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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18화 (19/310)

18화. 천마의 던전 사냥 (3)

천마는 4층에 있는 방 안에서 교재를 보고 있었다.

오늘 낮에 흑객을 시켜서 사 온 수업 교재다.

흑객은 한 시진 뒤에 객잔 입구에서 보기로 했기 때문에 잠시 숙소를 잡고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뭐 이리 많아?”

흑객이 내민 수업 교재는 대략 60여 권.

그것도 고작 무협학, 무공학, 병기술, 각 주요 6과목 중 3과목의 교재들이었다.

스륵.

천마는 느긋하게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한 권을 다 넘기는 데 반의반 각(3분)도 걸리지 않았다.

“대충 다 외웠고.”

사박.

천마는 다른 책을 펼쳤다.

그리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어떤 건, 거의 훑어본다는 느낌으로 끝낸 것도 있었다.

그렇게 60여 권을 다 펼쳐 본 천마는 잠시 창가 앞으로 다가갔다.

밖은 어두웠다.

밤이 깊어지자 각등에는 불이 꺼져 있었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둠 속에서 불현듯 스쳐 가는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천축의 가섭존자였던가…….’

지독히도 오래된 기억에서 ‘그의 존재’를 떠올린 건 그가 네크로맨서란 놈과 유사한 술법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가섭존자는 당시 탈마에 올랐던 천마를 곤혹스럽게 만든 밀종의 교두로, 전생에서 그를 곤란하게 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네크로맨서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

천마는 똑똑히 기억했다.

네크로맨서가 고작해야 죽은 자의 시체를 부리는 강렬술 정도라면.

그들은 천계의 영을 다루는 자들이다.

본디 밀종의 단체는 악마를 퇴치하는 불승들.

하지만 가섭존자는 마교에 대항하기 위해 구주에 떠도는 숱한 악마와 괴물들을 불러내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저질렀고, 그 힘은 가히 선계를 넘나드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전투 중에 사용했던 강시 즉, 실혼인들을 만드는 데도 탁월한 힘을 보였다.

힘을 억제시키거나 훼방을 놓는 사술은 또 얼마나 지독했던가.

마공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죽어 간 수하들은 셀 수도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중에서 정신 계열의 사술(邪術)은 제일 끔찍했다.

괴력난신, 상대에게 최면을 거는 섭심술(攝心術)은 기본이며 영매(靈媒)의 도움을 빌어 사자(死者)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초혼술 등은 너무나 쉽게 펼쳐 냈다.

더욱이 무기력과 우울증, 광기와 반란은 물론, 그들은 자력으로 귀신을 인체에 빙의시키는 빙의술(憑依術)까지 사용했다.

그로 인해 당시 극마와 초마의 경지에 오른 천마신교 정예 무사 백여 명이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몰살당하지 않았던가.

“흑객이 내가 한 말의 진의를 알아봐야 할 텐데.”

천마는 조금 전 일이 괜히 신경이 쓰였다.

흑객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공포에 죽지 않는다는 말은, 천마가 무수히 많은 저주와 술법 속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것만 빨리 깨우쳤다면 수하들도 그리 쉽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저주와 술법도 결국은 두려움. 단지 하나의 ‘적’이라고 상정하는 순간, 싸움이 가능해지니까.

“돌이켜 보면 참 재밌는 놈이었지.”

천마는 가섭존자를 그렇게 기억했다.

원한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애초에 천마가 그런 성격도 아니지만, 본 교의 무사들이 죽은 것처럼 밀종의 후예들 역시 만만치 않게 죽어 나갔으니까.

결과적으론 둘이 미친 듯이 싸웠고, 수하들은 그렇게 많이 죽어 나갔지만 나중에는 친한 벗이 된, 유쾌한 녀석이었다.

“그나저나 그놈은 구천에 떠돌고 있을까?”

당시 236살이던 가섭존자.

자신이 신마경에 오르겠다고 선언한 이후, 더는 그자와 어울리지 않았다.

문득 그가 어떻게 살았을지, 아니, 어쩌면 세상에 다시 내려오진 않았을지 궁금했다. 당장 천마 자신도 후손들이 불러서 되살아나지 않았는가.

‘다시 얼굴 한 번 봤으면 좋겠구만.’

* * *

천마가 있는 곳과 반대편.

보름달이 선명히 비치는 창가 옆으로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비스듬히 내린 시선에는 화려함과 기품이 느껴졌다.

특히 그녀의 이마에 박힌 금빛 보석은, 달빛에 영롱하게 비쳐 신비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재미있네요.”

학과장 리그웨더의 눈빛이 빛났다.

지하 1층부터 14층까지 겹쳐진 미궁의 형태를 살핀 후 대답한 거였다.

“어떻습니까?”

옆에 있던 제운비가 조심히 물었다.

“두 가지가 걸려 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속박과 정신 계열.”

“아…….”

우려하던 일이었다.

하청청 교두의 말대로 두 가지 마법이 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통 마법은 크게 4가지로 나뉘지요. 초월적인 현상과 신비적인 형상, 인체를 속박하는 현상, 마지막으로 정신이 내면에 작용하는 현상.”

그녀는 제운비를 보고 말했다.

“이건 정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동시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지속적으로 억제시키는 마법이에요. 쉽게 말하자면…….”

그녀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마나(Mana)나, 중원의 말로 해석하자면 내공을 갉아먹기 위한 마법진이란 거죠.”

“아.”

역시나 새로운 유형의 마법진이다.

미궁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내공을 이용한, 상대를 속박하는 방법.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제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예?”

“내공을 갉아먹고 정신력을 소모시키는 것. 꽤나 흥미로운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어느덧 제운비의 눈에 기광이 서렸다.

리그웨더는 보았다.

그의 눈에는 소드 마스터라는 급의, 아니, 그것보다는 좀 더 다른 기운이 서려 있었다는 걸.

“어려운 적이라면 그만큼 얻어 갈 것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잘된 일이지요.”

“…제가 괜한 염려를 했군요.”

리그웨드는 잠시 잊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자가 어떤 자인지.

아니, 중원인. 특히 무인들이 어떤 자인지.

상대가 강하고 위험한 미궁 속에 있을 경우 두려움보다는 호승심이 일어난다.

이들은 옛 그라나다의 소드 마스터와는 다르다.

그는 중원인이 말하는 화경.

엄밀히 말하면 소드 마스터보다 한 차원 높은 상급. 그랜드 마스터를 바라보는 자였으니까.

“그럼, 출정 준비는 다 마치신 거죠?”

화제를 돌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제운비는 가볍게 읍을 해 보였다.

“모두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럼 바로 출정하시면 될 것 같아요. 저도 함께 힘을 보태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그녀는 짧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위치를 적들의 눈에 간파당하면 안 되니까요.”

그 말에 제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국의 네크로맨서들을 통솔하는 인물.

리그웨더가 경계하는 건 현재 가장 위협적인 몬스터의 대장이었다.

“이번 네크로맨서의 몬스터도 그의 작품이지요?”

“맞아요.”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의 이름은 메피스토(Mephisto). 모든 네크로맨서를 통솔하는 죽음의 군주랍니다.”

* * *

지도문화사(地圖文化史).

책상에 앉은 육십 줄의 노인이 수납장을 하나둘 꺼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금색 줄로 이어진 안경테를 위로 들어 올리더니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여기 있네.”

촤르륵.

상당히 큰 지도.

마치 던전 미궁의 전역을 그려 놓은 듯한 그 정도의 크기였다.

“정말 확실한 거요?”

흑객은 뭔가 미심찍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도문화사에는 없는 게 없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늘 모든 물품을 비치하지도 않았다.

특히나 불확실하게 그려진 지도 때문에 애먹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사기 싫으면 관둬. 우린 뭐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나.”

영감은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고개를 훽 하고 돌려버렸다.

척 보기에도 꼬질꼬질한 차림새의 영감. 하지만 그는 이 바닥에서 나름 알아주는 자였다.

잠시 고민하던 흑객은 눈을 부라렸다.

“얼마요?”

“금 10냥.”

“너무 비싸!”

“비싸긴. 염병. 이 지도 하나 만들려고 그 미궁 속으로 들어갔다가 살아 오지도 못한 놈이 여섯이여. 주변을 한 번 둘러봐. 무타산의 입구의 던전 지도가 어디 있는가.”

“그렇다고 하지만 던전을 토벌해 버리면 이건 쓸모가 없어지지 않나?”

“오히려 반대지.”

영감은 볼을 씰룩대며 흑객을 노려봤다.

“미궁 안에 놓여 있는 상자들. 부서진 탁자. 널브러진 책자. 미처 토벌하지 못한 곳에서 아이템들이 불쑥 튀어나오지. 토벌 작전에 투입된 무인들이 모든 걸 다 가지고 갈 수 없는 법이거든.”

맞는 말이었다.

던전 토벌대는 몬스터를 제거하고 난 후 주로 그와 관련된 아이템만 가지고 떠나게 마련이다.

핵심적인 아이템의 대부분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별것 아닌 나무 상자나 벽장, 혹은 버려진 술통에서 그에 준하는 것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중엔 제법 쓸 만한 것들도 있었다.

특히나 네크로맨서 던전 같은 대규모 던전 내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끄응. 알겠소.”

흑객은 결국 돈을 지급해 버렸다.

좀 더 흥정을 하고 싶었지만 사실 그에겐 이 정도는 부담스러운 금액이 아니었다.

그저 고용주에게 포섭되고 난 뒤, 점점 돈이 축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할 뿐.

-닭 한 마리 사 와. 던전 들어가는 데 나도 준비를 좀 해야지.

“제기랄.”

밖으로 나온 흑객의 입에서 욕이 곧장 튀어나왔다.

오늘 낮에는 교재 사 오라고 시키더니 이제는 닭을 사 오라고 한다.

대체 이 밤에 닭은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돈을 받은 기억이 없다.’

이것저것 셈을 해 보던 흑객의 표정이 구겨졌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지출한 돈이 꽤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 쳐 봐야 금 스무 냥도 안 되겠지만, 원래 작은 돈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큰돈을 모으지 못하는 법이다.

대천마신교의 부흥이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

흑객은 생각했다.

이번 던전은 고용주의 무덤이 될 것이다.

자신은 오직 그에게서 혈수마공만 받으면 되는 거니까.

* * *

용문객잔 아래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제운비를 필두로 실전학 교관 7명.

하청청 교두와 몬스터학 수석 교관 1명, 월산 교두와 던전학 수석 교관 1명.

천무학관 4학년 학관생을 포함, 리그웨더 학과장까지 모두 13명.

그리고 그들의 뒤로는 백여 명에 달하는 토벌대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모두 준비는 되었느냐?”

제운비는 교관들을 향해 물었다.

“준비되었습니다.”

“물론입니다.”

천무학관을 대표하는 자들이라 그런지 다들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중에서도 남소천군의 목소리가 컸다.

“흐음.”

제운비는 실전학 교관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두 두건이 달린 장포를 가볍게 걸친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견갑, 머리, 가슴, 팔다리 등 모두 신성 처리가 된 갑주들.

최소 9등급에서 11등급 사이의 아이템들이 신체 곳곳을 치밀하게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던전 공략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안전이다. 특히 이 던전에선 누구도 죽어선 안된다. 이유는 알겠지.”

다들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죽는 순간 우수한 무구를 갖춘 아군이, 곧바로 위험한 적으로 돌변하게 될 테니까.

“남궁호였던가?”

“옙!”

남소천군의 언질이 있었는지 막 출정하는 시점 즈음에 그가 나타났다.

“열심히 따라오거라.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방해되지 않겠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

“크…….”

“하하.”

그 목소리에 교관들이 입꼬리를 올렸다.

한창 왕성한 혈기를 보니 왠지 모를 웃음이 나온 것이다.

“가급적 한 명의 피해도 없기를 바랍니다. 느리게, 그리고 신중히 가세요.”

대충 갈무리가 되어 가는 분위기가 되자 한쪽에 물러서 있던 리그웨더가 다가오며 말했다.

늘 그렇듯 그녀는 목소리 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차피 적은 도망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만에 하나.”

말과 함께 리그웨더가 작은 그릇 같은 것을 건넨다.

“이게?”

스스슥. 즈으으윽.

받아듬과 동시에, 그릇은 뚜껑이 되고, 뚜껑은 다시 투구가 되었다.

척 보기에도 서역식의 투박한 금속 투구였다.

아니, 이게 금속이 맞긴 할까라는 생각에 제운비는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싹!

짙고 짙은 어둠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보통 마법 아이템이 아니군요.”

“예, 성유물입니다.”

“성유물? 신성한 물품 말입니까? 아니, 그런데 이 꺼림칙한 기운은…….”

“다름 아닌 죽음의 신 하데스의 것이니까요.”

성유물 퀴네에(Kynee). 사용자의 모습을 감추어 주는 투구.

단순히 좋은 아이템 수준의 물건이 아니다.

리그웨더가 한때 리치왕에게 쫓겼을 때, 이것 덕분에 목숨을 건졌을 만큼 뛰어난 권능이 서린 물품이었다.

“검왕, 수고해 주세요.”

제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리그웨더는 얼굴을 풀었다.

“행운이 있기를.”

대답과 함께 그들의 머리 위로 미세한 빛이 흘러내렸다.

리그웨더의 축복.

대상의 모든 저주를 1회 무효화시키는, 골드 드래곤의 전능 마법이었다.

* * *

“사 왔어?”

방문을 열고 들어온 흑객을 보며 천마가 물었다.

“보면 모르겠소?”

꼬고고고고꼭.

흑객의 왼손에 닭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팔에는 돌돌 말린 지도와 던전과 관련된 서책 몇 권을 들고 있었다.

“너는 언제나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는군.”

천마가 만족한 듯 엄지를 치켜들자 흑객의 얼굴이 구겨졌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눈에 어른거리는 닭 벼슬.

아이템은 고사하고 대규모 던전을 들어가는 무인으로는 볼 수 없는 볼품없는 행색.

그뿐만 아니었다.

낮에 산 수업 교재를, 어깨에 멘 천마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지. 네크로맨서 목 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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