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3화 (4/310)

3화. 천마, 리치왕과 조우하다 (3)

“천마폭렬공(天魔爆裂功).”

짧게 읊조리듯 한마디를 내뱉던 천마의 두 손에 둥근 구체가 몰려들었다.

그리고 두 손에 모인 기운이 달려들던 마물들에게 뿌려졌다.

콰콰콰콰캉!

땅이 꺼짐과 증발된 마물들.

그런데 그 속을 뚫고 예리한 검과 도끼가 천마에게 뻗어 나왔다.

리치왕의 수호장.

암흑 기사단장의 장검과 오크들의 왕의 도끼였다.

“졸개들의 대장들인가… 어?”

코웃음을 치고 반격하려던 천마의 움직임이 일순 흔들렸다.

찌이잉!

신경을 흔드는 기이한 파동.

어느샌가 그의 정수리 위에 올라간 또 다른 수호장. 거대한 날개 괴물이 충격파를 발산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드드득!

바닥에서 수많은 검은 손들이 돋아나 천마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지옥 마법의 주술사.

위, 아래, 좌우에서 리버스를 따르는 수호장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쿠우우웅!

쩌저저적!.

천마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혼돈의 상황 중에도 수호장의 장검과 도끼를 잡아챈 그였다.

-걸려들었구나.

그러던 그때.

공중에 떠 있던 리치왕이 주술을 외웠다.

-하울링 플레임스(Howling Flames).

“……!”

순간 그와 마주친 천마의 눈이 부릅떠졌다.

리버스의 주변에서 거대한 불길이 뻗어 나온 것이다.

놀랍게도 그 불꽃의 색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짙은 자주색이었다.

“멸화(滅火)의 기운이라…….”

천마가 짧게 중얼거렸다.

* * *

쿵. 쿠쿠쿵. 쿠와아아아앙!

총단이 무너지고 있었다.

리치왕이 생성해 낸 지옥의 힘은 주변을 모두 녹여 버렸고 파괴했다.

콰카카카카카캉!

건물이 무너지고 잔해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거대한 높이의 총탑이 천 년이 넘는 역사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그오오오오- 휘릭 휘릭.

본 드래곤에 올라탄 마물들은 대부분 안전히 착지했다.

잔해에 깔린 놈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수호장들이 시간을 벌어 줬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이 결국 명을 재촉했구나.

공중에 떠 있던 리버스는 제일 마지막에 땅을 밟았다.

믿기 힘들 정도로 강했지만 딱 그 정도일 뿐이다.

애초에 수많은 드래곤을 죽이고 마계의 신이 된, 리버스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리버스 님, 명을 내려 주십시오.”

푸르륵.

뼈 말을 탄 암흑단장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느덧 다른 수호장들도 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리버스는 부서진 잔해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별것 아닌 것에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그럼 이제…….

“내가 해야 할 말이로군.”

-……?

투둑.

수많이 쌓인 잔해가 흔들리며 하나둘, 작은 균열이 일었다.

그 균열은 점점 셀 수 없이 많아졌고.

콰아아앙!

한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잔해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자욱이 내려앉아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먼지.

그 중심에 웃통이 찢어진 천마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찌 그 충격을 받고도……!

리버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최상급의 흑마법이라 불리는 하울링 플레임스.

지옥의 그 불길은 드래곤의 비늘은 물론이고 뼈마저도 흔적도 없이 가루로 만든다.

그것을 정통으로 맞고도 저놈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뼈에 들러붙은 기생충 따위에게 본좌의 시간을 너무 지체를 해 버렸군.”

-이노오오옴! 이번엔 정말로 가루로 만들어 주마!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

분노한 리버스가 구동어를 외치자 와드득! 땅이 흔들렸다.

아니, 하늘로 솟구쳤다. 땅 위의 모든 흙과 돌, 먼지까지. 심지어 천마의 몸도 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뭣?”

-크하하하!

리치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중력 역전 현상.

고위급 인간 마법사는 10m 안의 모든 적과 물건을 하늘로 던져 버린다.

중력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것이다.

하지만 리버스는 고위급 인간 마법사 정도가 아니었다.

리치. 마법의 조종(祖宗)은 10미터가 아니라, 1킬로미터 범위의 모든 것을 날려 버린다.

더욱 무서운 것은 중력 역전을 마친 후다.

리버스는 하늘로 솟구쳤던 목표를, 수십 배의 가속도를 더해 땅에 처박는다. 중력장을 무기로 쓰는 절대적인 마법의 힘이다.

“크으음!”

천마가 신음했다.

이것만 해도 어지간한 용사는 잡았을 터였다. 하지만 리버스는 고위급 마법을 연속으로 사용했다.

-악마의 피부(Demon Skin). 에어리얼 머누버(Aerial Maneuver).

그의 친위 대장들에게.

드래곤 브레스도 막아 내는 악마의 보호막. 중력 역전현상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기동 마법까지.

-가라!

그의 외침과 함께 십수 명의 친위 대장들이 천마에게 달려 나가고.

파락파락.

크---와아악!

그 위에서 날갯짓하는 본 드래곤이 강력한 브레스를 머금었다.

돌풍과 함께 하늘로 치솟던 천마가, 노호를 터뜨렸다.

“헛짓거리!”

쩌적!

천마가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천근추(千斤錘)로 하지의 무게중심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던 괴상한 이능에서 가뿐하게 벗어났고.

쩌엉!

뒤이어 두 손에서도 맹렬한 빛을 생성해 냈다.

강기(罡氣).

무학의 절대 반열에 오른 경지. 그 무엇도 파괴시켜 버리는 힘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츠으으으-.

보는 이가 실명할 것 같은 강렬한 빛에, 재차 검은 막이 덧씌워졌다.

극강기(極罡氣).

초마를 넘어, 완벽한 극마에 다다라야만 쓸 수 있는 무공.

한 세대를 통틀어도 오직 몇 명만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기운이었다.

“와라.”

콰아아아아앙!

리버스의 구동어와 함께 허공에서 벽이 생겨났다.

하지만 온몸이 산산조각 나야 할 천마는 너무도 쉽게 뒤집힌 땅을 밟았고.

사방에서 덤벼드는 수호장과 친위 대장들.

브레스를 머금은 본 드래곤. 그 위에서 캐스팅을 외우는 리버스를 향해 노호를 터뜨렸다.

“죄다 씹어 먹어주마!”

* * *

쿠쿠쿠쿠쿠쿠쿵!

천마신교의 총단 주위는 완전히 초토화됐다.

잔해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루가 되었고 온전한 바닥이 없을 만큼 황폐하게 변했다.

두두두두둑.

백 장 너머로 화마에 휩쓸린 마물은 떼죽음을 당했다.

졸개의 대장들도 대부분 죽었고 오직 마물 몇만 거동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르르르-.

본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주변을 깨웠다.

그것은 반쯤 부서진 몸체로 어디론가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쿨럭. 쿨럭.

얼굴이 반쯤 파괴된 리버스가 피를 토해 냈다.

아니, 피가 아니었다. 그는 살아 있는 자가 아니기에 입가로 새어 나오는 것은 붉은 연기였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치욕스러운 일이다.

차원의 이동. 그 이전의 드래곤 로드와의 싸움.

7개월 동안 끝없는 전투가 벌어졌고, 무한이라 불리는 마나를 바닥에 가깝게 소비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변명할 일이 아니었다.

상대는 드래곤도 아니고, 정령왕도 아닌, 고작 일개 필멸자인 인간.

불멸인 자신이 제압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아무리 이곳에 마나가 없다 해도.

옛 차원 그라나다에 존재하는 마나 농도의 3분의 1에 그친다 해도 변명거리가 못 된다.

당장 저자 역시 주위에 녹아 있는 마나를 이용하여 싸우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는 자신과 달리 혼자였다.

리치왕도 엉망이 되었지만, 천마 역시 온전치 못했다.

“크으으읍.”

졸개들의 우두머리 공격은 나름 대비를 했었지만, 뼈다귀 용이 뿜은 냉기는 상상을 벗어날 만큼 지독했다.

게다가 우두머리, 이놈들 모두를 지휘하는 강시는 멸화를 사용했다.

자줏빛의 불꽃은 천마의 호신강기조차 파고들어 피해를 입혔다.

‘빌어먹을, 천월성 이 몸뚱이 때문에…….’

천마는 슬쩍 몸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 그가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였다.

전생의 그는 30갑자에 육박하는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천월성의 몸에는 고작 5갑자의 내공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또 하나.

반응이다.

원하는 대로 손발이 움직여야 하는데 육신이 따라오지 않는다.

애초에 영혼이 다른 존재가 타인의 몸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몸의 주인인 천월성이 이룬 경지는 고작해야 극마.

제아무리 천마가 강제적으로 탈마의 경지로 격상시켰다곤 하나 한계가 있었다.

적의 숨소리와 발소리, 시공간을 파고드는 그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천 년 만에 새로 얻은 몸을 이해하고 적응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모두 물러서라. 미티어(Meteor)를 사용하겠다.

리버스가 외치자 주위에 있던 살아남은 친위 대장들이 반응했다.

미티어.

리치왕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흑마법 중 하나.

드래곤을 죽이는 데도 몇 번 시전하지 않았던 극강의 암흑의 힘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리버스 님, 그걸 사용하게 되면…….”

조금 전 일격으로 한쪽 팔이 잘려나간 수호장 하나가 말끝을 흐렸다.

미티어는 거대한 운석을 소환해 떨어뜨리는 마법.

그 파괴력은 엄청나지만, 그걸 썼다간 인근에 있는 자신들도 휘말릴 것이다.

-두려워 마라. 미소 블랙홀(micro black hole)로 범위를 조절할 터이니.

운석을 소환하는 미티어,

그 힘을 응축시켜 물질계 최악이라 불리는 허수 공간을 만드는 블랙홀.

이는 리버스로서도 필살에 가까운 한 수였다.

“저희가 문제가 아닙니다. 리버스 님.”

충직한 수호장이 걱정한 것은 파괴력이 아닌, 미티어를 사용한 이후 리버스의 상태였다.

아무리 무한한 마나를 지닌 리치라 하나, 리버스 역시도 감당하기 힘든 마법이었으니까.

-저놈을 남겨 두면 장차 크나큰 후환이 될 것이다. 차라리 어떻게든 여기서 그를 죽이고 이곳에서 힘을 비축한다.

리버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걱정 마라. 골드 드래곤 리그웨더. 놈도 이미 피해를 입었다. 뭔가 음모를 꾸미려 해도 이백 년은 넘어야 할 것이다. 그 전에 나는 깨어난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더욱 강한 몸으로.

이계의 마나에 대한 적응.

그리고 안식에 드는 기간 동안 흡수할 마나의 양.

리버스는 이미 계산을 끝마쳤다.

이번에 사용할 마법과 그 마법의 반작용.

그리고 안식에 드는 사이 리그웨더가 어떤 수를 쓰든, 대항할 수가 있다고.

-그동안 너희들은 저 머나먼 땅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어라. 알겠느냐.

“옙!”

파파파팟.

그의 명에 상처를 입은 수호장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떠나갔다. 리치왕의 가호를 받는 그들이라도, 리치왕 본연의 힘에 휩쓸리면 허망하게 가루가 되고 말 터이니.

-너는 시간을 벌어 줘야겠다.

그르르르.

본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치왕 앞을 막아섰다.

“흠. 무슨 꿍꿍이가 있나 보군.”

졸개들의 우두머리들이 저만치 물러나고 리치왕과 뼈다귀 용만 남자 천마가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리버스는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그를 가리켰다.

-용사여, 내게 대항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정도의 힘이라면 자연계를 넘어 천계에 닿을 만하거늘.

“그건 내가 묻고 싶군. 뼈다귀에 기생하는 놈이 왜 주제도 모르고 설쳐 대는가.”

-흐흐흐… 역시나 말이 통하지 않는 필멸자로구나.

리버스는 분노하는 듯 웃고 있었지만, 실은 뒤로는 주문을 외고 있었다.

미티어에 이은 미소 블랙홀.

구동 시간이 매우 긴 마법이며, 리치왕 본인으로서도 최후의 한 수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자칫하면 화라락 증발해 버릴 위험한 마법이다.

하물며 어마어마한 충격이 남아 있는 지금의 몸으로서야.

-나는 리치왕. 우리 세계에서는 리버스라고 불렸다. 그대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는가?

“내 이름을 알고 싶다고?”

-충분히. 너는 그럴 만한 자격이 된다.

리버스가 지팡이를 파르르 떨었지만 그것 역시 연기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도 천마가 별다른 선공을 취하지 않는 건.

‘무리해서도 탈강기(脫罡氣)를 써야 한다.’

그 역시 필살의 힘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월성의 수준은 극마.

초마의 경지는 넘었지만 극강기를 쓸 만큼 극마에 익숙한 몸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마는 극강기마저 뛰어넘은 탈강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시공간까지 파괴시키는, 극마를 초월했을 때에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절대 영역에 가까운 힘.

비록 지금 몸 상태로 사용 가능한지 알 수 없으나, 마땅히 다른 대안도 찾을 수 없었다.

되든 안 되든 일단은 해 볼 수밖에.

“하긴, 네 목숨을 가져갈 이름 정도는 알아 두는 것도 좋겠지. 나는 천마다.”

-천마. 천마라…….

고개를 끄덕인 리버스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되었나.

“……?”

-저자를 붙잡아라!

그오오오.

리버스의 손짓에 한쪽 날개만 남은 본 드래곤이 움직였다.

그리고 녀석이 입가에 물고 있는 얼음 냉기가 이동하는 경로에 서리를 일게 하고 있었다.

“역시나. 혓바닥이 길더니만, 꿍꿍이가 있었군.”

지이이잉.

대답과 함께 천마의 손에서 구체가 피어올랐다. 하나,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반짝이는 빛의 가루.

그것이 희미한 막으로 덮여 있었다.

-죽어라!

기이이이이잉.

리버스의 외침과 함께 창공에서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거대한 공간 속으로 둥근 물체가 서서히 빠져나왔다.

동시에.

파파파파파팟.

본 드래곤의 브레스가 공중에 뿌려지자 천마를 중심으로 거대한 얼음 기둥이 둥근 원을 그리며 떠올랐다.

본 드래곤의 얼음 냉기 최상위 마법.

이곳에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결계의 진이 생성된 것이다.

“와라. 언제든지.”

-미티어.

기이이이이-!

허공이 찢어지고 그 틈으로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다. 직경이 수백 장을 넘는, 시뻘겋게 불타는 돌덩어리.

그야말로 역발산기개세. 산을 뽑아 던지는 듯한 기세의 공격이었다.

---!

소리보다 빠르게 강습하는 운석을, 천마는 그대로 받아쳤다.

빛의 가루를 뿌리며 부연 막에 감싸인 구체는, 운석과 격돌하며 빛 그 자체가 되어 폭발했다.

-미소 블랙홀.

그와 동시에 또 한 번의 초월급 마법이 작렬했다.

아주 잠시.

천마의 당황하는 얼굴이 비쳤지만 그건 곧 사라져 버렸다. 빛을 모두 흡수하는, 검은 그림자가 그의 신형을 삼켜 버렸다.

쩌어어엉!

뒤이어 미증유의 폭발이 터졌다.

충격파는 지평선 저 너머까지 퍼져 나갔고.

쿠구구구구구--!

천마신교의 총단에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 * *

츠츠츠츠.

열기와 자갈이 흩어진다.

충격파가 휩쓴 일대는 자욱한 흙먼지만 피어올랐고, 극도의 초열(焦熱)로 녹아내린 대지는 용암이 되어 사방에서 넘실거렸다.

솨아아아아.

버섯구름이 잦아들고, 잿가루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흡사 화산이라도 터진 듯한 광경이었다.

-물러서라고 했거늘…….

짙은 안개 속에서 죽어 가는 목소리가 울렸다.

몸의 3분의 2가 날아가 얼굴과 가슴만 남은 리버스 였다. 그리고 그를 조심스레 두 팔로 받쳐 든, 거대한 체구의 녹색 피부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로드. 하나 제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오크로드 아락취.

그는 모두가 폭심지에서 벗어나는 가운데, 홀로 주인의 안위를 돌보기 위해 돌아왔다.

다행히도 주인인 리버스는 무사했었다.

신체의 절반가량이 날아가는 뜻밖의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저 뜻밖일 뿐.

애초에 리치는 불사의 존재다. 조금만 시간이 주어지면, 그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아니,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존귀하고 더없이 강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시리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핏.

한데 아락취에게 안겨 있던 리버스의 불꽃의 눈이, 갑자기 변했다.

그 격한 분노에 아락취가 물었다.

“로드, 설마……?”

-그래… 그는 살아남았다. 참으로 경이로운 자로구나. 어찌 필멸자 주제에 이토록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리치왕의 단언에 아락취는 경악했다.

인간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 자가, 드래곤조차 잡아 죽이던 궁극 마법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인가.

대체 저 인간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 애초에 인간이기는 한 것인가?

“급히 추적하겠습니다. 바로 제 수하들을…….”

-아니. 되었다. 살았다는 것에 놀랐을 뿐. 놈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나는 분명히 유효한 타격을 입혔다.

“아.”

-처리된 문제를 되돌아보느니, 앞으로 남은 일이 더 중요하다. 뜻밖의 강적을 만나 소비해 버린 힘이 너무 크니, 나는 이를 보충해야 한다.

주군의 말에 아락취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도 잡아 죽이는 리치왕의 발걸음이, 고작 인간 하나를 상대로 이렇게 늦춰지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했다.

-나는 이 세계를 재해석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한동안 안식이 필요하니. 그때까지 아락취, 네가 이 주변을 면밀히 통제하거라. 어둠의 힘이 너를 지켜 줄 것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아락취가 고개 숙이고, 리치왕은 손을 저었다.

부웃. 하는 기묘한 울음과 함께, 고풍스런 수의(壽衣)와 망자를 안치하는 관이 나타났다.

드드드득!

악의 성유물이 공명음을 내고 리치왕의 몸에 둘러졌다. 수의는 대자연의 마나를 끌어모으는 로브, 관은 흑수정으로 만들어진,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내는 절대의 방어 마법이 새겨진 마력관(魔力棺)이다.

-아락취, 그럴 린 없겠지만 최악의 경우가 발생한다면 데몬 사이제(Demon Saije)를 불러들이는 걸 허락하겠다.

“사이제 님을…….”

오크로드 아락취의 얼굴이 굳었다.

리치왕의 수하 중 최악 최강이라 불리는 자.

강함도, 집요함도, 리치왕 다음이라 불릴 수 있는 자.

자아가 너무 강하기에, 리치왕이 차원 정벌 때 합류시키지 않을 만큼 위험하고 강한 자가 언급된 것이다.

-단, 신중해야 한다. 그가 오면 고통과 파멸만이 남을 뿐이니. 우선 지상을 지배하는 데 힘써라. 만약의 변수도 나는 용납하지 않는다.

“예. 로드.”

-144년이다. 완전수의 제곱인 시간. 그 안에 나는 깨어난다.

그그긍!

리버스가 말하는 가운데, 관이 입을 열어 그를 삼켰다.

“알겠습니다. 144년. 그때까지 주인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아락취는 고개를 들었다.

오크로서는 생멸을 몇 번이고 반복할 시간. 하나 리치왕의 가디언이 된 아락취는 불멸이었다.

주인인 리버스가 소멸하지 않는 이상, 그 또한 영원하다

두두두두두둑.

관이 완전히 닫히고, 엄청난 높이의 마법진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곳으로.

끼아아악!

구르르르르!

수많은 마물들이 몰려오고.

드드드드득.

성루와 대문이 있는 하나의 성이 만들어졌다.

십만대산.

옛 마교의 성지였던 곳이 이제는 아공간으로, 그리고 그 주변은 리치왕 리버스의 레어로 뒤덮여 버렸다.

* * *

사박사박.

싱크홀이 뚫린 곤륜의 한 성산.

그 주위를 구두를 신은 여인이 걷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머리는 금발이었고 심지어 눈도 파랬다.

그리고 미모는 마치 옛사람이 조각한 듯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기 했다.

하지만 여린 몸과 달리 그녀에게선 범접할 수 있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툭.

한순간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저편을 바라보며 의아함이 가득하듯 읊조렸다.

“구울이 군집을 형성하다니.”

스르릉.

눈앞에 영상이 떠올랐다. 무영창으로 캐스팅한 파 시어(Far seer).

마법의 장막을 통해 이곳에서 수십 키로 떨어진 곳이 허공에 비치고 있었다.

우글우글.

수없이, 아득할 정도로 많은 망자의 군세.

그리고 그 속에서 흉악하게 자리 잡은 마물과,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거대한 성채를 볼 수 있었다.

“설마 리버스가…….”

이것이 가리키는 건 하나다.

무슨 이유인지 그가 안식에 들었다.

“말도 안 돼. 대체 누가. 그들을 막은 거지?”

그는 절대자다.

최상위 마왕 일게로의 권능을 얻고, 그마저도 뛰어넘은.

심지어 그녀가 살던 세계의 절대적 존재들, 드래곤까지 학살했던 자가 아닌가.

“응?”

이번엔 그녀의 고개가 우측으로 돌아갔다.

인기척 때문이었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파파팟. 채채채채챙!

바위틈 사이로 엄폐하던 무인 다섯이 뛰쳐나오며 그녀를 포위했다.

그녀가 처음 보는 문양, 맹(盟)의 글자가 수놓아진 조복을 입은 그들이 칼을 겨눈 것이다.

‘마나가…….’

눈에 이채가 서렸다.

조금 전 사내들의 동작.

마법을 쓰지도 않았는데 그 민첩한 모습은 마치 제국 기사단의 움직임과 흡사했다.

‘설마 이들이…….’

“대답하거라. 너는 어디서 왔느냐? 이곳엔 왜 있느냐?”

연약한 생김새 때문인지 그들을 지휘하는 중년인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여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잠깐.”

그러던 그녀 옆으로 누군가 소리치며 다가왔다.

그들의 다른 일행이 도착한 것이다.

“무슨 일인가?”

맹의 호위 무사 사이에서 제갈유진이 한 발짝 걸어 나오며 연유를 물었다.

“의심스러운 자가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녀는 사람들을 뒤로 물리곤 여인 앞으로 다가갔다.

처음 보는 복장과 눈동자. 머리카락 등.

거기다 놀라울 정도의 미모.

척 보기에도 그녀는 중원인이 아닌 색목인이었다.

“당신은 누군가요?”

“…….”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의아한 시선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할 줄 아나요?”

잠시 고민하던 여인은 조용히 손을 들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군사. 위험합니다.”

“물러서십쇼.”

“아뇨, 전 괜찮아요.”

경계하던 무사가 소리쳤음에도 제갈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놔두었다.

사박.

제갈유진의 머리맡에 손을 올린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흡!”

뭔가 이상한 느낌에 제갈유진이 뒤로 물러서자.

“반갑습니다. 저는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온 사람입니다.”

갑자기 여인은, 원숙한 한어(漢語)로 대화를 걸어왔다.

“역시. 그랬군요. 그럼 혹시 당신이…….”

“네. 제가 차원의 문을 열었어요.”

그녀가 싱크홀을 향해 손을 가리키자 제갈유진은 급히 경계했다.

“그럼 당신이 이 모든 변괴의……!”

“그건 아니랍니다. 저는 그를 피해 이곳에 왔으니까요.”

“그……?”

“네.”

지켜보던 맹의 군사들의 수군거렸다.

그들을 잠시 돌아본 제갈유진이 눈을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일단 저희의 조사에 협조를 해 주겠습니까?”

“물론이죠. 저도 전해 드릴 얘기가 참 많거든요.”

여인은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두 손이 묶이는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박사박.

맹의 군사들이 앞장서고.

그 뒤를 따르는 여인.

“이름이 뭔가요?”

그녀 옆에 다가선 제갈유진이 슬쩍 물었다.

이유가 있었다.

혹시나 리치왕이라 알려진 그 흉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의 이름은 ----.”

“네?”

툭.

여인의 걸음을 멈췄다.

분명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발음, 그리고 단어였다.

“그냥 리그웨더라 불러 주세요. 그게 편해요.”

여인이 제갈유진을 바라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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