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 대마법사 (2) >
“으애애-.”
“엄마, 유진이 배고픈가 봐요.”
“우쭈쭈, 우리 딸 맘마 먹자.”
동생을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안기고 마당으로 나왔다.
모유 수유하는 엄마의 프라이버시도 소중하니까.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심심하네.’
다정한 가족과 함께 살아서 행복한 반면, 그와 별개로 심심한 감도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더니 그건 회귀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살아봤기에 더 지루했다.
‘으아-, 할 게 없어서 그런가. 더 느린 거 같네.’
장군이를 데리고 바다로, 저수지로 뛰어다녀도 시계는 그대로였다. 아빠와 낚시를 다녀와도, 동네 친구 미경이와 바가지 가득 산딸기를 따와도 달력은 넘어가지 않았다.
‘숙제하고 아빠한테 가 봐야지.’
진혁은 아지트가 되어 버린 평상에 엎드려 방학숙제를 챙겼다. 친구들은 일기를 개학 전날이나 개학 날 아침에 몰아서 쓸 텐데. 정신연령도 맞지 않으니 동네 여자아이들과 어울리기도 불편했다. 차라리 오늘의 일기나 마저 쓰기로 했다.
「······대저 생명이란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어머니의 숨결과 강인한 아버지 품의 어우름이 없다면 홀로 피어나기 수월치 않으니, 내 동생만 보아도 인간이 저 홀로 태어나 살아간다고 여기는 것은 얼마나 큰 오만인가······.」
일기를 쓰던 진혁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허-, 이거 참. 열 살짜리가 일기를 이렇게 쓸 리가 있나?’
없지. 지난 겨울방학 일기도 아빠가 써주신 것 아니냐며 최응묵 선생님이 추궁 아닌 추궁을 했었다. 비록 웃는 얼굴이었지만 진혁에게는 머리의 피가 빠져나가는 경험이었다.
‘최미경 어린이도 함께 혼났지.’
필체와 내용이 흡사한 탓이었다. 최미경 어린이의 일기는 왼손으로 썼는데 어떻게 알아보셨을까, 역시 선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튼, 최응묵 선생은 천사였지만 3학년 담임 선생은 조금 까다롭다. 진혁에게는 인자하게 구는 편이긴 해도 까다로운 건 까다로운 거다. 진혁은 최선을 다해 아이처럼 행동하고자 했다.
‘애들은 일기를 어떻게 쓰나?’
지우개질을 하며 진혁이 미간을 오므렸다.
북북-찌익-.
“아이고야-.”
강력한 지우개질을 견뎌내지 못하고 일기장이 찢어졌다. 그래도 지우던 건 마저 지워야 한다. 애늙은이가 쓴 일기를 지우개로 열심히 지우는데 귀에 익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웅-.
평상에 엎드린 채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우리 집으로 오네? 설마!’
진혁이 벌떡 일어섰다.
그 소리에 평상 밑 그늘에서 낮잠을 자던 장군이가 화들짝 놀라 으르렁거렸다.
진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차를 노려봤다. 이전 생에 이맘때 양부모의 손에 끌려 읍내로 가지 않았던가. 악연이 반복되는 걸까.
그런 생각도 잠시, 진혁이와 장군이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벤츠가 아니었을 텐데?’
읍내에서 다방을 하던 그 사람들은 낡은 승용차를 타고 왔었다.
그런데 저 차에는 서울 번호판이 붙어있다.
벤츠가 왜 여기로 와?
승용차 구경이 힘든 시골이고, 진혁이 차에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지만 벤츠 엠블럼까지 몰라볼 정도의 까막눈은 아니었다.
사건과 시간이라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인과를 연출한다.
이전 생에는 엄마의 자매라는 사람에게 끌려가 다락방에 갇혔었는데, 지금은 아기와 노닥거리다가 평상에 엎드려 여유작작하게 방학 숙제를 하고 있지 않은가. 저렇게 집 마당에 벤츠가 들어오는 것도 구경하고 말이지.
‘오래 살고 볼 일이여어-.’
열 살 손진혁의 감상이었다.
그나저나 저건 누구냐.
벤츠가 진혁의 집 바깥마당에 멈춰 섰다.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각각 남녀가 내렸는데, 교양있는 현대의 서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듯 두 사람 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사실은 승용차에 붙은 서울 번호판을 보고 안 거지만.
여자가 뒷좌석 문을 열어 웬 여자아이가 내리는 걸 도왔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진혁에게 다가왔다.
으르르-.
장군이가 몸을 낮추고 끓는 소리를 내며 경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혁이 아는 얼굴이었다.
‘홍기준 회장?’
이전 생에서 진혁을 그룹 실세로 치켜세우며 너스레를 떨던 세인그룹의 오너. 지금은 젊은 시절이니 진혁이 기억하던 얼굴보다 팽팽했으나, 분명 홍기준 회장이었다.
“장군이, 조용!”
낮은 소리로 장군이를 진정시켰다. 낯선 사람을 봐도 꼬리를 흔드는 녀석이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니 이상하지 않은가. 서울 사람이라 그런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진혁도 서울에 살다가 과거로 돌아왔기에 장군이가 경계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나름 합리적 의심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짧은 시간, 진혁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도대체 왜 온 거지?’
화학으로 출발했지만, 세인그룹은 중동에서의 건설업과 홍콩을 기반으로 한 무역업으로 성장한 회사다. 탄탄한 재정 덕분에 외환위기를 넘기고 전자와 전기, 생활가전, 보험사까지 공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한 덕에 대한민국 10대 그룹사에 포함되기도 했다.
‘내가 있는 동안 3위까지 올라갔었지.’
그 공을 인정해 홍기준 회장이 진혁을 그룹 실세라 부른 거였고.
사위로 들이려 알게 모르게 공을 들였겠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진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나를 알아보려나?’
그럴 리가. 그런데 도대체 왜 온 걸까.
복잡한 진혁의 속을 알 리 없는 홍기준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진혁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역시 서울 사람의 인사법이었다.
안녕이라니. 이 동네 사람들은 ‘시방 밥 먹은 겨?’ 이런 식인데. 오랜만에 듣는 인사가 새로웠다.
일단은 평상에서 내려왔다. 어쨌거나 손님이고 어른이니까.
젊은 시절의 홍기준을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노년의 회장은 푸근하고 선량한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매서움이 도사리고 있달까. 역시 그룹 회장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이 댁 사장님이 아빠 되시니?”
“네.”
“아빠 안에 계시니?”
“아뇨. 논에 나가셨어요.”
“아-, 그러셨구나.”
홍기준이 평상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평상에 펼쳐진 책들을 보며 진혁이 뭘 하던 중이었는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함께 차에 타고 왔던 여자가 다가왔다.
‘홍수정?’
그럴 리가 없잖아! 진혁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마치 미래의 홍수정이 온 듯 너무나 빼닮은 미인이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는 환갑이 넘은 사람이라 ‘홍수정이 모친을 닮았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유세라 이사장.’
홍기준의 배우자이며 세인화학 창업주의 손녀. 무려 오빠 둘을 제치고 물려받은 그룹의 경영권을 남편 손에 쥐어준 사람이다. 그리고는 자신은 기초스포츠 육성에 헌신한 존경스러운 여인이었다. 지금은 서른을 좀 넘겼을까, 아무튼 놀랍도록 닮아서 진혁은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저 꼬맹이는.
‘진짜 홍수정?’
대마법사. 어제까지만 해도 다시 볼 일 없을 것 같던 여자. 모두에게 차가웠지만 진혁을 대하는 것만은 어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술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진혁에게 전화조차 걸지 못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진혁이 제 사수이기도 했고, 진혁이 그만큼 무섭게 일처리를 했으니. 게다가 아무리 상사라도 틀린 소리를 하면 곧이곧대로 지적을 하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고.
‘이런 꼬맹이에게 수만 명의 직원이 덜덜 떨었다니.’
진혁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양갈래로 꽈배기처럼 묶은 머리는 마치 삐삐 같았고, 노란색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귀여운 아이였다. 홍수정은 시골 풍경이 낯선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흰색 타이즈에 빨간색 구두를 신고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유세라가 진혁을 유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빠는 언제 오실까?”
“농사일은 해 떨어질 때까지 해요. 아직 오시려면 멀었어요.”
“어머나,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말을 참 잘하네? 사투리도 안 쓴다, 너?”
별게 다 신기한 모양이다. 자기도 사투리 안 쓰는구만. 아, 이 아줌마는 서울 사람이니 그게 당연한 건가.
홍기준이 급히 나서서 대화의 키를 고쳐 잡았다.
“그럼 엄마는 계시니? 왔을 때 인사라도 드리고 갔으면 좋겠는데.”
시골 사람에게 서울의 부잣집 사람들이 왜 인사를 하겠다는 걸까.
“안에 계신데 들어가시면 안 돼요.”
홍기준의 물음에 진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진혁은 이전 생에서도 홍수정에게 직언을 했고, 회장 앞에서도 허리를 굽히거나 주눅 들지 않았었다. 어차피 혼자였기에 회사에서 쫓겨난대도 아쉬울 것 없었으니.
다른 때 같았으면 차 소리를 들은 엄마가 나오셨겠지만, 엄마는 갓난쟁이를 돌보는 중이다. 그리고 병원도 아닌데 아기를 외부인에 노출시키면 안 될 거라 생각했다. 갓난아기는 면역력이 약해서 외부와의 접촉을 자제해야 한다고 들었다.
“안 돼? 왜? 아줌마 나쁜 사람 아니야.”
유세라가 웃었다.
여장부다운 미소였다. 시원시원하고 비릿하지 않은.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엄마는 아기 낳으셔서 몸조리 중이세요. 외부 공기는 아기에게 안 좋을 수 있거든요.”
“아,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유세라가 진혁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처음 만난 남자아이와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 전혀 예상 못했는지 신선한 충격을 온 얼굴로 표현했다.
진혁도 기분이 묘했다.
업무 관계 외에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던 과거의 인물과 이렇게 어른과 아이로 마주하다니.
“어어-, 그거 만지면 아야 해-.”
꼬맹이 홍수정을 지켜보던 진혁이 갑자기 기겁을 하고 달려갔다.
다섯 살 홍수정이 마당 주위에 자라난 도깨비풀을 만지려 했기에 진혁이 급히 막아섰다.
홍수정이 놀란 눈을 하고 진혁을 올려봤다. 그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갑자기 못하게 막으니 서러웠던 게지.
순발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꼬맹이가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막아야 한다.
“자, 봐봐.”
진혁이 도깨비풀을 뜯어 자신의 반바지에 대자 풀이 거짓말처럼 옷에 들러붙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가시가 많아 피부에 닿으면 생채기를 내곤 하는 풀인데, ‘며느리밑씻개’라는 이름이 붙은 풀이다.
며느리를 미워하는 못된 시어머니가 며느리 밑 닦을 때 쓰도록 가시가 많은 풀을 뜯어줬는데, 그게 이 풀이라는 배경 스토리가 있는 잡초였다. 이 사포 같은 풀로 밑을 닦게 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식물이었다.
“아-.”
홍수정은 똑똑한 꼬마였다.
진혁이 왜 자신을 말렸는지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오빠아-.”
홍수정이 진혁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입을 빠끔거렸다.
정확히는 삿대질 같은 손가락질이었지만 그마저도 귀여웠다. 진혁의 웃는 모습을 처음 보며 삿대질 하던 모습과, 술에 취해 콧소리 섞어 오빠라고 부르던 꽐라가 겹쳐 보인 건 착각이었을까. 진혁의 가슴이 쓸데없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별꼴이네. 꼬맹이한테 오빠 소리 들었다고 심장이 나대다니.’
그것도 아저씨가 말이지.
진혁은 회귀 전의 홍수정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이혼녀. 홍수정은 국내 1위 그룹 오너의 삼남과 결혼했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파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에 파혼이 맞다, 결혼식을 했으니 이혼이 맞다 등 가십이 많았으나 진혁은 진실이 무엇인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무튼 쾌활하던 홍수정이 울적해 보인 것은 그때부터였다.
‘얘랑 몇 번 둘이서 술을 마시긴 했었는데.’
업무 중에는 대체로 차분하고 차가운 이미지였기에, 진혁에게 꼬마 홍수정의 모습은 파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하긴, 꼬맹이가 차가워 봤자 얼마나 차갑겠냐.
“진혁아-, 누가 오셨니?”
대문이 열리며 엄마가 나오셨고, 평상에 앉아 진혁과 홍수정을 보던 홍기준과 유세라가 일어섰다. 그런데 엄마 품에 있어야 할 동생 유진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 참! 애기를 혼자 두면 어떡해요.’
족제비! 살쾡이!
진혁은 황급히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분히 오빠의 과잉보호로 볼만한 상황이었지만 진혁에게 여동생은 그 정도로 약하고,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어어-, 오빠아-.”
얼씨구.
집 안으로 들어간 진혁을 따라 꼬맹이 홍수정이 호다닥 달려갔다.
장군이는 여전히 홍기준을 노려보며 소리 없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