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화 (2/310)

1화. 천마, 리치왕과 조우하다 (1)

“헉. 헉.”

무림맹의 군사, 제갈유진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골랐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각.

맹주의 긴급 호출을 받고 도착한 것이다.

“속히 들어가 보십시오.”

집무실 앞에 호위하던 사내가 안을 가리켰다.

제갈유진은 숨을 고르며 문을 열었다.

“군사, 제갈유진입니다.”

집무실로 들어간 그녀는 곧바로 예의를 갖췄다.

동이 트지 않은 시각이라, 책상 위에 호롱불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밝아 오는 새벽빛에 비친, 한 그림자가 말했다.

“왔는가. 거기 서류를 읽어 보게.”

제갈유진은 직감적으로 맹주의 심기를 읽으며 생각했다.

‘전쟁이라도 난 건가.’

사실 호출 방식도 그랬다.

무림맹주가 이 야심한 시간에 긴급하게 부를 만한, 심지어 맹 안의 모든 이의 눈을 피해 오라고 할 정도의 극비라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사박.

책상 앞, 종이를 집어 든 그녀의 눈에 글자들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 유월 초.

어둠이 내리 깔린 곤륜파 성산봉(聖山峰) 정상에서 정체불명의 구멍이 생겨난 것을 발견.

[직경은 오천 장(1,5km)]

[둘레는 1만 5천장(4.5km)에 육박하는 너비]

-곤륜파 각주, 당주급 인사들이 재빨리 조사에 나섬.

‘직경 오천? 구멍이 이렇게 클 수가 있나?’

제갈유진은 첫 장의 한 구문부터 의아함을 느꼈다.

가끔 산이나 벌판에 지면이 가라앉으며 굴혈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개는 커 봐야 직경 10장 내외이며, 정말 드물어 봐야 크기가 백 장을 넘지 않는다.

○ 이듬해 겨울.

곤륜파가 자파 내에서 의견서를 취합함.

[폭 이백 장 아래까지 발판 설치 완료함.]

[깊이 측정 불가.]

[원인 추정 불가. 발생 근원 알 수 없음.]

[일대제자 등 4인(人) 추락사.]

[이대제자 등 12인(人) 실족사.]

○ 올해 봄.

[돼지 머리에 커다란 도끼를 든 영물 하나가 기어 나옴]

-제압 과정에서 수석 일대 제자 진명이 사망.

“영물?”

반사적으로 그녀는 맹주를 쳐다봤다.

무림맹 각파의 모든 신상 내력을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곤륜의 진명이 누군지는 안다.

강호에서도 손에 꼽히는 후기지수 아닌가.

그런데 고작 영물 하나가 튀어나왔다고 제압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하나, 맹주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녀의 시선은 다음 장으로 향했다.

○ 사월 초.

[인면지주. 사람 얼굴을 한 거미 이십 마리가 기어 나옴]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괴한 영물 여덟 마리가 나타나 악취를 뿜음.]

-일대제자 이십여 명 사망.

-장로 여섯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음

○ 오월 초.

[굴혈에서 돼지 머리에 거대한 도끼를 든 짐승 수백 마리가 출현하여 인근 거리를 활보.]

[투창을 들고, 검으로 베어도 재생하는 기이한 괴수 수백 마리가 추가로 발견.]

[뼈만 남은 강시들이 장검을 휘두르며 대규모 등장. 숫자 추정 불가.]

[뼈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괴인들이 나타나, 강시들을 지휘하며 기이한 사술을 사용하다.]

-일대, 이대제자 백여 명의 사상자.

-장로 십여 명 사망.

-청명 진인 사망.

* 긴급. 긴급. 무림맹에 도움 요청.

“아!”

순간적으로 손을 떨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보고서를 든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다.

고작 영물들에게 일대제자, 각 문파의 행동대가 죽었다. 이것만으로도 놀랍고 어이없는 일인데.

백대고수. 일파의 장문인급 고수인 청명 진인이 죽다니.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스륵.

제갈유진은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남겨 놓고는 눈을 감았다.

서류를 만져 보니 아직 덜 마른 습기가 느껴진다.

모두 오늘 내에 도착한 것이리라.

내용을 보고 추측건대, 곤륜파가 자체적으로 처리를 하려다가 실패한 것일 터.

그래서.

그래서 더 두려워졌다.

구대문파의 하나인 곤륜이, 이렇게 다급하게 구조를 청할 정도라면.

마지막 장에는 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일까.

○ 오월 십일.

[온몸이 뼈만 남고 갑옷을 두른 시체가 나타나 그들의 주인이라 말하다.]

[그는 죽은 곤륜 제자의 시체를 일으키다.]

[처음으로 중원어를 사용하며 스스로를 리치왕(理治王)이라고 말하다.]

[스스로 밝히기를,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하며. 곤륜파에게 금룡(金龍)의 거처를 묻다.]

-답변을 기다리는 중.

“이게 끝입니까?”

제갈유진이 묻자 맹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하면, 이다음엔 어찌 됐습니까?”

맹주는 슬쩍 눈을 감더니 고개를 돌렸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비친 그는, 오랜 전장을 겪은 노장과 연로한 노인의 눈빛을 동시에 비추고 있었다.

“모두 죽었네.”

“……!”

제갈유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곤륜을 전멸시킬 정도의 군사 전력이라니.

이 정도면 재앙이다. 적의 실력은 물론이고 수가 얼마인지 파악도 되지 않는다.

이런 이들이 중원으로 쳐들어온다면…….

“무림맹에 총동원령을 내릴 것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물론. 정사지간, 사파들에게도 협력을 구해야 해. 그간의 입장 차가 무엇이든 지금은 그저 생존이 우선…….”

“맹주님!”

그때였다.

벌컥!

난데없이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라면 문책이 날아올 행위임에도 맹주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놈들의 방향을 파악했습니다!”

“그래. 어디로 갔느냐? 사천이냐? 아님 감숙?”

“아닙니다.”

“하면?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맹주와 제갈유진의 시선이 차례로 그에게로 모였다.

당황과 불안감이 한데 뒤섞인 표정이 새벽빛임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서장… 십만 대산입니다.”

사내의 입에서 전혀 예상지도 못 한 곳이 흘러나왔다.

한때 강호를 휘어잡았던 한 문파.

아니, 지금도 여전히 강호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집단이 거론된 것이다.

“마교가 있는 그곳 말입니다.”

* * *

마교. 십만대산.

“뭐라고! 철혼사대(鐵魂私隊)까지 무너졌다고?”

마교 교주 천월성은 단상을 박차고 소리쳤다.

벌써 세 번째 패배다.

난데없이 나타난 괴수와 영물 군단들.

그들에 맞서 특급 결사대까지 투입했지만 결국 무너져 버린 것이다.

“대부분 제3의 전선, 제4의 전선에서 몰살당했습니다. 아직 살아남은 단원들이 분전하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고작 미물 따위에게……!”

빠득.

천월성은 계속된 비보 앞에 이를 악물었다.

이른 새벽.

천마신교의 영역에 영물과 괴수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나는 지금.

천마신교의 병력 중 이 할에 가까운 수가 몰살당해 버린 것이다.

“교주, 삼개전단(三開戰團)을 투입했으니 기다려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좌우로 줄지어 선, 얼굴에 화상 자국이 도드라진 장로 하나가 입을 열었다.

삼개전단은 근 백여 명으로 구성된, 본교 전력의 삼 할에 달하는 일기당천의 고수들이다.

“녹 장로, 듣기로 놈들의 수가 근 수만에 달한다고 하네. 아무리 삼개전단이라 한들, 그 많은 숫자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

“…….”

교주의 물음에 다들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 어떠한 대안도 무의미했다.

놈들은 강했고, 처음 보는 해괴한 것들이었고, 무엇보다 그 수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천마신교의 유구한 역사가 서린 영역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교주. 보고드립니다.”

그때였다.

흑의를 입은 사내가 오른팔을 부여잡으며 나타났다.

교주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상대는 결사대를 통솔하는 수장, 흑영(黑影)이었다.

“어찌 되었나.”

“당했습니다. 수백 수천을 베었건만, 그 이상의 수가 몰려들었습니다. 본대는 채 삼각(45분)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몰살당했습니다.”

“뭐라!”

충격. 또 충격의 연속이다.

천마신교의 마지막 패. 삼개전단.

강호에 나가지 않을 뿐, 적수를 찾아볼 수 없다고 알려진 최정예 부대가 일거에 몰살당하다니.

“대체 놈들의 존재가 무엇이더냐! 어디서! 뭘 원하고 나타났다 하더냐!”

거듭되는 패전 보고에 결국, 냉정함을 잃어버린 장로 중 하나가 소리쳤다.

흑영이 고통을 억누르며 답했다.

“살아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괴수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거미, 사람 몸을 가진 박쥐, 사자 머리에 뱀 꼬리를 달고 불을 내뿜는 짐승… 대화는 통하지 않았고 오로지 살육을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허어…….”

“대체…….”

침음하는 장로들.

다들 중원에 나갔다면 일가를 이룰 힘과 방대한 경험을 쌓고 있었지만, 이번 사태에선 누구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이 쓰는 힘의 원천은 확인해 보았느냐?”

교주 천월성은 차분해졌다. 극도에 몰린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기 때문이리라.

“불꽃의 기운도 보였고 때론 빙백(氷白)의 기운도 사용했습니다. 그중에서 말을 탄 갑주, 인간으로 보이나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의 힘은 어둠의 기운이었습니다. 흡사 마공과도 같았습니다.”

“마공이라?”

“마공이라고 했느냐?”

장로들은 귀를 의심했다. 한낱 미물 따위가 마공과 흡사한 기운을 뿜어내다니.

“흐으으음.”

교주는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

벽 가장자리에서 고개를 숙이는, 온몸에 기괴한 불꽃이 그려진 옷을 입은 노인이 보였다.

“준비됐느냐?”

“예. 그렇습니다.”

터벅.

교주는 단상 위를 내려왔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일갈했다.

“천마군림대, 철혈수라대, 은거 고수 등 여타 총단의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투입시켜 그들을 막아라. 어떻게 해서든 한 시진(2시간)은 버텨야 한다!”

“존명!”

“존명!”

명이 떨어지자 수하들이 움직였고. 장로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미 천마신교의 운명을 건 싸움이었다. 지위 고하가 따로 없었다.

“가자. 천금보다 귀한 시간이다.”

그르릉!

교주가 발을 디디자 바닥이 열리고 계단이 드러났다.

바닥은 곧 메워지고,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 * *

기이이잉. 철컹.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총단 꼭대기에 있는 광장이었다.

그 중심. 바닥에는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불꽃의 문양과 불, 피가 가득했다.

“다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오르시면 됩니다.”

“흐음.”

교주는 원 모양으로 빙 둘러서 제문을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기기아대 소속. 천마신교 최고의 술법사들이었다.

무림의 온갖 괴력난신. 죽은 자들의 기억을 읽거나, 잡귀를 불러들이는 등, 선천적으로 신묘한 이능을 가진 자들.

“정말로 원하는 혼을 불러들이는 게 가능한가?”

“고서를 토대로 유추하건대, 이론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나 실제로는 해 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이토록 큰 대법은 저희들로서도 처음인지라.”

한 술법가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옛말에 이르기로 오래된 영혼일수록 연에 엮이지 않으니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하였습니다. 제물의 양이 부족하면 자격 없는 잡령이 들러붙을 수도 있다 하고.”

“상관없다. 지금은 다른 수도 없어.”

스윽.

교주는 광장의 중심. 원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천마신교의 정예를 잃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고른 패.

바로 이승과 다른 영(靈)을 부르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보다 월등한 강한.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절대적인 고수를 불러들이는 것.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실패하더라도 교주님의 목숨은…….”

“이미 들었다. 뜸 들일 필요는 없으니 서둘러라.”

기기아대 대주 기설(基舌)의 말에 교주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리고 조용히, 팔각형의 유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다 내가 능력이 없는 탓이다.’

현시대의 마교의 힘은 여러모로 부족했다.

그건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백 년 전.

혈마가 교주로 있었던 때에는 강기를 뽑아내는 고수가 무려 백여 명에 달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20대 교주인 살마는 자그마치 탈마지경에 근접했다고 알려졌다.

삼백 년 전은 어떤가.

초마를 넘어 극마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 다섯이나 되었다.

그들 중에는 강기를 초월한 초강기까지 자유자재로 뽑아낸 자도 있다고 했다.

한데 지금은 없다.

극마에 겨우 오른 사람은 자신 한 명. 그것도 완벽히 이루었다고 볼 수 없다.

초마의 경지에 오른 자 역시도 넷뿐이다.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천운이 닿는다면…….’

죽음 앞에 선 교주 천월성은 아득히 드리워지는 하나의 존재를 떠올렸다.

마교의 유구한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고수들의 존재를 단숨에 지워 버렸던 인물.

단언컨대, 그가 온다면 그 수가 수만이든, 수천만이든 모두 지옥을 맞보게 될 것이다.

그는 마교의 모든 무학을 집대성한, 정점을 넘어 신(神)이 된 인물이었으니까.

“시작하게.”

“존명!”

손을 내저으며 교주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절대자의 영혼을 불러들일 술법가들의 의식이.

“부디 오소서. 천마이시여…….”

그의 읊조림과 함께.

스으으으-.

뜨거운, 그리고 지독히 시린 냉기가 동시에 불었다.

* * *

천월성은 느꼈다.

이건 필시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다른 기운이다.

아마도 이게 흔히 말하는 혼령. 사령(死靈)의 기운일지도 몰랐다.

“오소서. 사하리 발라…….”

점점 제문을 외우는 술법사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럴수록 오한이 들린 것처럼 천월성은 온몸을 떨어댔다.

‘뭐지?’

그때였다.

사아아아악!

한순간, 맹렬한 바람이 불어와 옷자락을 펄럭였다.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하나, 그것 역시 이 세상 기운과는 다른 형태로 그의 주위에 맴돌았다.

“왔습니다.”

때마침 기설이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삼 장 높이. 희뿌연 연기가 바닥에 그려진 원의 고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대가 날 불렀는가…….]

음험한 목소리.

영계(靈界)와 이승을 잇는 목소리라 그런지 사람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렇습니다. 혹시 누구신지 존함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교주의 물음에 잠시 침묵이 감돌더니. 영체는 불꽃이 그려진 바닥을 한 바퀴 빙 돌며 대답했다.

[재미있는 아이들이군. 난 염법존자(染法尊者)라고 한다.]

파라라락.

그 말에 기설 옆으로 노인 하나가 두꺼운 책 하나를 펼쳐 들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한쪽 면을 가리키자 기설이 말했다.

“약 250년 전에 천축에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악불사원을 세운 자로 존자 이천 명을 거느린 수장이었지요.”

“그래? 무공은 어느 정도냐?”

“교서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무의 극의를 보았다고 합니다. 중원 기록에도 천하삼대고수 평을 받을 만큼 강했다고도 적혀 있습니다.”

[크큭. 그래. 모두 내 발아래에 있었지.]

기이한 웃음소리가 등골을 서늘하게 했지만, 교주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천하 삼대 고수.

강하다고 하나 과연 지금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되는가.

“부족하네.”

잠시 고민한 후, 교주는 기설의 향해 거부 의사를 표했다.

“부름에 답해주신 것은 감사드리오. 하나, 귀하는 우리가 모시기에 부족한 분이로군.”

[뭐라? 감히 네놈들 따위가 능멸하려는 것이냐? 내가 누군지 알면… 아아아악!]

그렇게 한 영(靈)이 허공으로 흩어졌고.

“오소서. 사하리 발라…….”

그리고 다시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르르르르르…….]

일각이 흘렀을 때쯤.

“왔는가.”

2번째 영체가 나타났다.

한데 이전처럼 희뿌연 영체가 아닌 흑빛이 그들의 몸을 감쌌다.

‘마공을 익혔다.’

교주는 느꼈다.

이건 필시 이승에 있을 때 어둠의 기운을 품었던 무인이다.

자신의 마기(魔氣)와 허공에서 부드럽게 얽혀 들어가는 것을 보면.

“고인이시여, 제 말이 들리십니까? 저희가 그대를 불렀습니다.”

교주가 고했다.

[나를? 그랬군. 그래서 여기로 오게 된 거군.]

담담하게 의념을 이어 가는 영체.

교주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조심히 물었다.

“혹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존함이라. 글쎄… 내가 누구였지?]

“예?”

이게 무슨 말인가.

스스로를 모른다니.

[나도 당황스럽군. 이렇게 대화할 수 있음에도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군. 혹 너희들은 아느냐? 내가 누군지?]

‘이럴 수가…….’

교주는 눈을 껌뻑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지금 그들이 하는 의식은 이미 죽어 고혼이 된 자를 부르는 것.

몸이 죽은 자는 혼백조차 흩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이미 옛날 옛적 고대에 저승으로 향한 넋이라면, 그 존재조차 희미해졌을 터.

절레절레.

교주는 고개를 저어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에 기설은 허공에 손을 스윽 그었다.

[자, 잠깐.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

괴로움에 소리치는 영체.

하지만 곧 기설의 손짓에 따라 허망하게 사라졌다.

“오소서. 사하리 발라…….”

“오소서. 사하리 발라…….”

제문의 시도는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문을 읽어 대는 신도들의 얼굴엔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벌써 열 번째 영혼이 불렸다가 돌아갔다.

교주는 그중 단 하나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름 살아생전에는 일가를 이루었으되, 십만대산이 침공받은 이 상황을 타개할 수준까지는 되지 못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몇 가지 기억에 남은 이들이 있었는데.

[본좌가 천하제일인이었다!]

“당시 소림 방장인 태허대사와 동수를 이룬 기록이 있습니다만?”

[그, 그건 종이 한 장 차이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사라진 놈 하나.

[본좌로 말할 것 같으면 8대 마교주로 중원을 호령했던 인물이지. 내 검에 천하십대고수 전원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기록으로는 한 명만 겨루었다고…….”

[그… 랬었나?]

구라 치다 들통나 도망간 놈 하나.

[본좌는 십만대산뿐만 아니라 혈교까지 통합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극강기는 못 쓰시는 게 맞지요?”

[그땐 워낙 태평성대인 터라…….]

그냥 약한 놈 하나.

[나는 중원십대고수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리고 솔직한 놈 하나.

[본좌를 선택해라! 본좌가 전대 고금을 통틀어 천하제인일이다!]

그리고 또라이 하나.

이런 이들이 지나갔다.

그사이 제의를 계속하는 이들은 피로로 눈 밑이 꺼멓게 죽어 갔고, 교주 천월성 또한 답답함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런 와중에.

쿵! 쿵! 쿵!

총단이 무너질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교주, 이건…….”

기설은 비틀거리며 교주를 바라보았다.

드드드드득!

지진에 못지않은 흔들림. 바닥에 서 있기 힘들 정도의 땅 울림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

의식이 방해받지 않게 주변을 지키던 호법의 전멸이다.

“벌써 왔단 말인가…….”

교주 천월성은 허탈하게 말을 뱉었다.

제의를 시작한 지, 아직 채 한 시진이 지나지 않았다.

분명 신교의 모든 전력을 쏟으라 했거늘, 고작 그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전부 쓸려나갔단 말인가.

“끼아아아아악!”

쿵! 콰드득!

그때였다.

충격과 비명소리에 다들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유리 조각. 팔각으로 만들어진 창에 무언가 충격을 가한 것이다.

그루루루!

“저건 대체…….”

교주는 눈을 의심했다.

유리 천장 너머로 창을 부수는 괴수는 형체가 기괴했다.

십 척이 넘는 사람 몸체에다 괴물처럼 생긴 얼굴과 두 개의 뿔.

전신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피부와 날개.

분명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기설!”

“예! 어서 빨리 제문을 외거라! 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교주는 재촉하고, 기설은 목에 핏대를 세워 제관들을 다그쳤다.

쿵! 쿵! 와장창!

창이 부서지며 쏟아져 내렸다. 기왕 이리된 것, 지금은 어떤 혼이라도 불러야 했다.

이대로는 천마신교의 마지막 시도가 헛되게 사라질 형편이었다.

“크윽! 대주님! 제물이 부족합니다…….”

“…할 수 없다. 모두 진(振) 안으로 들어가 피를 뿌려라.”

기설의 말에 제를 주관하던 제관들이 하나둘 몸을 날렸다.

파파팟.

그리고 하나둘, 손목을 그어 동맥을 끊었다.

바닥에 그어 놓은 원진 안에 사람의 생혈이 뚝뚝 떨어지며.

동시에 피를 쏟은 제관들은 목내이처럼 비쩍 말라 갔다.

“어…….”

“크윽…….”

의식을 시작하며 준비했던 마지막 패.

제관 자신들의 피로, 온몸의 생기로, 이름 모를 영(靈)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부디! 누구라도 오시오!”

그리고 마지막. 기설이 안으로 들어가 제문을 외우고.

푹.

외침과 함께 스스로 목의 경동맥을 끊어 버렸다.

촤아아악!

바닥에 뿌려진 피가, 거칠게 끓어올랐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총단 최상층 벽에 충격이 가해져 왔다.

단번에 사람 열 명은 지나갈 크기의 구멍이 생겨 버렸다.

“하아, 이리되는가. 우리 천마신교가…….”

홀로 남은 교주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르륵. 그르르륵.

결국 소환 의식은 실패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사방에 피가 가득했고, 영(靈)을 불러들이기 위해 목숨을 바친 신도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 희생도 헛되게, 혼령은 보이지 않았고 제단의 천장과 벽은 마물들에게 부서지고 있었다.

“이대로 마지막을 장식할 수는 없지.”

지이이잉.

천월성은 손에 있는 힘껏 마공을 끌어올렸다.

염화공(炎火功).

천마신교에 남은 무공 중 하나로, 한 줌의 염기로도 뼈를 녹인다고 알려진 마공이다.

비록 숙련도는 부족하지만, 천월성이 마지막 진원지기를 불사르면, 족히 수백 마리의 목숨은 가져갈 수 있을 터였다.

그르르륵.

그르르륵!

그런데 순간, 사방을 에워싸던 괴수들이 멈칫했다.

“……?”

천월성은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놈들은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분명히 뭔가를 꺼리는 모습이었다.

“설마.”

문득 천월성은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에 일렁이는 형체가 있었다.

이제껏 불러온 영(靈)들과는 다른. 그저 이 땅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일렁이는 힘이 뿌연 막(幕)을 형성하고 있었다.

천월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존재를 불러 보았다.

“…거기에 계십니까?”

대답이 없자 그는 다시 한번 불렀다.

“들리십니까? 제 목소리가…….”

[그대는 나의 후인이로군…….]

“아…….”

덜컥하고. 천월성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영(靈)은 범상치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불렀던 고대의 영들은, 단 하나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기묘한 일이로군. 대체… 어떻게 나를 어떻게 부른 거지?]

영(靈)의 부름에 교주는 답했다.

“고서에서 내려오는 제문을 통했습니다. 금불선승(金佛禪僧)께서 지으신 책입니다.”

[금불선승… 밀종(密宗)의 후예가 만든 것인가? 하기야. 사계의 영(靈)을 다루는 그들이라면, 어쩌면 날 부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재미있다는 것인지, 어처구니없다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대답.

하나, 교주 천월성은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영(靈)은 삼백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의 인물이라는 것.

왜냐하면 그가 언급한 밀종은, 존재 자체에 대한 자료마저 오래전에 사장되었기 때문이다.

구우우우우-!

“아!”

고대의 영(靈)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천월성이 눈을 의심할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철컥. 철컥.

뚫어진 천정을 헤집고 뼈로 된 말을 탄, 음울한 색의 갑주를 입은 장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갑주 안은 하염없는 어둠.

결코살아 있지 않은, 어떤 것이 살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천월성은 다급해졌다.

척 보아도 적들의 우두머리.

이들을 총지휘하는 놈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보통 녀석은 아니었다.

천장을 뚫어낸 수많은 괴수가 뼈 말을 탄 장수의 용력 앞에 잠시 경의를 표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 말이다.

“천마신교 22대 교주 천월성이 고합니다. 도와주소서! 지금 저놈들에 의해 신교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부디 제 몸에 들어와 미력한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

[…….]

영(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알아듣지 못한 것인가? 교주 천월성이 다급히 입을 열려고 할 때.

[시시한 이유로군.]

“예? 그게 무슨…….”

[이미 세상과의 연을 지운 나를 현계 하게 만든 것은 놀라우나… 그냥 너희 힘이 모자라는 이유로 산 자가 죽은 이의 힘을 청하다니. 대천마신교의 교주라는 놈이 부끄럽지도 아니한가?]

“……!”

천월성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천천히 고개를 떨구던 그의 입가에서 조금씩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인의 말씀대로 저의 미천함 때문에… 모두가 죽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치욕을 당해도 상관없었다.

저들에게 대항할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긴긴 시간 버텨 낸 수하들의 죽음을 의미 없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앞의 저 미물들에게 본타는 부서졌고 적들은 총단까지 파괴했습니다. 저들의 강함 앞에, 아니, 압도적인 힘 앞에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크르르르르! 콰드등!

천월성이 고하는 사이 괴수, 마물들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특히나 천장에서 시뻘건 육괴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아---우아아!”

키가 무려 1장에 달하고, 온몸에 근육이 가득한.

피부가 피처럼 붉은 거체는 손에 방패만 한 책을 들고 있었다.

책자의 표지.

그곳엔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그 얼굴은, 분명 인간의 것을 산 채로 벗겨 낸 것이었다.

“도와주소서. 선조들의 유산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습니다. 부디… 부디 미천한 이놈의 목숨을 받으시고 우리 자랑스러운 천마신교를…….”

[네 미천함이야 당연하다만…….]

“……?”

천월성은 멈칫했다.

어느샌가 아지랑이처럼 살랑거리는 기운이 자신의 몸에 스며들어 있었다.

마치, 몸의 주인인 천월성에게도 어떤 제약을 받지 않는 것처럼.

[…역시. 뒤에 도사리고 있는가?]

“…….”

[하기야 저놈이라면 너희가 당해 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스스스슥.

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천월성은 그 소리 속에 약간의, 작은 웃음기가 느껴졌다.

[좋다. 천월성. 본좌가 한번 경험해 보마. 이토록 강한 놈들이라니… 참으로 오랜만이군.]

그리고 그 기운은 점점 천월성의 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의식이 아릿아릿해졌다.

그때에야 비로소 천월성은 한 가지 잊은 것을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고인께서는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몸 안에 흘러 들어가는 기운을 느끼며 천월성은 물었다.

이제는 누구라도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알아야 했다.

적어도 자신의 생명을 가져가는 존재의 이름을.

“존함, 존함을 알려 주십시오. 존함…….”

[두려워 마라. 천월성.]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하나의 형체로 자리 잡았고.

한순간 천월성의 눈에 암운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들의 주인. 천마다.]

그것은.

탈마의 경지에 올라야만 생기는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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