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7화 (18/310)

17화. 천마의 던전 사냥 (2)

용문객잔이란 편액이 내걸린 대객잔.

금당시에 위치한 이곳은 사천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이 규모가 큰 객잔이었다.

총 4층으로 되어 있는 이 건물은 크기도 크기지만, 용도의 쓰임도 다양했다.

특히 3층에는 보안이 철저한 밀실이 군데군데 있고, 객점을 겸해, 음식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중요한 업무를 보기도 했다.

“오셨습니까.”

밀실 입구,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다가오자 문앞에 있던 장년인이 고개를 숙였다.

나이도 그렇고, 척 보기에는 대상이 뒤바뀐 게 아닐까 싶지만, 그가 누군지 안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검왕 제운비.

35회 천무학관의 졸업생이자 역사상 다섯 손가락에 든다고 평가받는 무인.

실상 나이는 85세이지만, 반로환동의 고수라 사십 정도로 젊어 보이는 것뿐이다.

“다들 안에 있는가?”

짙은 눈썹에 준수한 얼굴의 제운비가 입을 열었다.

이에 남소천군이 답했다.

“모두 와 있습니다. 그리고 학과장님도 곧 오실 예정이라고 하고요.”

“알겠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원탁을 끼고 앉아 있던 무인 여섯이 일어섰다.

모두 실전학 교관들.

이번 던전 토벌에 참가할 천무학관을 대표하는 고수들이었다.

“일어날 필요 없다.”

제운비는 손짓으로 간단히 응대하고는 창가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곳엔 서 있는 자들에 예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약속 시간을 맞추지 못해 죄송합니다.”

“허어. 저도 방금 왔습니다.”

짧은 머리에 뺴빼 마른 몸, 거기다 안색이 어두워 퀭한 인상을 주는 노인은 던전학과 월산(月珊) 교두.

대규모 던전 토벌이 있을 때마다 함께 참여했다.

옆에 있던 몬스터학과 하청청 교두도 가볍게 인사했다.

“저는 1층에서 식사를 하고 올라왔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그렇게 간단히 몇 마디를 나눈 후, 월산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셋은 방 내부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상당히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큰 창문만 한 크기의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이것이군요.”

제운비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척 봐도 데몬 즈루인 던전의 지도였다.

“그런데… 총 몇 층입니까?”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거기다 탁자에 놓인 십여 장의 지도가 모든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총 15층입니다.”

“허…….”

제운비가 믿기 힘들다는 듯 신음했다.

보통 알려진 던전의 층수는 5층에서 6층이다.

제법 위험하다 알려진 던전도 10층 정도였는데, 이 정도 층수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게 가능합니까?”

그는 월산에게 물었다.

천무학관 내 던전에 관해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는 자다.

특히 드루이드(Druid, 야생을 부리는 자)의 능력과 길잡이(Path Finder) 능력을 함께 보유한 인물.

이 분야에서만큼은 전국 모든 학관을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자라 할 수 있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지나치게 깊이 파진 않으나. 가능합니다. 네크로맨서는 스켈레톤를 부리니 인력이나 자재야 어떻게든 가능한 거지요. 정작 신경 쓰이는 건 이게 아닙니다.”

그는 월산은 지도 두 장을 한 번씩 가리켰다.

“지금 이건 1층과 2층 지도입니다. 형태가 보이십니까.”

“음.”

그려진 선의 형태와 점자선, 그리고 동서남북 위치를 가늠하던 그의 미간이 모아졌다.

“1층은 E자 모양이군요. 그리고 2층은 숫자 3. 맞습니까?”

“예. 그럼 이 두 지도를 합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왕(王)? 혹 그럼 이자가…….”

당황스러운 표정의 제운비를 보며 월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던전을 만든 네크로맨서는 한어를 알고 있는 자입니다.”

“이런.”

쉽게 믿기 힘들었다.

이제껏 네크로맨서라 불리는 자들은 당연히 언데드.

이계에서 넘어온 자들이었다.

그런데 한어를 사용하는 네크로맨서라니.

“놀라운 점은 또 있습니다.”

스윽 스윽.

월산은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만년필을 들고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1층부터 14층. 여기 각 층에서 바닥에 석판이 깔린 지형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예. 그런데 지도의 형태를 전부 그려 놓으면…….”

이미 암기를 해 놓았는지 그는 거침이 없었다.

1층의 형태부터 14층의 형태가 차례로 양피지 위에 덧씌워졌다.

그렇게 10층, 11층을 그려 가던 중 제운비의 눈이 커졌다.

“혹시.”

그쯤에야 깨달은 것이다.

월산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예. 육망성의 마법진 형태입니다.”

육망성 마법진.

던전 내부 들어서면 여기에 걸어놓은 특정한 마법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전체에다가요? 어떤 마법인지 알 수 있습니까?”

“대속박 주문 형태로 보입니다만 자세한 건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전체 형태만 보일 뿐. 아래에 어떤 마법이 내장되어 있는지 기록은 없습니다. 생존자들의 기록이 서로 상충하여…….”

“흐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확실히 이번 네크로맨서는 여간내기가 아니다.

던전 전체에 입체 마법진을 그려 놓는 건.

마치 자신의 마법 능력을 뽐내기 위함이었다.

누구라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함께.

“대속박에 걸리면 어떤 제약이 되는 거지요?”

제운비는 속박이 행동 불능을 가리킨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마법에는 여려 형태가 있어 그걸 묻는 것이다.

정확한 마법진의 내용은 모른다지만 월산 교두 정도 되면 의미하는 것까진 파악했을 것이다.

“학과장님의 고견을 여쭈어 보아야 알겠습니다만 제가 추측하기론.”

월산은 잠시 입을 굳게 닫은 뒤 담담히 말을 이었다.

“강할수록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쇠약 계열 마법진으로 판단됩니다.”

* * *

10등급.

무학을 통달한 고수 정도만이 들어갈 정도라 알려진 던전의 위험 등급.

무공의 경지로 말하자면 ‘초절정’ 혹은 ‘소드 익스퍼트’ 수준의 고수들이 들어갈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중 12등급은 그야말로 최상급.

검과 하나가 된다는 화경(化境)이나 소드 마스터(Sward Master)를 최소 1명은 대동해야 쉽게 제압이 가능했다.

물론 다수의 초절정 고수들만으로도 12등급을 던전을 토벌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엄청난 희생이 불가피했었다.

그걸 미루어 볼 때 남궁세가 가주가 토벌했던 불타는 던전, 13등급의 위험성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그러니까…….”

천마는 탁자 위에 있는 동파육을 젓가락으로 집으면서 물었다.

“화경의 경지를 중원 서역인들이 소드맛스타라고 부른다고?”

“소드 마스터라고 했소.”

“그러니까. 그 소드맛스타가 마교에서 불리던 극마와 같은 거라고?”

“소드 마스터라 했소.”

흑객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현 무공 경지에 대해 알려 주던 중 고용주가 되물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드 마스터 중 ‘상급’이었다.

강호에서 통용되는 소드 마스터는 검강을 발휘하는 수준만을 의미했으니까.

“그럼 던전의 10등급 정도 되면 그 몽스터를 잡는 고수들은…….”

“몬스터요.”

“그거니까 그 몽스터들을…….”

“몬스터라니까아!”

쾅!

흑객은 결국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려쳤다.

자기 편한 대로 말을 내뱉는 그의 행동이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뭐, 아무튼. 요약하자면 그놈들을 혼자서 잡기가 쉽지 않다는 말 아닌가?”

천마가 넌지시 화제를 돌렸고 그 반응에 흑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해졌다.

“그렇소. 그리고 절대 혼자서는 잡지 못하오.”

동시에 진지해졌다.

“사실 던전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혼자 들어가는 미친놈은 없소. 토벌에는 최소 세 명이 능력자가 필요하오. 각기 해야 할 일이 다르기 때문이지.”

“으음.”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야 집중하는가 싶어 흑객이 목소리가 높아졌다.

“첫째로는 신법이 뛰어난 자가 필요하오. 던전 내부에는 수많은 함정과 변수가 작용하지.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때론 적들을 유인하여 효율적으로 토벌을 해야 하기 때문이오.”

“음.”

“둘째는 뛰어난 무공을 가진 자. 몬스터들을 제거하고 앞에서 방어하거나 시선을 끌면 적을 제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하니 말이오. 셋째는 패스 파인더. 쉽게 말해 길잡이라고 하는 직종이오.”

“…음.”

“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이 바로 길잡이요. 강한 고수는 어떻게든 불러올 수 있지만, 던전 내부를 파악하고 그걸 이해하는 통찰에는 경험과 소질이 필요하오. 어려운 함정을 탐지하고 해체할 수 있다면 던전 토벌은 훨씬 더 수월해지니까.”

“으음.”

“…….”

흑객의 시선이 고용주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다 다시 탁자로, 이내 젓가락으로, 마지막엔 고용주가 집어 든 고기 한 점으로 이동했다.

그 고기 한 점은 상대의 입가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미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

“…….”

흑객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꾹꾹 눌러 왔던 살기가 다시금 피어오른 것이다.

마지막 고용주의 한마디와 함께.

“여기 맛집이네.”

* * *

하청청과 제운비는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수 곳곳마다 비치된 각등이 주변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그 옆으로 마차들이 움직이고 노점상들이 주변을 거닐었다.

인공으로 만든 연못 조경에 유독 눈길이 갔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제운비는 하청청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천무학관의 같은 35회 졸업생이지만 하청청의 나이는 9살이 더 많았다.

그래서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제운비가 좀 더 예우를 갖췄다.

“제운비 교두께선 네크로맨서를 직접 상대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슬쩍 물어 오는 질문에 제운비는 잠시 생각하며 말했다.

“참조할 만한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게 가장 신경 쓰였습니까.”

“흐음.”

그는 시선을 창가쪽으로 돌렸다.

잠시 사람들의 눈에 담던 그는 입을 열었다.

“다들 만만한 것이 없지만, 강령술보다는 저주 마법을 더 유의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청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야와 청각을 방해하는 딤비전(Dim Vision).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위큰(Weaken) 같은 경우는 충분히 극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물리적인 타격이나 혼란을 주는 건, 제운비 교두께선 실전 감각만으로도 이겨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제가 제일 신경 쓰이는 건 정신 계열 저주입니다. 특히 디프레션(Depression :우울. 무기력) 같은 저주. 일정 수준의 네크로맨서라면 항마멸사의 정심한 무공을 익혀도 완전히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던전 내부에 그려진 마법진. 그게 걸립니다. 월산 교두가 단순히 무력을 떨어뜨리는 마법이라 추측했지만 제 생각엔 정신까지 동반할 듯합니다. 지하 15층까지 내려가는 험난한 던전. 숱한 함정과 몬스터와의 조우를 뚫고 네크로맨서를 맞닥뜨리기 전, 우리는 많이 지치게 될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고위급 정신 계열 저주가 날아든다면… 아무리 제운비 교두라도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정신 계열 저주라면, 마음을 바르게 먹으면 걸려들지 않는 것 아닙니까?”

“처음 접하면 걸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가 다를 뿐, ”

그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뼈가 골절되면 스스로 붙기도 한다는 건 일상생활에서 많은 경험을 해 봐서 다들 압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 저주는 전혀 다른 수법. 정신의 골절입니다. ”

“……!”

그 말에 제운비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마법이었다.

“제운비 교두께서야 무공 경지가 높으니 저주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경우에도 일시적으로나마 영향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이제껏 살면서 겪어 보지 못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흠.”

하청청은 제운비를 바라보며 진중히 말을 이었다.

“단단히 대비하지 않으면 이번 던전, 쉽지 않을 겁니다.”

* * *

“던전 지도를 구한다고?”

맛집 선정을 끝낸 후, 용문객잔이란 이름을 기억하던 천마가 물었다.

“그럼 그냥 갈 생각이었소?”

“보물찾기는 누구나 좋아하는 놀이지.”

“허…….”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흑객이 그저 한심한 듯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 죽으러 가는 자에게 그런 지도가 필요 있을까 했다.

“그것보다 네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지리에서 일어서려 하던 흑객을 천마가 붙잡았다.

원래라면 그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천마가 대놓고 도발하지 않았다면.

“딴건 몰라도 네크로맨서가 저주 계열은 꽤나 성가셔. 너같이 나약한 용병은 필시 당하게 될 테니 대비를 해라.”

“…헛소리! 그건 애송이들이나 걸리는 것이오. 나는 오래전부터 그런 잡령들을 가까이해 왔소. 내 출신이 뭐라고 생각하시오?”

마교의 마공을 쓰고 있으니, 어지간한 영혼들은 알아서 물러간다는 뜻이다.

천마는 거기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마교 출신이란 게 다행이긴 하지. 그렇기 때문에 정통으로 맞아 본 적은 없을 거다.”

“……?”

무슨 말을 하는지 선뜻 이해 못 한 묵객.

하지만 다음 말은 예사롭겐 들리지 않았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저주 마법은 피해 갈 수 없어. 그건 무공의 성취와 상관없이 정신을 공략하는 거니까.”

천마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대답했다.

그에 흑객도 조금은 귀를 기울였다.

애초에 고용주 역시 마교 출신으로 추정되고 있지 않은가. 혈수마공만 해도 그런데,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더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만약 네크로맨서의 저주 마법에 걸리면 이것 하나만 기억해.”

천마는 흑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죽지 않는다, 라고 말이야.”

“죽지 않는다?”

“그래. 공포는 널 괴롭고 미치게 만들지만 죽이지는 못해. 그걸 자각하면 공포를 하나의 적으로 인지하게 될 거다.”

흘려듣기에는 뭔가 미묘한 느낌.

마치 심득을 깨닫기 전의 그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거요?”

그가 말하는 모양새가 뭔가 알고 있는 듯해서.

“경험해 봤으니.”

뭔가 빨려 들어가던 흑객은.

천마의 한마디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정말이지, 한 놈 때문에 지독하게도 경험해 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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