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천마의 던전 사냥 (1)
텅 빈 4학년 4반 교실에 오직 둘만 남아 있는 상황.
스윽 스윽.
남궁호는 자리에 앉아 종이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건 만년필(萬年筆).
리그웨더의 제안으로, 사천의 천무학관에서 새로 개발된 시제품이다.
말이 시제품이지, 이 획기적인 물품은 시중에선 구하려야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다.
‘아직인가…….’
이미 연무장에서 펼친 무공의 초식과 동작을 기록하길 수차례.
그의 시선은 온통 ‘한 사내’에게 가 있었다.
사각에서 치고 들어오는 독특한 초식과 마기라는 생소한 기운.
과거에는 중원을 떨게 했던 마교 출신, 그것만으로도 시선이 끌어지는 자.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신경을 잡아끈다.
‘저렇게나 필사적일 수 있는 건가?’
수업이 끝난 후에도 자리에 앉아 떠나질 않는 흑객.
자신과의 대무를 복기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단계로 올라서는 심득을 얻는 것일까.
“으으음…….”
이따금씩 고민스러운 얼굴로 가늘게 떨기도 하고, 얼굴을 감싸 쥐고 괴로운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그 시간이 벌써 한 시진.
‘대단하다.’
남궁호는 놀람을 넘어 경탄하고 있었다.
자신이었다면 저렇게 깊이 파고드는 것이 불가능했을 터.
그야말로 무예에 대한 지독한 갈망. 그 모범적인(?) 모습을 보며 남궁호는 결심을 굳혔다.
흑객이란 자가 자리를 뜨기 전까지, 자신 역시 오늘 그와의 전투를 머릿속에 계속 그려 넣기로.
하지만 그런 그의 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끼이익. 투욱.
흑객이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끝난 건가?’
긴장이 되었다. 거인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상대는 아마 이전 비무에서 뭔가를 깨달은 것일 터.
그에 반해 자신은 아직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필시 다음 승부때는 어려우리라.
‘어?’
문을 열고 나가려던 흑객이 멈칫한 것을 본 남궁호.
그는 뭔가 고민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비무를 청하려는 건가.’
빳빳하게 긴장이 타고 올라왔지만 남궁호는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라던 바.
흑객을 향해 남궁호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할 말이 있소?”
다행히 자연스러웠다.
누가 봐도 그와 함께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는 말투였으니까.
“남궁호,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맞소?”
“그렇소만.”
“남궁세가가 안휘성의 패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오?”
“사실이오.”
“그렇군.”
답을 듣고 잠시 눈을 감는 흑객.
질문을 던지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에 남궁호는 살짝 불안감이 들었다.
‘뭐지?’
저런 심각한 얼굴. 예전에 세가에 있을 때 몇 번 본적이 있었다.
남궁세가의 가주로 계신 아버님께, 식솔들이 어려운 부탁을 할 때 보이는 행동이지 않은가.
“한가지 청이 있소.”
“무슨?”
“다소 면구스럽구려. 얼굴 본 것이 오늘이 처음이나 내 어려운 사정 때문에 남자로서 부탁 하나 드릴까 하오.”
‘남자로서?’
남궁호의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지나치게 공손한 상대의 태도. 그의 얼굴에 가득한 난처함과 곤혹스러움.
그래서 말했다.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들어 줄 수 있을 것이오. 그대가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맞다면.”
‘이런.’
남궁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들어오는 상대는 까다롭다.
그것도 자신이 손을 섞어 가치를 알게 된 자라면.
이런 이들은 쉬운 부탁은 하지 않는다. 부탁하는 일은 분명히 어렵고, 필사적인 사정이 있다.
“…말해 보시오.”
그럼에도 남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자존심. 그리고 그에 맞는 실력. 이를 셈해 볼 때.
할 수 있다면 상대에게 빚을 지워 두는 것도 좋을 터.
세가의 소가주로서 내린 판단이다.
“그것이…….”
한데, 여기서 더 뜸을 들이는 흑객.
“남궁세가라면 아마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서 묻소만.”
예상보다 그가 더 어렵게 말을 꺼냈다.
“……?”
남궁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휘성 쪽에 고대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설마 비전을 얘기하려는 건?’
“그, 비전의…….”
‘아니, 이건 아니다. 여기서 거절해야 해!’
벌떡!
남궁호의 몸이 급작스럽게 일으켜졌다. 아무리 자신이 인정한 사내라도 상대는 금도를 넘고 있었다.
결국, 그는 흑객이 입을 여는 순간 빠르게 외쳤고.
“그건 절대로 안 돼!”
“양념장이 있소?”
거의 동시에 흑객의 말이 이어졌다.
잠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는 남궁호와 흑객.
그리고 잠시 멍하니 있던 중.
“야, 양념장……?”
남궁호의 황당한 되물음과.
“…크읍.”
흑객의 비통한 감정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 * *
“이번 시간에 배울 과목은 치유학이다.”
교탁에 선 중년인은 학관생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마지막 5교시 수업.
칠판에는 이번 시간에 가르칠 인체 혈도에 대해 적혀 있었다.
『경맥(經脈)의 시간 흐름』
‘어디 간 거지?’
소진은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고 있었다.
4교시가 끝나자마자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고선 사라진 천마 때문이었다.
-수업 교재는 어디서 사는 거냐?
대부분 교재는 1층 매점(買占)에서 구입할 수 있다.
학관생이라면 모를 수 없는 걸 묻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자신이 알던 과거의 이한은 아니었다.
‘뭐 꼭 출석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문득 소진은 교과과정을 떠올려 보았다.
과목마다 차등은 존재하지만, 그중 출석 일수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마물의 등장이나 수행평가, 과목 숙제 등 수업을 빠져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학기별 교육과정 점수는 출석 일수보다 수행평가와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중간과 기말고사는 제일 중요한 시험이기도 했다.
‘치유학은 수업 시간에 교관이 가르친 내용이 주로 나와서 듣지 않으면 시험을 치르기 힘들 텐데…….’
소진은 괜히 이한이 걱정이 되었다.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청나게 성격이 변해 있었다.
오락가락하는 그의 상태로 이번 학기 시험을 제대로 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재수 없이 유급을 당해 1학년으로 떨어지면 더욱 엄격하게 2학년 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안 돼. 그럼 나 혼자 다녀야 되잖아.’
소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뭔가 떠올랐는지 책상에 두툼한 종이 몇 장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똑같은 내용의 필기.
소진은 이한의 몫까지 정리하려는 생각이었다. 딱 이번만.
* * *
“다시 봐도 건물 참 특이하구만.”
교문 앞에 선 천마는 신기한 듯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5층으로 만들어진 전각.
상당히 큰 건물로 외벽에는 여러 장식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과거의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건물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저 꼭대기가 5층이고 연무장처럼 쓰이는군. 4층은 4학년, 3층은 3학년, 2층은…….”
대충 건물을 본 그는 옆으로 눈을 돌렸다.
기괴한 건물 구조 사이로 학관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큰 건물이 눈에 또 띄었다.
“저곳이 소진이가 말한 매점이구나?”
객점, 교재, 음식, 장비. 무기 등
그 아이에겐 듣기론 매점 안에는 거의 없는 게 없다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나중에 한번 가 봐야겠군. 쓸 만한 것들이 있는… 아, 이제 오는구만.”
천마는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척 봐도 매끈한 근육질.
상의가 타 버린 것이 오히려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흑객이었다.
“왔어?”
천마의 물음에 흑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이제 가자고.”
“어딜 간다는 거요?”
“네크로맨서 잡으러 가지.”
“뭐, 뭐요?”
흑객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라고 해서 왔건만, 한다는 소리가 또 실없는 소리였다.
네크로맨서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이보시오. 고용주.”
흑객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계약상 던전 토벌이 분명히 있긴 하나, 그건 상식적인 경우에서요. 네크로맨서가 어떤 녀석인지 안다면…….”
“네가 왜 들어가?”
“뭐요?”
흑객은 잠시 멍하게 있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밥?”
“그래.”
“…….”
흑객은 어리둥절했다.
고용주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다.
다만, 이전과 달리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았다.
‘아냐, 생각해 보면 이것도 나쁘지 않아.’
고용주의 헛소리야 늘 들었던 것.
그 마음이 정말로 진심이라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면 된다.
이놈이 죽으면 계약관계도 쉽게 털 수 있고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럼 내 혈수마공은!’
순간, 흑객의 눈이 부릅떠졌다.
중요한, 자신에게 몹시 필요한 천마신교의 소실된 절기는 어디에서 구하란 말인가.
고용주가 죽으면 혈수마공의 뒷내용은 영영 알 길이 없어진다.
“큼큼. 저기.”
발을 옮기려던 천마를 향해 흑객이 불렀다.
“왜? 할 말 있어?”
“그… 그… 혈수마공은 언제쯤 알려 줄 거요?”
냉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쉽게 들뜬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아, 그거. 네크로맨서 잡고 돌아오면 알려 줄게. 집엔 내일 아침쯤 도착할 거야.”
‘그땐 넌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자식아!’
네크로맨서를 잡는다는 말에 흑객은 결국 뒷목을 잡았다.
무식한 놈이 신념을 가지면 그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고 했던가.
몇 번 경고를 해 줘도 말을 못 알아먹으니 흑객으로선 애가 탔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게 더 나을지도 몰라.’
흑객은 다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에게 중요한 건 혈수마공, 그것 하나다.
그것만 알아내면 그가 죽든 말든 자신이 알 바가 아니지 않은가.
만고불변의 이치.
던전에 들어간 고용주가 목숨이 경각이 달렸을 때 목숨을 구걸할, 그 순간을 노리면 된다.
그렇게 알아낸 뒤 몸 하나만 건사해서 빠져나오면 되는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헤어지자. 넌 내일 아침 반찬 준비를 위해 야시장이나 빨리 다녀…….”
“가 주지.”
“뭐?”
“나도 당신과 함께 간다는 말이오.”
“왜?”
“왜라니?”
흑객은 어느덧 진지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당신에겐 감사한 일이지. 아니, 영광일 것이오. 그럼 위험한 곳을 나 같은 인물과 함께 간다는 것은…….”
“그럼 밥은 누가 하고?”
“이익!”
흑객은 냉정함에 균열이 생겼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대답했다.
“한 시진이면 반찬부터 핵심 요리까지. 모든 것이 가능하지. 그것이 양념장의 위력이랄까.”
“오. 정말?”
“어떻소?”
흑객의 물음에 천마가 미묘한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쓸모가 있을까 싶긴 한데…….”
‘내 손으로 죽이겠다. 네크로맨서보다 더 빨리.’
흑객은 속마음을 숨기며 최대한 버텼다.
몇 번의 경험 속에 얻은 심득이었다.
“방해하지 않을 자신 있나?”
“물론.”
“그래, 좋다. 너의 부탁을 들어 주마. 대신 조건이 있다.”
“말씀하시오.”
“저기 매점 가서 교재 좀 사 와.”
“……?”
“수업 시간에 쓰게 교재 좀 사 오라고.”
“…….”
“아, 맞다. 2학년 과목별로 사 와야 해. 알았어?”
“…….”
* * *
천무학관의 4층 창가.
남궁호는 팔짱을 낀 채 교문 쪽에 서 있는 두 남자에게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 온통 흑객에게 쏠려 있었다.
‘무슨 이유로 양념장을 물어봤던 것인가.’
남궁호는 조금 전 그와 대화를 상기시켰다.
양념장.
자신과 대련을 한 뒤, 강당으로 들어와 말없이 긴 시간을 보냈다.
어떤 부분이 부족한 건지, 또 어떤 상황에선 어떤 수를 써야 하는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정작 물어본 것은 양념장이었다.
그것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의 양념장.
‘연결 고리를 찾아야 한다.’
이 넓은 중원에서 거의 보기 힘든 마교 출신의 사내.
그가 물어봤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자신과의 대련에서 얻은 심득과 연관이 있을 터.
“여기 있었느냐?”
드르륵.
반쯤 열린 문으로 인기척을 내며 들어오는 장년인.
배가 불룩 나온, 흔히 볼 수 있는 푸근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를 보자마자 남궁호는 즉각 예를 갖췄다.
“사숙? 여긴 어떻게…….”
그는 남소천군(南小天軍). 남궁세가 출신으로 천무학관에서 실전학의 교관직을 맡고 있는 이였다.
덤으로 검왕 제운비의 오른팔이라는 말을 듣는, 검에 한한 천무학관의 명실공히 2인자였다.
“준비는 잘되었느냐?”
“…결정이 났습니까?”
“그래. 교두께서 허락하셨다. 이번에 한해, 네 참가를 허용하시겠노라고.”
“아!”
남궁호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는 즉각 소매를 말아 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남궁은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녀석.”
남소천군이 미소 지었다.
이번 천무학관의 공략 대상인 데몬 루인즈 던전.
본래 학관이 직접 움직이는 던전 토벌은 경험을 쌓기 위해 4학년들을 참관시키곤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 던전은 폐쇄(Lock Down) 방침이었다.
공략도 극비. 대외적인 협력 또한 제한한다고 알려 왔다. 당연히 남궁호에겐 청천 날벼락이었다.
4학년으로 졸업을 앞둔 천무학관의 생도에게, 학관에서 진행하는 정기 던전 공략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력에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때문에 필사적으로 가문의 연줄까지 동원하였고, 마침내 실전 학과의 남소천군에게 말을 넣었다.
과연 그도 남궁세가의 요청을 거부하기는 힘들었는지 바람직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후우.”
남궁호는 가볍게 호흡을 골랐다.
네크로맨서. 상황에 따라서는 최악의 마물이 될 수 있는 놈이다. 본래도 쉽지 않은 놈이지만, 놈이 몰고 나오는 소환수에 따라 그 등급은 급상승하니까.
그리고 폐쇄 방침까지 떨어진 걸 보면, 천무학관에서는 그 등급이 대단히 높다고 보고 있을 터.
“녀석, 긴장되느냐?”
그런 반응을 남소천군은 바로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긴장은요. 오히려 더 흥분됩니다.”
“그래? 그럼, 긴장을 더 해야 할 게다.”
“네? 그게 무슨?”
뭔가 싸늘하게 대답하는 사숙을 바라보며 남궁호는 살짝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위험 등급이 몇입니까?”
“12등급.”
“……!”
눈을 부릅뜬 남궁호.
그를 마주 보며, 남소천군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것도 최소치. 실상은 그 이상일 거라고 모두가 판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