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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1화 (22/310)

21화. 귀식대법(龜息大法) (3)

흑객은 홀로 던전 내부를 수색하고 있었다.

포탈에서 멀어지자마자 어둠은 더욱 짙어졌지만, 이상하리만치 그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

흑객이 꽤 오랫동안 주변을 둘러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자신이 구입한 던전 지도가 정확하다면 이곳은 지하 6층.

‘B’ 모양과 ‘L’ 모양으로 결합된 구조가 이곳을 증명해 준다. 한데, 일각 정도 돌아본 결과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있던 몬스터가 1층에 기어올라 온 건가.’

충분히 말이 된다.

포탈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나온 자이언트 스켈레톤과 스켈레톤 메이지.

그놈들은 원래 1층에 있을 놈들이 아니었다.

1층부터 위험 등급 5등급의 몬스터가 돌아다닌다면, 그야말로 재앙 수준이다.

진작에 학관 연합이 전력을 다해 토벌했을 터.

‘그건 그렇고… 저놈의 숨은 실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6층 포탈 근처로 돌아온 흑객.

그는 천마에게 다가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고용주란 놈은 포탈을 통해 이곳에 오자마자 몸뚱이가 허약하다니 어쩌니 하면서 갑자기 자리에 앉앗다.

그 이후로 아직도 저렇게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내공은 절정 상회, 전투 능력은 초절정 근접, 무공 경지는 절정.’

흑객은 스켈레톤을 쳐부수던 고용주의 무공을 보고 판단을 내렸다.

싸움 중에 그가 펼친 혈수마공과 소수마공.

소수마공은 몰라도 사방으로 불꽃을 뿜어내는 혈수마공은 절정을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싸움 역시 그랬다.

전투를 파괴적으로 이끄는 모습은 초절정이라 불릴 만큼 놀라웠으니까.

문제는 마공의 순도다.

광범위하게 뻗어가는 불길에 몬스터들이 전부 불에 타지 않았다.

그 말은 불꽃의 힘이 약하다는 것이고 보기보다 경지가 높지 않다는 걸 뜻했다.

‘총평을 하자면 나보다 약간 아래, 혹은 동수 정도 되는 것인가?’

나름 합리적인 자료에 근거한 추론이었다.

상당한 실력자이긴 하지만 사실 흑객보다는 조금 모자람이 있었다.

잡몹들 처리 속도야 그가 좀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제부터 싸워야 하는 몬스터는 위험 등급 6급 이상.

무공의 경지가 높지 않으면 앞으로 나올 몬스터에겐 그따위 편법은 통하지 않는다.

놈들은 강호 고수들의 호신강기처럼, 무형의 방어막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유령 계열 몬스터들에게는 물리적인 타격이 먹히지 않는다.

최소 검기(劍氣) 이상, 아니면 축성된 성수가 필요하다.

“어, 왔냐?”

흑객이 다가오자 천마는 태연하게 말했다.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군.’

흑객은 천마가 대화를 거는 모습을 보고 판단했다.

운기조식 중 말을 하면 주화입마에 빠진다. 말하면서 운용하는 행공법은 백사십 년 전에 실전되었다.

“한 바퀴 돌아보고 왔소.”

“어때?”

“아무것도 없었소. 아까 다 쓸어 버린 모양이오.”

“그래. 그럼 내려가지.”

천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공을 많이 소진해 그걸 보충하느라 지금까지 이러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말하지만.”

“……?”

앞서 가려던 흑객이 뭔가 생각난 듯 천마를 돌아보았다.

“내가 처리할 수 있었소.”

“뭘?”

천마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흑객은 확실히 해 두기 위해 평소보다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스켈레톤 몬스터들. 내가 모두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는 말이오.”

“아? 난 또 뭐라고.”

천마는 별것 아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몇 걸음 이동했을 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는 흑객.

천마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힘주어 말했다.

“내가 처리할 수 있었음을 그대는 기억해야 할 것이오.”

“응.”

천마가 곧장 말했다.

하지만 흑객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진지하게 말하는 자신의 말에 상대는 귀를 파면서 대답한 것이다.

흑객이 뭐라 입을 열려다 고개를 돌렸다.

“…이쪽이오.”

흑객이 먼저 나서서 7층으로 길을 향했다.

그의 손에는 벽 한 곳에서 떼어 낸 야광주가 들려 있었다.

원래 준비했던 횃불과 달리, 공기도 필요 없고 시간제한도 없는 조명이다.

흑객은 그 위에 천을 씌워 조명의 강도를 좀 죽였다.

이미 6층을 빙 돌 때 지하 7층으로 가는 계단까지 확인했기에 도달은 금방이었다.

저벅저벅.

계단은 생각보다 길었다.

길었기에.

꼬고고곡-.

들고 다니는 닭 소리가 더욱 시끄럽게 들렸다.

“한데 닭은 왜 계속 데리고 다니는 거요?”

닭 소리가 계속 거슬리자 흑객이 물었다.

울음소리로 어둠의 길을 대강 예상하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그리고 크게 쓰임이 없는 이것을 언제까지 들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쓸데가 있어서.”

“그 쓸데가 어디냐고 묻는 거요.”

“공기.”

“…공기?”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싶어 흑객이 갸웃했다. 웬일인지 고용주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런 깊은 지하에 공기가 오래 묵으면, 소리 소문 없이 숨통을 막지.”

무거운 공기는 물처럼 낮은 곳에 고인다.

지금 이곳은 무덤 속. 지하 6층을 넘어 7층에 들어서기까지, 수도 없는 시체가, 뼈가 있었다.

이것들이 썩으면서 내뱉는 무거운 공기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꼬꼬꼭! 꼬깩!

닭이 갑자기 요란하게 울더니 축 늘어진다. 그 모습에 흑객은 흠칫했다.

“이건?”

“이게 묵은 공기다. 슬슬 천경귀식대법을 쓸 때가 된 거 같은데.”

“……!”

왜 그러느냐는 천마의 얼굴을 본 흑객이 신음했다.

“당신… 정말로 본교 출신이군.”

천경귀식대법.

귀식대법은 호흡을 오랫동안 멈출 수 있는 심법이다.

주로 물에 오래 있는 잠수부나, 암살 임무를 수행하는 자객들이 배운다.

하지만 옛 마교의 귀식대법은, 단순히 호흡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심박과 체온까지 조절할 수 있는 독문 무공이었다.

그리고 독문 무공이란, 그 문파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법.

140년 전에 멸문한 마교의 무공을, 당연히 알고 있지 않냐고 물어보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도 물었지만 대충 넘어갔지만 고용주, 당신…….”

흐윽. 흐으윽.

그때였다.

진지하게 물으려던 흑객은 소름이 오싹 돋았다.

복도 저편에서 흐느끼듯 가느다란 소리가 들린 것이다.

‘사람이 있다.’

사사삭.

흑객은 즉각 반응했다.

그는 몸을 낮추고 한달음에 모퉁이를 꺾었다. 들고 온 야명주의 덮개를 벗기자 피바다가 드러났다.

“이런…….”

갈가리 찢겨 나간 시체가 여러 구.

복색은 서역인이다.

체구와 머리카락의 색으로 보아 틀림없었다. 흰 피부에 붉은 머리. 중원인들이 보통 홍모귀라 부르는 서역 사람들.

검과 갑주는 박살이 나 있었고, 사람도 마찬가지로 박살이 나 있었다.

그중에 단 하나. 두 다리를 무릎까지 잃고 바들바들 떠는, 생존자가 있었다.

“이보시오! 여기 어떻게 들어왔소? 정신이 있으시… 헉.”

터억.

생존자를 수습하려던 흑객의 고개가 돌아갔다. 뒤에서 고용주가 붙잡은 것이다.

“너, 뭐 하냐?”

“뭐라니? 생존자를 구해서 정보를…….”

“아, 이놈. 은근히 사람 속 터지게 하네.”

흔들흔들.

천마가 축 늘어진 닭을 그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숨을 쉬지 못하고 죽은 닭.

온통 시체만이 가득한 네크로맨서의 던전.

그리고 묵은 공기가 가득한 이 와중에 뜬금없이 나타난 생존자.

“……!”

그때쯤 흑객도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흑흑… 큭큭큭…….”

하지만 조금 늦었다.

이제껏 고개를 숙이고 헐떡이던 여인이 머리를 쳐들자, 두 눈이 파헤쳐져서 피눈물을 흘리는 유령이 보였다.

“까아아아아악!”

“흡!”

팟.

여인이 귀곡성을 내지르며 덤벼들자 흑객은 뒤로 물러섰다. 그와 함께 재빠르게 검으로 상대의 목을 날렸다.

쉬익!

“……!”

하지만 감촉이 없었다.

분명히 베었는데,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고스트(Ghost)!’

흑객은 그제서야, 7층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이 어떤 유형인지를 떠올렸다.

“가아아아!”

쇄액! 쇄액!

다시금 흑객이 검을 휘둘렀다.

짜아악!

이번에는 손에 감촉이 있었다. 그는 마공을 응축시켜 검기를 생성한 것이다.

패애애액! 쿠우웅!

빗살처럼 튀어 나간 녹색 검기는 희미한 영체를 찢어발겼다.

캬아아아아-!

강한 충격에 폭발이 일었고, 그로 인해 던전 내부의 흔들림도 있었다.

“쳇. 레이스(Wraith) 따위에게 속을 뻔하다니.”

졸지에 검기를 뿌린 흑객이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방금 해치운 여인은 몬스터였다.

생전에는 인간이었으되, 원혼으로 인해 변질된 영혼.

레이스는 반투명하며 사람 머리에 사마귀 팔, 하체 이하로는 연기처럼 보인다고 알려져 있었다.

“어, 어, 한 놈이 아닌 것 같은데?”

레이스를 처리한 흑객에게 천마가 말했다.

스믈스믈. 스믈스믈. 스믈스믈. 스믈스믈. 스믈스믈. 스믈스믈. 스믈스믈. 스믈스믈.

“젠장, 소리를 듣고 죄다 몰려온 것 같군.”

흑객이 미간을 찌푸렸다.

눈앞을 뒤덮은 수많은 반투명한 영체들.

얼핏 세기만 해도 백 마리는 가뿐히 넘겼다.

단순히 레이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형체가 없이 그저 도끼 같은 날붙이만 떠다니는 것도 있었고, 이전에 보았던 스켈레톤 메이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판석으로 위장하고 있던 스톤 골렘도 보였다.

“오. 저 녀석들이 밴시란 놈들이구만.”

천마의 긴 머리에 소복을 입은 여인들을 보고 끄덕였다.

후으으으으…….

학관 교재에서 배운 대로, 여인의 모습. 그리고 긴 머리다. 누가 유령 아니랄까 봐 발목 아래로는 발 대신 희끄무레한 연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쿠우웅. 쿠우웅.

그 외에 벽처럼 단단한 몸을 한 몬스터. 스톤 골렘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위험 등급 7급의 몬스터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이번엔 용병 실력 좀 볼까?”

천마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렸다.

몬스터들은 오직 흑객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처음 신호를 낸 대상만 노리기라도 하는 걸까.

슈우우욱. 그륵그륵.

계속해서 집결하던 몬스터들은 어느 시점. 흑객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쏟아졌다.

‘온다.’

흑객은 마공을 증폭시켰다.

언제든지 검기를 쏘아내기 위한 일종의 준비 단계.

곧 몬스터들이 쏟아지자 그는 지체 없이 검기를 사방에 뿌렸다.

“가아아아-!”

“까아아아악-!”

검기에 맞은 밴시들은 간단히 소멸해 버렸다.

레이스들도 마찬가지. 가까이 붙지 않으면 공격을 할 수 없는지, 다가가기도 소멸해 버린 것이다.

쩌저저적!

하지만 적들은 수가 많았다.

그리고 눈속임이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만해--.

살려 줘--.

동정과 공포로 시선을 끄는 밴시들.

히이이이--.

헤에에에--.

기괴한 울음소리로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레이스들.

우오오--.

검기에 조각조각 부서졌지만 그럼에도 움직이는 스톤 골렘들.

소멸하고도 나타나고, 부서져도 움직이는 그들은 계속해서 흑객을 압박해 가고 있었다.

“허억… 이것들이!”

흑객은 황망스럽게 검을 흩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마는 이내 뭔가를 발견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에 뭔가 있다.’

평소보다 움직임이 둔하다.

분명히 묵은 공기는 있었다. 귀식대법을 쓰지 않으면 강호 고수도 정신을 잃을 정도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천마는 눈을 감더니 엄지와 검을 살짝 비벼 보았다.

미미하게 빠져 나간다.

기혈을 방해하는 기류의 흐름이 있었다.

‘결계인가? 내공을 빼앗는 진법이라…….’

아무래도 묵은 공기가 오히려 눈속임이고, 이쪽이 진짜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내공 회복 속도도 느렸었어.’

포탈 게이트가 열린 뒤, 그는 내공 1갑자를 소비했다.

이후, 역혈기공으로 단번에 채워 넣었지만 그 속도가 생각 외로 매우 더뎠다.

그때는 이한의 몸뚱이가 허약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라, 이곳의 주인인 네크로맨서란 놈이 수를 쓴 것 같았다.

‘저놈도 이제 지쳐 보이는군.’

원혼들과 싸우던 흑객은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귀식대법을 쓴 채로 몬스터들이 절반하는 과정 속에서 내공 소모를 했기에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이곳의 결계 때문일 것이다.

천마가 알기로, 그의 내공은 이 정도로 부족하지 않으니까.

‘할 수 없나. 결국 이제 이 몸이 나서야… 어?’

천마의 몸을 풀리던 그때 눈길이 한곳으로 쏠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왼팔로.

“하아. 하아. 전부 죽인다.”

점점 수세에 몰리던 흑객. 호흡이 불안정해진 그의 눈빛이 갑자기 변했다. 그 순간.

척.

그가 들고 있던 검의 위치도 변했다.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잡은 것이다.

깍.

‘저건 뭐야?’

흑객이 들고 있던 야광주가,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그 덕분에 천마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흑객의 왼팔.

정확히는 팔꿈치 아래에, 뭔가가 소리 내고 있었다.

깍. 깍. 깍. 깍. 깍. 깍. 깍

이빨 가는 소리.

소리뿐만 아니라 흑객의 왼팔엔 이빨이 움직이고. 그 틈으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요수(妖獸)? 요괴(妖怪) 같은 건가?”

신령에 가까운 능력의 괴물.

그것은 현재 등급 불명의 아이템으로 불려지는 뱀파이어 이빨(Vampire Tooth)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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