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기억과 다른 세상 (1)
변괴의 시작 후, 5일.
차라라락.
두터운 문서가 요란하게 덮였다.
무림맹의 지하 감옥에서, 맹주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분노의 눈길은 금발의 서역인을 향했다.
서리가 내려앉은 쇠사슬에 묶인, 사람인지 요괴인지 모를, 본인 말로는 용이라고 주장하는 여인.
리그웨더였다.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이 당신이단 말이지? 저 이치왕인지 리치왕인지 하는 놈이 당신을 쫓아온 거라고?”
“네.”
기이하게도, 그녀는 모든 참사의 원인이 자신이라고 인정했다.
곤륜파가 하루아침에 멸문당하고.
그곳에서 십만대산, 마교의 총단으로 향하는 방향의 모든 도시와 마을이 불타고.
수를 셀 수도 없는 목숨이 죽어 간 이 재앙의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 있노라고.
“하… 정말. 이걸 믿으라는 소린가?”
타악.
화가 나다 못해 기가 막혀 버린 무림맹주.
수상한 곳에서 서성이던 서역인을, 무림맹은 즉각 포박해서 맹으로 압송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심문하고 배후를 캐물었다.
하지만 사실 심문은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물으면 묻는 대로 다 대답했고, 그 진술은 몇십 번을 되물어도 하나같이 일관되었다.
어떤 반항이나 저항도 없고 한없이 협조적이었지만, 맹주는 리그웨더를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었다.
“믿으시는 게 좋아요. 그게 피해를 줄이는 쪽일 테니.”
“…….”
다름 아닌 이런 자세. 한없이 여유롭고 무덤덤한, 지독하게 침착한 저 모습 때문이었다.
이제껏 무림맹의 지하 감옥의 죄수가, 이토록 당당하게 군 적이 있었던가?
이건 곤란했다.
여유를 지닌 자는 거짓말을 지어낼 수도 있다. 중요한 부분을 속이려 들 수 있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일단 궁지로 몰아붙이려 했지만.
“서우?”
“…죄송합니다, 맹주. 이 여인에겐 소관의 기술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니.”
철면판관 서우.
무림맹의 비공식 고문 전문가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내저었다.
“애초에 여인인지 아닌지, 사람인지 요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가져오셨습니까?”
서우는 리그웨더를 사람 취급 하기도 꺼려했다.
그도 그럴 게, 사흘 밤낮 40가지 고문을 받고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는, 비명은 고사하고 아픈 기색조차 없는 상대를 억지로 고문해야 했으니까.
“칼로 손톱 밑을 찔러도, 매를 치고 주리를 틀어도,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피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이건 그냥… 사람이 아닙니다. 맹주.”
“호신기공의 일종 아닌가?”
맹주의 물음에 서우가 다시 진저리를 쳤다.
“…다릅니다. 완전 다릅니다. 이제껏 소관이 죄인들 잡아 족친 게 40년입니다.”
그중에는 내공의 고수도, 외공의 절대자도 있었다.
설화로만 전해지던 금강신의 전승자도 있었다.
하나, 차라리 칼이 안 들어가는 질긴 몸은 몰라도, 이 요괴처럼 살이 두부처럼 패이고 갈라지면서도 피 한 방울 안 흘리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 했다.
“호신기공이었다면, 이자는 애초에 여기 묶여 있을 이유가 없을 겁니다. 도검불침, 만독불침, 수화불침, 어떤 날붙이에도 몸이 상하지 않고, 찢어발겨도 즉각 원래대로 수복되는, 이런 걸 뭐라 부릅니까?”
“…금강불괴로군.”
“예. 전설로나 전해지는 진짜 금강불괴. 혈육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런 건 불가능합니다. 정말 본인 말대로 인간의 탈을 쓴 영물이라면 모를까…….”
정확히 말하면 드래곤이다.
서우의 눈에는 이제 은은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무림맹주는 이제 혀를 차며 금발 벽안의 요괴를 돌아보았다.
“대체 귀하는 누구요? 사람이오, 요괴요, 아니면 신선이오? 정말 용이오? 리그웨더…….”
말하다 말고 무림맹주의 눈이 커졌다.
차르릉! 타타타탕!
리그웨더의 사지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 튕겨 나갔다.
이제껏 포박된 후로 단 한 번의 움직임도 없던 그녀가,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어찌… 만년한철로 만든 사슬을…….”
사사삭.
맹주의 주위에서 호위 무사들이 나타나 검을 겨누었다. 리그웨더는 조용히 일어나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리그웨더. 다른 차원에서 온 골드 드래곤입니다.”
그건 이제까지 수십 번을 해 왔던 말.
하지만 너무 얼토당토않아서 결코 믿을 수 없었던 말.
그래서 어떻게든 다른 말을 끌어내려 했지만, 계속해서 일관되게 그녀가 해 온 말이었다.
“이 세계에 폐를 끼친 것은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하나 저로서는 우선 제 목숨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 용도 죽음을 무서워하시는가?”
무림맹주가 냉소를 머금었다.
리그웨더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 저었다.
“아닙니다. 리치왕 리버스. 그를 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저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 맑은 얼굴에는 먼지 한 점 없었다.
이제껏 수없이 독수를 끼얹었음에도.
온갖 매타작에 고문 기구에 몸이 타격을 받았음에도.
그 모든 일이 마치 없었던 것인 양.
“본인 말로는 패해서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면서?”
맹주가 이죽거리자 리그웨더는 끄덕였다.
“그랬지요. 원래라면 땅속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겨 때를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놀랍게도 그를 패퇴시킬, 혹은 서로 동수를 이룰 상대가 이 세계에 존재하더군요.”
“……!”
맹주와 서우, 그리고 지하 감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리치왕이라는, 그 재앙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어디던가.
바로 십만대산, 마교. 천마신교의 본산이다. 그곳에서 리치왕을 패퇴, 혹은 동수를 이룰 존재라면…….
“설마…….”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이제 와서?”
무림맹 군사 제갈유진의 말을 끊고, 맹주가 물었다. 리그웨더는 가만히 감옥의 벽 한쪽을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 땅에 더 이상의 피해를 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의 피해?”
“지금 이 순간. 이곳 북서쪽으로 사백여 킬로미터.”
척.
리그웨더의 하얀 손가락이 한쪽을 가리켰다.
“리치왕의 수하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는 33만. 몬스터의 이름은 구울.”
“……!”
그것은 이제부터 쏟아져 올 재앙에 대한 선고였다.
“그들은 언데드. 죽여도 죽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저 파괴해서 멈추게 할 뿐. 약점은 머리. 머리를 부수어야 합니다.”
“…….”
“주의해야 할 것은 물리는 것, 혹은 죽임을 당하는 것. 죽음의 저주에 당한 자에게 죽으면, 그 저주가 옮겨 붙게 되지요. 축성된 성수… 는 없겠군요. 이곳에도 사제, 그러니까 승려가 계시겠지요?”
천천히 말이 풀어져 나왔다. 사방에서 의심의 눈이 번득이는 가운데, 제갈유진은 리그웨더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뇌리에 박아 넣었다.
사람인지 신선인지, 아니면 요괴인지.
혹은 본인 말처럼 용인지 아니면 미쳐 버린 금강불괴의 고수인지.
어느 쪽인지는 아직 모르나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몬스터들의 약점과 습성, 파훼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여러분께 알려드릴 겁니다. 뜻하지 않게 이 세계에 피해를 입혔으니, 그 이상으로 보상하겠습니다. 이는 나, 골드 드래곤. 이제 마지막 남은 드래곤 족의 로드로서의 약속입니다.”
“…….”
그것이 처음으로 나눈 리그웨더와의 제대로 된 대화.
이 세상에 퍼져 나가는 재앙을 막을 유일한 존재와의 대면이었다.
변괴의 시작 후, 15일.
전국 각지에 마물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구파와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공적이라 불리는 사파의 수장들까지 나서 그들을 막았다.
버거웠다.
이 모든 게 마물들의 강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중에는 정말이지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들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숫자.
대체 얼마나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는지, 마치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에게 맡겨 주세요.”
리그웨더가 말을 건넸지만, 맹주는 그때까지 그녀를 신뢰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까진 강호의 힘을 믿은 것이다.
변괴의 시작 후, 25일.
중원의 절반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자. 무림맹주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리그웨더를 전면으로 내세우기로 했고, 드디어 그녀가 출병했다.
가장 저돌적인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10서클 마법의 최고봉.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거대한 운석을.
미티어(Meteor).
리치왕이 구현했던 그 마법이었다.
변괴의 시작 후, 3달.
무림인의 반격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리그웨더가 써 낸 몬스터 도감과 수많은 지식을 건네받은 무림맹이 이를 전 지역에 배포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지식이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게 마법이라는 거예요.”
그곳에는 마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몇몇은 그에 따라 훈련을 하기 시작했고, 또한 성취를 보였다.
변괴의 시작 후, 6달.
중원을 탈환했다.
수많은 고수, 심지어 사파의 고수들까지 연합전선을 펼쳐 몬스터를 일망타진했다.
그들은 음지로 숨어 들어갔고, 던전을 만들었다.
“공세를 계속해야 해요. 몬스터를 죽이면 가치 있는 물품을 획득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템.
처음으로 그녀가 신병이기를 언급하던 순간이었다.
변괴의 시작 후, 1년.
몬스터를 청해와 신강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거대한 어둠의 탑을 쌓았고, 결계와 암흑 마법진으로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무림인들 역시 그곳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기쯤. 그녀는 말했다.
“저들이 수세적으로 돌아섰어요. 이제 우리에겐 학관이 필요해요. 마물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전사를 육성할 수 있는, 이곳 말로는 고수들을 키우는 거예요.”
그간 혁혁한 공과 수많은 도움을 준 그녀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각지에서 수많은 지회가 열렸다.
은거 고수들이 나타나 저마다의 기예를 모으고, 노소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배움을 얻었다.
“출신이 어디였든, 가문이 어디든, 가리지 말아야 해요. 144년 후, 리치킹이 부활하게 됩니다. 인간 여러분은 지금부터 힘을 기르고 대비해야 해요.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변괴의 시작 후, 140년이 되었다.
* * *
검은 구름이 달마저 가리는 밤.
마을과 상당히 떨어진, 인적이 드문 비탈길에서 누군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헉. 헉.”
이한(李翰)은 도망치는 중이었다.
몸엔 상처가 가득했고 땀으로 옷이 범벅된 상태에서도 그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파파팟.
도랑을 한달음에 뛰어넘은 이한은 우거진 수풀 사이를 순식간에 돌파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뛰어넘는 거리가 족히 일 장(3m)은 되어 보일, 높은 수준의 경공술.
하지만 그런 움직임도 뒤에 따라오는 마물에겐 무의미했다.
끼이이악-!
별빛 아래 검은 물체가 팔락이며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것은 몇 번의 날갯짓으로 이한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벌써 따라잡혔다.’
이한은 알고 있었다.
사람 몸에 박쥐 얼굴을 섞어 놓은 저 마물에게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저건 수업 시간에 배운 가고일이 분명했다.
겉보기엔 석상 같으나, 실은 움직임이 민첩한 놈이라 들었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다.
그루루루루-.
점점 마물과 거리가 좁혀지자 이한은 선택을 해야 했다.
이대로 가다간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다.
그럴 바에야 가진 무공이라도 써서 맞서기라도 해 봐야 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절체절명의 순간 앞에서 이한은 부모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한아, 어서 도망치거라! 어서!
땅거미가 질 저녁에 본가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재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한 참상을 맞이했다.
이한의 집 앞마당, 바위틈 사이로 보호색을 띠고 있던 마물이 가족을 덮친 것이다.
가고일의 첫 일격에 아버지가 죽었고 시간을 벌기 위해 어머니는 목숨을 던졌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마저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다.
“제기랄! 덤벼라! 이 마물!”
챙.
어두컴컴한 산속에서 이한은 걸음을 결국 칼을 꺼내 들었다.
-그르륵그륵.
가고일은 그 모습이 재밌는지 박쥐의 얼굴을 하고 웃었다. 놈은 그와 조금 떨어진 바위 밑으로 내려앉았다.
‘날개로 이어지는 손. 저걸 공략해야 해.’
이한은 숨을 몰아쉬었다.
몬스터학 수업 시간에 들은 대로라면, 온몸이 돌로 되어 있는 가고일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바로 몸과 날개로 이어지는 날개 손 부분.
저곳을 찌르면 상대의 움직임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나와 있었던 것이다.
‘어떤 초식이 좋을까.’
이한의 머릿속에 그동안 배운 수많은 초식이 지나갔다.
그리고 강력한 찌르기라고 알려져 있는 창궁무애검법 제칠 초식. 무영찰(無影札)에서 멈췄다.
“와라, 부모님의 복수를 해 주마!”
기아아아악-!
공격 의사를 드러내자마자 괴성과 함께 달려드는 가고일.
팟!
이한 역시 자세를 낮춘 채 자리를 박차며 달려 나갔다.
콰지직!
“으헉!”
하지만 둘의 교착점, 그 지점을 넘지 못하고 이한은 맥없이 튕겨 나갔다.
콰드드득. 우득우득. 쾅!
한참이나 바닥을 굴렀고, 이름 모를 나무에 등이 부딪쳤을 때야 멈출 수 있었다.
“컥. 컥.”
이한은 재빨리 몸을 세웠지만 이미 하체는 풀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완패였다.
어둠 때문이라 말하기엔 가고일이 너무나 빨랐다.
목표한 곳은커녕, 그를 식별하기도 전에 튕겨 나가 버렸으니까.
캬아아아-!
가고일이 재차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공격 의지를 전해 왔다. 하지만 이한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머리를 다쳤는지 눈앞이 흐릿흐릿하게 변하고 있었다.
“내가 죽더라도…….”
이한은 손으로 나무를 짚으며 일어섰다.
그나마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저승길에 네놈만은 데리고…….”
그때였다.
[들리는가…….]
“……?”
이한의 표정에 살짝 변화가 생겼다.
그러다 다시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내가 죽더라도 네놈만은 저승길에…….”
[제길, 이번에도 실패한 건가…….]
‘착각이 아니다.’
이한은 놀라 주위를 살폈다. 어디서 나는 소린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오! 들었구나. 드디어 들었어!]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뒤로 가다 보면 얕은 여울이 있다. 거기서 조금 내려가면 조그만 구멍이 있을 터.]
“누구…….”
[여기로 오거라. 저놈에게서 도망치고 싶으면. 어서!]
끼아아악!
방심한 것인가.
가고일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박치기를 시도했다.
“헉!”
얼굴이 사색이 된 이한은 짚고 있는 나무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쩌어어억!
나무가 부서지며 가고일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밑으로 이한은 굴러 떨어졌다.
콰다당!
“큭!”
그는 곧바로 일어났지만, 몸은 성치 않았다.
조금 전 충격으로 오른팔이 부러진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왼손에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울… 여울…….’
그런 상황에서 이한은 허우적허우적, 정신없이 달렸다.
머지않아 개울을 발견한 그는 낯선 자의 말대로 아래 방향으로 다시 내달렸다.
“구멍, 구멍… 저기다.”
열 치(30㎝)가 조금 넘어 보이는 너비.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 공간이 보였다.
기아아아악-!
공중에 뜬 가고일은 다시 움직임을 시작했다.
이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안으로 바둥바둥 들어갔다.
* * *
“허억. 헉. 헉…….”
사람 하나 겨우 비집고 들어갈 입구와 달리 안쪽은 넓었다.
곧 일어설 수 있을 공간이 나왔고 안쪽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누가 부른 거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둠. 이한은 벽을 짚으며 조금씩 이동했다.
툭.
그리고 곧 막힌 벽에 손이 닿았다.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나지막이 소리 낮춰 물었다.
“혹, 거기 계십니까?”
[아주 잘 찾아왔다.]
음침한 목소리에 이한은 흠칫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들었던 목소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누구십니까? 어디서 저를 부르신 겁니까?”
[밑이다. 네 발이 있는 쪽.]
이한은 왼손을 더듬거리며 바닥을 짚었다. 몇 번을 짚던 그의 손에 딱딱한 것이 잡혔다.
“이건 마치… 헉.”
이한은 손으로 그것을 더듬거리다 기겁하며 물러섰다.
잠시 잘못 느꼈나 했는데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인간의 뼈였다.
[모양새가 좀 안 살긴 하는데… 놀라지 마라. 나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어떻게… 이런 몸으로 이렇게 나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전음이다. 그 정도는 너도 알 텐데?]
‘말도 안 돼.’
이한은 믿지 않았다.
처음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목소리를 전달하는 기술은 전음이 맞았다 쳐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그것도 이곳과 한참은 떨어졌던 곳에 있는 자신에게, 전음을 어떻게 보낼 수가 있는가.
아니, 이 모든 것이 설령 사실이라도, 이한이 확인한 것은 분명 죽은 자의 뼈였다.
콰아아앙!
“헉!”
큰 울림에 이한의 고개가 돌아갔다.
입구 쪽. 불꽃이 튀며 벽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쫓아온 가고일이 머리를 찍으며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이다.
[뭘 그리 겁을 먹느냐. 고작 미물에 속한 놈인데… 겁쟁이라서 그런가?]
“당신이 뭘 알아! 저놈은 가고일이야!”
이한은 버럭 했다.
강호 공인, 일류 고수들도 한 명이면 달아나고, 셋 이상 모여야 겨우 잡을 수 있는 몬스터.
이제 겨우 학관 생도 1학년인 자신이 상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한데.
[…가고이? 그게 뭐지?]
“뭐?”
쾅!
폭발과 함께 결국 입구가 뚫렸다.
칠흑같이 어둡던 동굴 속은, 새어 들어오는 별빛으로 인해 희미하게 드러났다.
“아…….”
벽에 등을 기댄 이한이 신음을 흘렸다.
이제야 보였다.
칠흑처럼 어두웠던 동굴 속의 어둠이 걷힌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건 존재가 무엇인지.
목내이였다.
전신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나마 심장 쪽은 가죽처럼 삐쩍 마른 살이 붙은 해골이었다.
[너, 복수하고 싶지?]
그어어어.
가고일이 입구의 벽을 부수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흉악하게 벌어진 그 아가리에선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이한은 알았다.
저건 필시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책에서 본 대로라면, 온몸을 갈가리 찢는 소용돌이의 마법.
[아니면 저놈에게 죽을 생각인가?]
“방법은… 있어?”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뼈만 남은 이자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작은 희망이라도 얻고 싶을 뿐.
[있긴 한데, 그게 참…….]
“어, 저거…….”
그때였다.
콰앙-!
갑자기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었다.
동시에 이한을 향해 강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벽을 등지고 있지 않았다면 족히 몇 장은 날아갈 풍압이었다.
“아…….”
꾸에에엑!
가고일은 하늘에서 떨어진 뭔가에 의해 납작하게 변해 있었다.
석상처럼 저 단단한 피부조직이 뭉그러지고 등은 납작하게 변한 것이다.
“와이번…….”
위험 몬스터 6급.
용과 비슷하게 생긴 이 녀석은, 가고일보다 더욱 포악한,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우는 놈이다.
강호의 일류 고수는 물론이고 중소 문파의 장로들도 쉽게 제압할 수 없다는 마물. 그것이 이한의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내 손을 잡아라. 내가 모두 쓸어 주겠다.]
“손이라고……?”
뼈가 앙상한 시체를 보며 이한이 중얼거렸다.
꾸에에엑-!
그새, 와이번은 멈추지 않고 자신의 꼬리를 가고일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그 일격에 어떻게든 벗어나려던 가고일의 날개가 천천히. 천천히 바닥에 가라앉았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천무학관의 수업 시간에 이한은 충분히 배웠다.
마물 중에는 인간의 몸을 뺏는 놈들이 있다고.
그중에는 교활하게 사람을 속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끔찍한 계약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그리고 그런 끔찍한 마물들 중에서 알려진 것은 채 절반도 되지 않는다 했다.
만약에 이자가 그 미지의 마물이라면? 책으로만 보았던,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미래를 맞을 터.
[지금으로선 달리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도 네놈에게 혼을 빼앗기는 것보단 낫지!”
이한은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음은 각오한 처지다.
괜히 미혹에 빠져 마물에 몸을 빼앗길 바에야,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님의 복수. 해야 하지 않나?]
“……!”
이한의 시선이 옆으로 홱 꺾였다.
어떻게 안 것인가?
아무런 미동도 없는 이 해골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내 거듭 말하지 않았느냐. 저 따위 미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
그르르릉.
가고일을 죽인 와이번이 고개를 돌렸다.
배운 대로 적아를 가리지 않는 괴물. 그것이 이제는 이한에게 아가리를 벌린 것이다.
“복수… 복수…….”
이한의 목에서 핏빛 분노가 흘러나왔다.
잊을 수 없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눈앞에서 참혹하게 죽어 가던 아버지와 어머니.
아무런 힘도 없이 그저 도망쳐야 했던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제기랄!”
그오오오오-.
괴성과 함께 날개를 활짝 펴는 와이번.
쩌억 벌린 입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저건 브레스의 준비 단계다.
“네 손을 잡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괜히 희망을 줄 필요는 없겠지. 죽는다. 하나의 육신에 두 개의 영혼이 존재할 수 없으니까.]
“…….”
[대신 복수는 할 수 있다. 그건 약속하마.]
이한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여기 이렇게 있어도 죽는 건 변함없으니까.
“이렇게… 이렇게 잡으면 되는 거지?”
턱.
이한은 다급하게 시체의 손뼈를 부여잡았다.
[훌륭한 선택이다! 참고로 흘러 들어오는 기운을 거스르지 마라. 자칫하면 너와 내 영혼. 둘 다 소멸할 수 있으니까.]
움직일 수 있는 왼팔로 해골의 손을 잡은 이한은 눈을 감았다.
그의 말대로 몸속으로 기운이 스며들었고, 그때쯤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름! 당신 이름이라도 알려 줘. 어서 빨리… 아!”
그오오오-.
이한의 눈에 절망이 감돌았다.
이제는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미 와이번의 입가에선 불꽃이 보였다.
[천마.]
“뭐?”
그리고 이한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의 눈은 이미 녹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한 뒤였다.
[천마신교의 주인. 천마. 그게 내 이름이다.]
콰아아아앙!
그 순간 화염이 터지며 맹렬한 불꽃이 이한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 * *
어둠 속, 오색의 빛 한 줄기가 피어나온다.
그리고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다가 퍼지기를 반복했다.
「응애!」
그때부터 빛과 시간은 빨라졌다.
「이한, 이한이라고 해 보거라.」
「몬스터를 조심해야 한다.」
「우리 아들이 전국 제일의 천무학관에 들어갔구나!」
「병신, 실력도 없이 여기엔 왜 들어왔어?」
「오늘 과목은 병기술이다. 51쪽을 펴라.」
「한아, 어서 도망치거라! 어서!」
수많은 목소리가 귓가에 아우성 댔고.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었다.
걱정, 경외, 어색, 지루, 평온, 당황, 갈망, 역겨움, 공감, 고통, 시기, 흥분, 공포, 전율, 희열, 흥미, 기쁨, 슬픔, 만족, 욕망…….
그렇게 퍼져 가던 감정이 다시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
시야가 멈췄다.
“이 정도 거리에 왔을 때, 검을 앞으로 내밀어야 한다. 알겠느냐?”
“무슨 헛소리냐?”
-채채챙!
기억의 파편이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재구성되어 특정 장면을 그려 냈다.
교관이 목각 나무를 앞에 두고 한 보 반의 거리를 가리켰다.
“이 정도 거리를 기억해라. 이 정도 거리에 왔을 때, 검을 앞으로 내밀어야 한다. 알겠느냐?”
“그니까 왜? 그딴…….”
-쨍그랑.
기억의 파편이 깨지면서 흩어졌다.
그렇게 수십 번의 계속된 시도가 이어졌고.
“이럴 땐, 교관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알겠느냐?”
“아, 알겠다고.”
<따각.>
기억의 파편 한 부분이 맞춰지고.
또 다른 장면이 튀어나왔다.
“이한, 오늘 뭐 할 거야?”
“시건방진, 네 따위가 감히 본좌에게. 알아서 뭐 할…….
-채채채챙!
“이한, 오늘 뭐 할 거야?”
“조용히 해. 뒈지기 싫으면.”
-채채채챙!
“이한, 오늘 뭐 할 거야?”
“그냥 쉬련다.”
<따각.>
파편들이 그렇게 계속 맞춰지면서 점점 조각을 맞추었다.
‘이건……?’
천마는 조금 당황했다.
영혼이 육신에 안착하는 도중, 이상한 비틀림이 일어나고 기억이 흩어지는 것이다.
천월성의 경우와는 달랐다. 그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천마는 이 두 경우의 차이를 가늠하고 얼마 후 수긍했다.
‘마공이라는 공통점도 없고, 소환 의식이라는 매개도 없군.’
한 잔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잔에, 수백 수천 잔 분량의 물이 강제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압도적인 내용물의 차이가 있기에, 그릇이 깨어짐은 당연.
하나 그래서는 곤란했다.
영혼의 깨어짐은 곧 죽음.
이제 겨우 몸을 얻은 천마는 깨져 나간 이한의 기억, 영혼의 파편을 그러모아 자신을 다시 만들었다.
격의 차이가 너무 났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이거 좀… 성격이 이상해지겠는데?’
수백 년의 노회함과, 열 몇 살의 경쾌함.
두 인격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이한의 자의식이 수용할 수 있는 기준을 따르는 모양이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성격 역시 영향을 받고 있었다.
‘뭐… 할 수 없지. 좀 괴팍해지더라도.’
좀 괴상해지면 어떤가. 어차피 마공을 익히며 몇 번쯤 미쳐 보았던 그였다.
이제 와서 성격이 어떻게 변하든, 결국 자신의 정체성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는 천마니까. 투쟁과 삶의 화신이니까.
아무리 많이 돌고 돌아가더라도 결국 강물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은 바다인 법.
천마는 인격이라는 부분에서 다소 이한에게 양보하고, 그저 자기 자신의 과거. 투쟁심에만 집중했다.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따각…….
그렇게 거침없이 기억의 파편이 완성될 쯤.
오직 하나.
단 하나를 남겨 두고.
당황.
천마의 시야가 확 밝아졌다.
* * *
“이게 무슨…….”
쾅!
폭음과 함께 튕겨져 나온 천마는 땅을 딛자마자 신음을 흘렸다.
와이번의 공격을 피해 냈음에도 그의 눈은 당혹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한의 기억 속.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정보는 둘째 치더라도.
“내공이 뭐 이따위…….”
크아아아아!
또다시 화염 불기둥이 와이번 입에서 뿜어져 나오자 천마가 자리에서 도약했다.
처억.
그리고 이번에도 아슬아슬했다.
속도도 그렇고 생각처럼 높이 도약하지 못한 탓이다.
“제기랄. 척 보기에도 별 볼 일 없을 것 같더라니…….”
내공은 반 갑자.
아니, 그보다 더 한참은 모자란다.
이건 마치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쯧. 귀찮게 되었군.”
으득.
부러진 오른팔을 대충 끼워 맞춘 천마.
있는 내공을 죄 끌어올리며 이한의 기억을 더듬다 뭔가를 떠올렸다.
“잠깐, 그게 있었지?”
파파팟.
그 생각이 미치자 천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와이번은 당연하게 그 뒤를 쫓았고 곧 평탄한 길로 접어들었다.
“저기 있군.”
패애애액.
천마의 모습이 확연히 눈에 들어오자 와이번은 빠르게 수직 낙하 했다.
가고일을 죽였던 것처럼, 체중으로 단번에 적을 뭉개 버리려는 행동이었다.
십 장(30m).
육 장(18m).
삼 장(9m).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질 때쯤.
턱.
천마는 한 손으로 땅을 딛고.
퍽.
무릎을 굽혔다.
척.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뭔가를 낚아챈 그는.
촤아아악!
뛰어오르며 나선 방향으로 그것을 쳐 올렸다.
꾸에에엑!
눈앞까지 당도한 와이번이 고통스러운 괴성을 질러 댔다.
천마의 괴이한 동작을 따라 그의 목이 단번에 잘려 나간 것이다.
꿈틀꿈틀. 툭. 툭. 추욱.
머리만 덩그러니 남은 와이번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연신 꿈틀꿈틀 댔다.
“그래… 생각해 보니 좀 억울하군.”
그런 그의 머리를.
콰직!
천마가 발로 찍어 터뜨려 버렸다.
그러고는 낚아챘던 검.
그것을 세차게 내리며 끈적끈적한 체액을 털어 냈다.
이후 그는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내 장기 중 하나가 검인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