 짓이지?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기병 쪽으로 날아가더니, 말 위에 탄 기병을 발길질로 날려버리고 제가 말 위에 올라탔다.

그 광경을 지켜본 진천우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그 순간.

휘익!

하늘로 솟구친 포가 말 위에 올라탄 중년인을 향해 떨어졌다.

뭐든 상관없다.

이걸로 중년인을 깔아뭉개버리면 초한전은 끝이다.

그런데!

쾅!

“허허!”

“무슨?!”

박살 난 건 어처구니없게도 중년인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 포였다.

“어리석구나! 초한전이 정말 단순한 장기라 생각했더냐!”

“그게…….”

“이것이야말로 진짜 전쟁인 것을!!”

중년인의 일갈과 동시에 푸른 현판에 새로운 글귀가 빠르게 새겨졌다.

[초한전의 보스가 교체됩니다.]

[바뀐 보스에 의해 초한전 전체가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바뀝니다.]

[새로운 격동에 대비하세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아쉽게도 불만을 꺼낼 겨를이 없었다.

애초에 진천우가 기겁한 이유는 자신의 포가 쓰러진 것 때문도, 현판에 이해할 수 없는 글귀가 새겨진 것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놀란 이유는 단 하나.

우우웅!

“어떻게 네놈이!!”

진천우의 시선이 중년인의 손에 집중되었다.

거기에 짙은 검은 기운이 응축돼 있었다.

천마신공!

“어떻게 네놈이 그걸 쓸 수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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