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귀식대법(龜息大法) (1)
“여기야?”
“…지도상으로는 그렇소.”
흑객은 천마의 질문에 답하며 머릿속에 암기한 지형을 확인했다.
계곡을 둘 넘고 산을 하나 넘어, 인근의 숲을 지나자 넓은 폐허가 드러난다.
거대한 암벽 사이에 새하얗게 드러난 뼈의 대문. 보기만 해도 음산함이 사무쳤다.
‘섬뜩하군.’
흑객은 대문의 기괴함에 혀를 내둘렀다.
몇십 명의 인골을 때려 부었는지 문짝이 사람 키의 두 배쯤 되어 보였다.
위험 등급 최소 9급. 그 무게에 내심 긴장이 되었다.
“여기로 들어가면 되는 거냐?”
문짝을 가리키며 천마가 묻자 흑객은 고개를 저었다.
“뒷문이 있소.”
“왜 돌아가? 여기 문이 있는데?”
“거긴 적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문이오. 더 빠르고 안전한 곳이 있지.”
“호오.”
“따라오시오.”
흑객이 지도를 스윽 곁눈질하고는 대문을 지나쳐 숲속으로 이동했다.
그런 그를 천마는 순순히 따랐다.
* * *
“저기가 뒷문이오.”
절벽 뒤로 등성이를 넘어선 자리에 굴이 하나 보였다.
앞서 뼈로 만들어진 대문과는 한참 차이가 나는 작은 문이었다.
“저 구멍은 뭐야?”
천마는 문 옆에는 휑하니 뚫린 암굴을 가리켰다.
“…전에 왔던 자들이 뚫은 구멍이오.”
이 지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 던전을 공략한 생존자들이었다.
그중에서는 자신만큼이나 강한 이가 있었음을 흑객은 기억하고 있었다.
사박. 사박.
침입은 쉬웠다.
암굴로 들어서니 휑하니 뚫린 복도가 나왔다.
그리고 그 끝은 지독한 어둠이었다.
“쉿! 고용주, 잠깐만.”
복도가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였을 무렵, 흑객이 말했다.
그는 그렇게 몇 초간을 가만히 기다렸다.
던전을 소수로 공략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
혹여 몬스터의 매복을 염려한 그는, 캄캄한 어둠 속을 노려보며 청각에 집중한 것이다.
그 순간.
꼬꼬댁. 꼬고고고.
오던 중 천마에게 건넨 닭이 울었다.
“그 녀석을 어떻게 좀…….”
흑객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고용주가 왜 닭을 데리고 온 건지는 티끌만큼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곳은 네크로맨서의 던전
그저 한 놈도 감당이 안 되는데, 이제는 이런 조류까지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에 분개할 뿐.
“…없군.”
초집중력을 발휘한 흑객은 주변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렇게 몇 초 뒤, 주변을 훑던 그가 갑자기 벽에 대고 검을 내리그었다.
카각! 파바박!
검신에 돌벽이 깎이자, 허공에서 불꽃이 튀고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다.
칼날에 깎여 나간 돌가루들이 길을 밝혀 주는 부싯깃이 된 것이다.
‘폭이 일 장. 길이가 일곱 장.’
흑객은 허공에서 타오른 불꽃, 그 불꽃이 망막에 남긴 잔상을 기억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꺾어진 길로 짐작되는 곳에서 멈춘 흑객.
그는 돌벽을 깎기 위해 다시 한번 칼을 들었다.
“잠자는 애들을 굳이 깨우려는 이유가 뭐야?”
그러자 옆에 있던 천마가 물어왔다.
“무슨 말이오?”
“여기 있는 놈들은 죄다 어둠에 파묻힌 것들이야. 그런 놈들이 갑자기 빛을 본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거야…….”
흑객은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의 말대로 빛을 보면 그놈들은 어떻게든 반응을 할 것이다.
여기 있는 녀석들을 어둠을 좋아하는 몬스터들.
갑자기 사방에서 달려들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
“소리로 찾아내야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동물의 목소리로.”
꼬고댁. 꼬고고고.
때마침 닭이 울음소리를 냈다.
잠시 내려놓은 닭의 엉덩이를 천마가 발로 툭 찬 것이다.
“이 무슨…….”
“정면으로 칠 장(21m) 떨어진 곳에 벽이 있네.”
“……?”
“그것도 완만하게 쭉 이어진 벽. 좌우로 길이 두 갈래 나 있는데, 왼쪽은 굽어져 있고, 오른쪽은 쪽은 각이 져 있어. 어느 쪽으로 갈래?”
“…허.”
믿기 힘든 정보.
갑자기 미친 것인지 고용주가 길을 알려 주고 있었다.
“놀라기는. 어려운 거 아니다. 닭의 울음소리로 그냥 감지해 본 거지. 밀폐되어 있는 공간의 울림은 두 귀로 들을 수 있으니까.”
“…….”
“안 가?”
천마가 물음에 흑객은 얼떨떨했다.
그러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대뜸 말했다.
“일단 앞으로 걸어가는 게 좋겠소.”
“그래.”
그렇게 조금 걷자 정말로 천마가 말했던 벽이 나타났다.
분명 자신의 구입한 지도에는 벽이 그려져 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여기까지 온 자는 없던 건가?’
암기했던 지도에는 이 공간은 없었다.
사실 조금 전 꺾어지는 곳으로 이동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 * *
인골은 풍화가 되면 될수록 색이 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암벽에 자리한 골문(骨門)은 심히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크기가 일장에 달하는 거대한 뼈의 문짝 앞에 수석 조교 남소천군이 섰다.
“정문 돌입한다.”
“옙!”
제운비의 명령에 실전학 교관들이 달려 나가며 골문을 걷어찼다.
그리고 순식간에 돌입하며 주변의 모든 공간을 선점했다.
“시야부터 확보해.”
“서로 동선을 겹치지 않게 움직여!”
탐색은 너무나 빠르게 전개되었다.
1층 첫 번째 복도를 통해, 주변의 무려 십여 객의 복도 길을 일각 만에 돌아왔다.
“시야 확보했습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운비 앞으로 보고가 차례차례 날아들었고, 가장 늦게 돌아온 남소천군이 읍을 하며 말했다.
“우선, 1층 던전 내부 중 삼 분의 일을 돌았습니다.”
“잠시 휴식할 공간은?”
“이 복도를 쭉 걸어가다 보면 두 갈림길이 7번, 세 갈림길이 1번 나옵니다. 세 갈림길 중 우측 공간입니다.”
“알겠다.”
제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움직였다. 외의에 걸친 피풍의가 그제야 바람에 펄럭였다.
‘확실히 다르다.’
남궁호는 훈련된 움직임에 감탄했다.
천무학관을 대표하는 실전학 교관들.
대부분 초절정으로 결성된 고수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 정도로 빠르게 조사를 끝낼 줄을 몰랐다.
던전 입구 주변에는 위험이 적다지만, 저 정도의 움직임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다른 임무 때문에 빠진 실전학 교관들이 모두 온다면 얼마나 대단할까 생각도 함께 들었다.
탁. 탁. 화르륵.
곧이어 집결지에 도착하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야전 탁자와 의자 십여 개가 놓였고, 불빛을 안팎으로 가리는 천막이 설치되었다.
일단 훈련받은 대로 진지가 구축되자 의자에 남궁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이냐?”
남소천군이 툭툭. 어깨를 두들기며 묻는다. 남궁호는 즉각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닙니다. 처음은 아니지만… 조금 죄송합니다.”
남궁호도 던전 토벌이 처음은 아니었다.
천무학관 4학년쯤 되면 어지간한 던전 너댓은 경험한다.
하지만 그 경험 동안 이런 진지를 구축하는 것은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안전지대의 가벽을 쌓고, 목책을 설치했다.
어지간한 기마의 돌격도 막아 낼 수 있는 요새를 그들은 반 각 안에 만들어 버렸다.
“대규모 던전을 들어갈때는 주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이런 긴급 구호실을 만들지. 토벌대를 위해서.”
“예…….”
남궁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던전에서 조우한 몬스터를 제때 처치 못하고, 퇴각하는 경우.
그들이 차분하게 증언을 하고, 체력을 회복할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제가 이제껏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던전 토벌에는 네 번이나 참여했었는데…….”
그는 강자였다.
대개는 토벌대 최고의 고수였다. 때문에 적습에 대비만 하면 되었다.
쫓겨서 패퇴한 이의 증언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닥불과 침상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몰라야지. 여긴 공식 위험 등급 11급이다. 네가 참여한 던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옆에 있던 남소천군이 한마디 거들었다.
시무룩해진 남궁호. 그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는 교두 월산과 하청청의 표정에 웃음이 담겼다.
“파악 완료했습니다.”
때마침, 야명주가 설치되고 사주경계 인원들이 돌아왔다.
“상황은?”
남소천군은 앞서 나간 인원의 보고를 들었다.
“이 주변에서 함정을 발견했습니다. 갑종 4호 상황입니다.”
그때, 실전학 교관 하나가 급히 다가오며 소리쳤다.
‘함정? 그리고 갑종 4호?’
옆에 있던 남궁호는 무슨 말인지 몰라 긴장만 바짝 세웠다.
보고가 하나하나 전달되고, 그 끝에 남궁호는 태산 같은 한 남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았다.
“전원, 전투준비.”
쫘아악!
소름이 다 돋아 왔다.
말 한마디에 석굴 전체가 살벌한 투기로 가득 찼다. 남궁호는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았다.
“부산 떨 거 없다. 매복한 숫자가 좀 많을 뿐.”
“예!”
나지막한, 그리고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매복이라고? 언제?’
척. 척. 척.
검왕 제운비가 검을 들고 나섰다. 그들이 이제껏 뒤에 두고 있던 거대한 골문을 향해.
“…어?”
남궁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이곳은 네크로맨서의 던전이다.
다른 던전과 전혀 다른 유형의 던전.
쇄애액! 콰드득!
눈에 보이는, 뼈로 된 모든 구조물이 죄다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교관들, 우리 몸 좀 풀어 볼까?”
기기기기기! 와르르륵!
침묵하며 도사리고 있던 인골들.
주변 골문을 형성하고 있던 수백 구의 스켈레톤이 뼈다귀를 맞추며 일어나고 있었다.
* * *
‘이 길이 왜 여기로 이어지는 거지?’
걸어가던 흑객의 심정은 복잡했다.
암기해 둔 지도의 위치와 자신이 보고 있는 형상은 조금 달랐다.
분명 지도에 없는 길이 계속 나 있는 것이다.
꼬고고고곡.
“……곳곳에 함정이 있다더니 뭐가 보이지도 않네.”
벽을 등지고 걸어가던 천마는 뭔가 불만족스러운지 투덜댔다.
‘하긴. 지하 1-2층에 뭐 대단한 게 나와 봤자다. 3층 정도는 내려가야 나올까…….’
흑객은 더는 생각에서 지워 버렸다.
고작 1층에 있는 함정은 화살 같은 간단한 암기 정도다.
설령 설치되어 있더라도 자연, 그러니까 길 잃고 굴을 찾아든 야생동물 같은 것들이 격발시켜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이봐 용병, 그런데 여기 몇 층까지 내려가야 해?”
천마의 물음에 흑객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8층.”
“되게 멀기도 하네.”
흑객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본 지도에는 8층까지 약도만 그려져 있었으니까.
“거, 나도 바쁜 몸인데, 여긴 단번에 내려가는 지름길 같은 건 없나?”
“쯧쯧.”
흑객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8층까지 내려갈 이유도 없지만, 어찌 된 게 죽지 못해서 안달이다.
여기까지 오니 고용주에 행동에 화가 나기보다 그저 미련해 보였다.
그렇게 걷던 중 마침 천장에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두 개의 문이 보였다.
‘저쪽으로 가볼까?’
“…어이, 용병. 거기 골문 쪽은 될 수 있으면 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천마의 말에 앞서 걷던 흑객이 다시 뒤돌아보았다.
“무슨 뜻이오?”
“보면 몰라? 뼈다귀가 살아 있잖아. 근처에 머물면 덤벼든다고.”
“……”
흑객이 걸음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이 살아 있다니. 그냥 뼈로 된 문일 뿐인데.
“어이, 이리 와 봐.”
“응?”
갑자기 천마가 복도로 쭉 걸어갔고 그곳엔 야광주가 박힌, 벽이 떡하니 서 있었다.
뭔가 범상치 않은 표식들.
그곳에는 의미 모를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지?’
흑객은 유심히 바라봤다.
새, 태양, 사람, 집.
등이 거대하고 긴 인간의 형상 아래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
이건.
“상형문자군. 애굽(이집트)의 것 같은데.”
“애굽?”
천마가 묻자 흑객이 고개를 저었다.
“음. 나도 정확히는 모르오. 배운 지 꽤 오래된 기억이니까. 천축(인도)을 넘어, 그보다 더 서쪽으로 가면 대진국(로마)인데 거기서 더 남서쪽으로 가면…….”
“아. 알아 알아. 거기 글자라고?”
“뭐요?”
갑자기 끼어들며 아는 척하자 흑객은 의아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이어진 천마의 말에 그는 호기심이 생겼다.
“몇 글자는 해석이 가능하겠군.”
“정말이오?”
“음.”
천마는 시선이 몇 개의 문자에 모아졌다. 그렇게 빤히 쳐다본 그가.
“세속에 물든 땡중이가 가르쳐 준 게 맞다면… 이게 시작이었고. 이게 숫자 육…….”
쿡쿡.
천마는 상형문자를 손으로 눌렀다.
그러나 어떠한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천마의 행동에 괜히 불안해진 흑객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놔두시오. 말했지만 던전의 기관은 함부로 만지지 마시오. 아무리 1층이라 하더라도 위험…….”
구우웅!
흑객은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괴이한 소음.
맞은편에서 생성된 회색빛의 연기가 둥근 원을 만들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어떻게 이게…….”
흑객은 눈을 의심했다.
들은 적만 있고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마법.
이것은 공간을 이동을 할 수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Teleport Gate)였다.
그것의 연기 속 안은 물결처럼 요동쳤고 폭발하듯 앞으로 튀어나왔다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두두둑.
주변이 밝아지면서 벽 쪽으로 연기가 치솟았다.
연기 밖으로 이동할 수 없게 마법 결계가 쳐진 것이다.
“어? 뭐가 기어 나오네?”
게이트를 보던 천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끼드득. 끼드드득.
하나둘씩 걸어 나오는 뼈다귀들.
그것은 평범한 스켈레톤이 아니었다. 키는 사람보다 세 배 가까이 컸으며, 어떤 놈은 아예 인간이 아닌지 뿔이 나서 네발로 기어오기까지 했다.
“자. 자이언트 스켈레톤… 스켈레톤 메이지(Skeleton Mage)까지!”
흑객이 반쯤 비명을 지르다시피 했다.
스켈레톤 메이지.
단순한 해골이 아닌, 손에서 불꽃이나 얼음을 뿜어내는, 리치의 아종(亞種).
그런 놈들이 넷이나 손에 불꽃을 들고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스켈레톤 메이지? 그게 뭔데?”
“위험 등급 5급이다. 저놈들 여럿이 모이면 와이번도 때려잡는다고!”
흑객은 악몽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거체화 한 해골들은 기본이 최소 위험 등급 3급. 인간도 아닌 짐승들은 4급을 넘어갔다.
“고작 1층일 뿐인데 이런 괴물들이…….”
흑객은 이를 악물었다.
일대일로는 손쉬운 상대들이다.
하지만 40마리를 상대로, 그것도 메이지까지 섞여 있는 몬스터를 혼자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정말 주냐?”
“…뭐?”
흑객이 한눈을 팔고 있던 사이, 고용주는 뜬금없는 질문을 해 왔다.
“저놈들 잡으면 아이템이라는 거 정말 주냐고.”
그는 웃고 있었다.
이젠 정말로 미쳐 버린 놈처럼 그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물러… 아!”
하지만 흑객은 말을 잇지 못했다.
본 것이다.
고용주 손에서 뻗어 나온 파란색 불꽃.
“어이 용병, 저놈들 아이템은 다 내 거니 건들지 마라.”
그것은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혈수마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