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1화 (11/338)

# 11 < 대마법사 >

***

드디어 방학을 맞은 7월 하순의 토요일.

진혁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안마당 수돗가로 뛰어들었다. 날이 갈수록, 달리기를 거듭할수록 호흡은 편안했지만 더워진 날씨 탓에 몸이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빨간 고무통 안에서 얌전히 햇빛을 품는 지하수의 자태가 황홀할 지경이다.

벌거벗고 찬물을 뒤집어썼다.

촤아악-.

‘크으으! 이 맛이여!’

정수리부터 온몸을 훑고 내려가는 지하수의 청량감.

남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이 후리한 불알감!

구석구석 온몸에 비누칠을 했다. 눈에 비누가 들어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진혁은 상남자니까. 자고로 눈에 비눗물이 들어가 따가워도 부릅뜨고 버티는 자가 곧 상남자라 하였느니.

비누 묻은 몸을 씻고 손을 박박 문질렀다. 아기를 안으려면 특히 손이 깨끗해야 한다.

“우리 진혁이 왔어?”

안방문이 열리며 엄마가 진혁을 반겼다.

아차차!

진혁이 재빨리 바가지로 주요부위를 가렸다.

“보시면 안 돼요!”

심하게 당황한 터였다. 가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황한 나머지 뒤돌아 탱실탱실한 빵뎅이를 보이는 효도를 저지르고 말았다.

“으흐흐흑흑-.”

문을 닫으며 엄마가 흐느끼듯 웃었다. 어깨를 들썩이기까지 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엄마 가슴을 주무르며 어리광부리던 아들이 부끄러움을 타고 있으니. 안방에서 아기 목욕을 시킬 때도 그렇다.

- “진혁이도 엄마가 씻겨줄까?”

- “어어어-, 마당에서 혼자 할래요!”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한술 더 떠서 아기에게 젖 물리는 모습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아들이었다. 의젓해지면 엄마 손을 일찍 떠나는 모양이라고 한유영은 생각했다.

물론, 진실은 우주 저 너머에······.

***

손 씨 부자가 산책 삼아 경작지를 거닐었다.

장마가 지나 습도와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하면 벼농사를 짓는 농부는 눈에 불을 켜고 논을 찾는다. 도열병이 도는지 확인하고, 병균이 퍼졌다면 살균약제도 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도열병이라는 놈은 해를 넘기며 잠복하기에 볍씨를 소독하고, 약을 치고, 덧거름을 과하게 주지 말아야 하고, 수온도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괜찮은 건가요?”

“응. 올해는 예년보다 뜨겁지 않은 것 같네.”

10년 전, 어느 집 착한 아저씨는 이 뜨거운 날 벼가 얼마나 덥겠냐며 갓 끌어낸 시원한 지하수를 논에 댔다가 남의 논에도 도열병을 퍼뜨리는 원흉이 되기도 했다.

그 착한 서울 촌놈 바보 아저씨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최장환이 펼친 선의의 방어 공작 덕분이었는데, 최장환은 그렇게 하나씩 배워나가는 거라며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진혁은 아빠와 산책을 마치기 무섭게 손과 얼굴을 씻고 동생을 안아 들었다.

둥개둥개둥개야-.

“꼬이잉-.”

“울애기 낮잠 시간인가 봐요. 나가 놀아야겠다.”

진혁은 잠투정을 시작한 아기를 엄마에게 맡기고 바깥마당으로 나갔다. 자는 아기를 만지며 애정표현을 하고 싶었지만, 아기는 자야 큰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평상에 올라 신문을 펼쳤다.

「노태우대통령 자유중국대사에 신임장 전달」

그래, 타이완을 자유중국이라고 부를 때가 있었지. 너무 신선하다.

활자를 읽고 세상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읽었지만 재미가 없는 건 없는 거다. 신문이 빠른 속도로 넘어갔다.

「[ 토픽 ] 미국 아이스크림 소련 상륙. 모스크바서 개장 인기끌 듯」

소련이라니, 잊힌 이름을 오늘에 되살려 부르니 이 얼마나 새로운가.

소비에트 연방이 언제 해체되더라? 멀지 않은 시점이리라. 아마 다음 바르셀로나올림픽 때는 독립국가연합으로 참여했던 것 같은데, 몸에 밴 기억이 아니면 너무 깜깜하니 미래를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재미없으니 빨리 읽고 넘기자.

「[ 토픽 ] 인도 경찰에 뇌물주고 에이즈환자 병원 탈출」

오우야, 옛날부터 다이나믹 지구촌.

「“미국 담배수출은 비도덕적” 미국 국내선 “금연” 해외선 “더 피워라” 협박」

양키들이란······.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담배 땡긴다. 그런데 담배를 피웠던가?

안 피웠는데 이상하다.

「프로야구 롯데 2위 부상. 최연소 서정룡 호투」

충격적이었다.

음, 얘네가 이런 팀이었나? 이전의 생에 야구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어도 꼴-머시기라고 팬들이 욕하던 건 기억한다. 제법 잘 나가는 걸 보면 올해엔 천재 타자도 있고 강속구를 숨긴 선수도 있는 모양이다.

뒹굴뒹굴 신문을 읽다가 자연스레 얼굴을 덮었다. 신문지에 듬뿍 밴 기름 냄새를 맡으니 노곤노곤한 기분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평상을 가득 덮는 느티나무 그늘이 주는 편안함에 몸마저 흐물거리는 차에 다복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진혁아아아-.”

최미경 어린이였다.

시골 아이들은 방과 후 함께 어울리는 일이 드물었다. 성별이 달라 어우러지지 못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일단은 집이 다붓하지 않은 산촌이었기에. 그나마 최미경과는 집이 가까운데도 진혁은 아이들이 불편해서 자주 어울려 놀지 않았다.

한데 이 어린이는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최미경 어린이의 손에는 주황색 바가지가 들려 있었다.

“사람이 부르면 대답도 하고 그래라!”

“어, 어서 와.”

버럭 소리를 지른 최미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손진혁 저놈은 언제 봐도 이상한 놈이다. ‘어서 와’라니. 동네 사람들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서울 어른들이 저렇게 인사를 하던데.

‘애늙은이.’

최미경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산딸기 따러 가자.”

“나는 애기 때문에 좀 그렇다.”

“애기는 아줌마가 보시잖아. 산딸기 먹고 싶은데 뱀 무서워.”

아니, 산딸기를 먹고 싶어 하는 것도 최미경, 뱀을 무서워하는 것도 최미경인데 왜 나한테 그러는 거지? 논리적 연결점을 찾지 못한 진혁은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였다.

여자들과의 대화가 어렵다는 건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눴던 사람도, 그런 기억도 별로 없는 진혁으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심도 있는 대화는 업무 관련 내용뿐이었고, 그나마 인간적인 대화는 꽐라 홍수정의 주정을 받아주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묵묵히 들어주기만 한 거지만.

성인이 된 최미경과 몇 번 식사를 했어도 그때의 최미경은 점잖았으니 지금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진혁은 억울했다.

그렇다고 어린이와 멱살잡이를 하며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없고. 출수를 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엄마와 아기를 지켜야 하는데.

“갈 거야, 말 거야!”

“······ 가, 갑시다.”

그래도 엄마가 산딸기를 좋아하시니 따러 가볼까?

수돗가에서 빛바랜 하늘색 바가지를 들고 뒷산으로 향했다.

최미경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랐다.

역시 남녀가 유별한 동네였다.

*

뱀이 몇 마리 있었지만, 다행히 사람 발소리를 듣고 도망가는 녀석들 꼬리만 목격했다. 도망가는 뱀을 향해 장군이가 꼬리를 흔들었다. 뱀에게도 친절한 녀석이 작년에는 왜 그리도 진혁에게 개지랄을 떨었을까.

“미경이 많이 땄-.”

-니?

손과 뺨이 발개진 열 살짜리 여자아이를 발견하고는 저절로 입이 닫혔다. 최미경은 들고 온 바가지를 머리에 쓰고, 빵빵한 볼을 다람쥐처럼 오물거리며 불만 있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에휴-.

진혁은 가득 모은 산딸기를 최미경의 바가지에 덜어 비슷하게 양을 맞췄다.

“가져가서 부모님도 드려라.”

“응. 고마웝.”

말하느라 튀어 나가는 산딸기 파편을 최미경이 입술을 닫아 재빨리 가뒀다.

대단한 순발력이었다. 혹은 먹거리에 대한 집착.

도대체 먹느라 바쁜 녀석이 바가지는 왜 들고 온 건지.

아이들은 알 수 없는 생명체다.

갈림길에서 최미경과 헤어졌다.

‘저저저, 저놈이! 가면서도 먹네!’

어른인 진혁이 참기로 했다.

헤헤헥-.

장군이 입에도 산딸기를 하나씩 먹여줘야 했다.

미친, 개 주제에 그 맛을 알아서 몇 걸음마다 하나씩 줘야 따라온다.

“이제 엄마 드릴 거야.”

끼이잉-.

아쉬워하는 걸 보니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게 분명하다. 개 루이스는 한국어 능력견이었다.

하나라도 흘릴까, 내리막길을 조심스레 걸어 집에 도착했다.

진혁은 수돗가에서 산딸기를 씻으며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부모님이 좋아하신다고 망둥어를 잡고, 참새 구이를 만들고, 산딸기를 따고.

별것 아닌 일상인데.

이렇게나 소중할 일인가.

‘산딸기가 집 근처에서도 잘 살면 좋을 텐데.’

가시가 많으니 울타리 역할도 할 테고, 산딸기를 좋아하는 엄마가 좋아할 테지.

희한한 노릇이었다. 그렇게나 생명력 강한 산딸기나무가 집 근처에만 심으면 모조리 말라죽었다. 뿌리가 상할까, 흙째 옮기기도 해봤고. 거름이 부족할까, 퇴비도 듬뿍 쳐봤지만 열에 아홉은 고사를 면치 못했다.

그래도 저만은 살아서, 다시 살아서 그런 것도 알게 되어 진혁은 흐뭇했다.

깨끗이 씻은 산딸기를 엄마에게 드린 후 동생 손유진이 자는 모습을 지켜봤다.

‘햐-, 어쩜 이렇게 천사 같을까.’

앙증맞은 손가락도 만지다가, 서로 손 크기도 비교해 보다가, 아기 손을 끌어다 제 뺨에 대보기도 했다. 동생에게서 나는 아기 냄새도 맡았다.

머리가 추울까 손바닥으로 살포시 덮어주며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건강하게 크거라.’

돈은 오빠가 벌면 된다.

벌지 못하면 아버지 땅 좀 몰래 팔지 뭐.

디테일한 미래 정보는 몰라도 돈 버는 요령은 알고 있다. 혼자서 모든 걸 헤치며 살 수 있었던 까닭이다. 토지 거래 지식 정도는 외울 필요도 없다.

‘인감도장 빼돌리고, 인감증명서와 가족관계증명서 발급받고, 위임장 위조하고, 매매계약서에 도장 쿡-.’

지식에 시간차가 있으니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모르는 건 중개인에게 물어보면 된다.

아무렴, 땅부자의 평범한 아들이라면 몰래 땅도 팔아먹고 그러는 거지.

***

시골의 여름은 햇볕만 피하면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그 흔한 소나무 그늘에만 있어도 열기가 가셨고, 흙으로 벽을 세운 온돌집은 한낮에도 적당한 기온을 유지했다.

진혁은 집과 바다의 중간쯤에 있는 숲을 좋아했다.

거기에 앉아 있으면 저 멀리 개울과 바다, 저수지, 구봉산까지. 동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시원한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 열기를 식히기에 좋았다.

달리기도 빼놓지 않지만, 그 나무 밑에 앉아 명상도 거르지 않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차분히 숨을 쉬고 있노라면 나무 냄새, 흙냄새가 몸을 깨끗이 만들고 보이지 않는 뭔가를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신기해, 예전에도 이런 걸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불가능했겠지. 술 취한 양부의 주먹이 언제 날아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웅크려 살았으니, 이는 분명 마음의 평화가 선행되어야 할 수 있는 명상이리라.

한차례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 번의 들숨으로 감당이 버거운 공기가 들어찼다. 폐가 한껏 부풀고 숲의 생명력이 온몸을 채웠다. 송진과 온갖 풀냄새가 어우러져 마음을 한층 더 평온하게 만들었다.

‘음-, 스멜-.’

헤헤헥-.

장군이도 명상을 즐기는 것 같았다.

역시 명견이다.

***

진혁의 여름방학은 특별했다.

아빠의 배려로 엄마는 한 달이 넘도록 내내 집 안에서 아기만 어르며 몸조리를 했는데, 그나마도 진혁이 동생 유진을 전담 마크했기에 엄마는 현대의 어느 산후조리원보다 뛰어난 서비스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엄마, 진지 드세요.”

후릅-.

소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을 맛본 엄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머나, 이거 우리 진혁이가 끓인 거 맞아?”

“네. 엄마 닮아서 손맛이 있나 봐요.”

뻥입니다, 어머니.

왕년에 성인이 된 후 25년을 줄곧 혼자 살았다. 사 먹는 음식이 질려 혼자 해 먹는 날이 많았으니 어린 몸이 되었어도 요리는 어렵지 않았다. 운동도, 요리도 몸이 기억했기에.

“곧 개학인데 우리 아들 마음껏 놀지도 못했네.”

엄마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가 씻거나 화장실에 가실 때면 항상 아기 옆을 진혁이 지켰다.

삵이나 족제비가 젖먹이의 목을 물었다는 이야기를 동네 노인들이 하는 걸 들었다. 물론, 옛날이야기였고, 읍내에만 나가도 승용차가 다니고 사람이 많지만, 시골에는 살쾡이나 족제비가 많이 산다. 이 흉악한 놈들이 언제 아기 냄새를 맡고 덤빌지 모른다는 생각에 진혁은 동생을 밀착 경호했다.

“애기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요.”

이제 생후 두 달로 접어드는 동생 유진을 안고 진혁이 웃었다. 오빠를 올려다보며 입을 꼬물꼬물 움직이는 동생이 너무 사랑스럽다.

“어루루- 아쿵-!”

“꼬잉꼬잉잉-.”

까꿍짓을 해도 아직 웃지는 않지만 오빠를 알아보고 뭐라뭐라 오물거리는 것 같다. 오빠와 눈을 맞추며 눈썹을 움직이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했다.

진혁은 이전 생에 결혼을 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 아기를 예뻐하는지 동생이 생기기 전에는 몰랐으니까.

과거로 오기 전 진혁은 결혼의 기로에 있었다.

‘회장 딸.’

지금쯤 다섯 살이나 되었으려나?

진혁보다 다섯 살이 적었고 직속 상관이었다. 지금쯤 서울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으려니.

‘이번 생에는 인연이 닿지 않겠지.’

대기업 회장의 딸. 진혁이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만날 일 없는 위치의 사람이었다. 찾아간다 해도 만나줄 리 만무하겠지. 그녀를 생각하니 열 살 진혁의 가슴이 괜시리 두근거렸다. 피도 눈물도 없이, 친구도 몇 없이 억척스럽게 살던 진혁을 유일하게 두근거리게 했던 여자였다.

‘이제 생각하니 하는 짓이 귀여웠어.’

대마법사. 1년 365일 내내 생리하는 여자처럼 미간을 찡그리고 다닌다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그룹 후계자 수업을 받기 위해 핵심 계열사에 부임했고. 뛰어난 두뇌와 추진력으로 그룹을 휘어잡았으니, 누구도 그녀가 그룹의 주인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그 배후에 손진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과거의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미래의 사람들은 진혁의 기억에만 존재한다.

미래의 정보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누군가 저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실컷 성공하라지.

진혁에게 소중한 것은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혹시 우연히라도 만난다면······.’

잘해줄게요.

“흐므아아아-.”

손 싸개로 덮인 손을 번쩍 들고 유진이가 하품을 했다.

그 자태가 꽃게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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