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 리치왕의 무림을 부수다-22화 (23/310)

22화. 뱀파이어 이빨(Vampire Tooth) (1)

아이템 인벤토리(Item Inventory).

무림맹에서 공식으로 공표한 이 용어는 몬스터를 사냥하고 나온 품목들의 적어 놓은 것으로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아이템이 등재된다.

인벤토리 목록은 모든 학관에 공유가 이뤄지며 그 능력과 특성이 소상히 기록된다.

뱀파이어 이빨은 약, 10년 전에 등재된 아이템이다.

다만, 이것은 다른 아이템과 달리 던전에서 발견된 아이템이 아닌, 리그웨더의 조언을 받아 아이템 기록관이 임의로 인벤토리에 등재해 놓은 것이다.

“제길, 이것만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흑객은 자신의 왼팔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피 냄새를 맡자마자 반응하는 이빨.

사람의 이가 아닌, 날카로운 송곳니로 된 다른 개체(個體)의 반응이었다.

그가 천마를 따라 던전에 나설 수 있던 이유.

용병 조건에 걸어 놓았던, 던전은 한 번만 들어가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 아이템의 능력 때문이었다.

이것만 있다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신 한 몸 정도는 충분히 몸을 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말 비범한 물건이구나.

과거 태상장로와 함께 들렀던 묘산(妙山)이란 마을.

당시 그곳에는 사람의 목을 물고 감염시키는 몬스터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이것을 얻었다.

태상장로는 이 아이템의 비범함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흑객에게 이것을 건넨 것이다.

깍. 깍. 깍. 깍.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 날수록 흑객의 눈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그는 안다.

자신의 왼팔 살가죽을 찢고 이빨을 드러내는 이것은 필시 피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끈적한 이빨 사이로 흐르는 검붉은 피가 검신을 감싼다. 이 또한 피를 갈구하는 현상이었다.

도망가--.

살려 줘--.

흑객의 귓가로 밴시들의 비명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뒤이어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스톤 골렘. 두 손에 맺힌 거대한 도끼와 날붙이가 위암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흑객의 눈에는 이미 두려움은 사라져 있었다.

까아아아아-.

번쩍이는 인광(燐光)과 함께 밴시 셋이 흑객에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 맺힌 아지랑이는 저주. 필시 닿기만 해도 걸리는 종류이리라.

휘익!

그런 그들을 향해 흑객은 유형의 검기가 아니라, 그저 맨 검으로 휘둘렀다.

그런데.

끼아아아-.

히에에엑-.

그 단순한 칼질에 무리들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슬금슬금 접근해 온 레이스 무리도 똑같았다.

크아아아!

캬아아아!

흑객의 칼 질 몇 번에 대여섯 마리씩 썰려 나가며 허공에 증발했다. 틈을 이용하여 파고든 무리도 모조리 소멸되었다.

“호오.”

천마의 시선이 흑객으로, 다시 흑객의 검신으로 차츰 이동했다.

사방을 둘러쌌던 잡귀들이 단순히 휘두르는 검에 소멸하는 장면도 함께 목격했다.

“왼손이라…….”

검기 없이 잡귀를 소멸시키는 괴이한 현상도 그렇지만 흑객의 동작이 눈길을 끌었다.

검을 평소와 다른 손으로 잡았는데도 움직임은 어색하지 않았고, 어떤 부분에선 오른손을 사용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화려한 동작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왼손잡이처럼.

“검기도 끌어내지 않고 잡귀들을 소멸시키다니… 저것 때문인가?”

흑객의 팔목을 타고 검신까지 흐르는 끈적끈적한 피.

그것이 레이스나, 밴시라 불리는 몬스터들을 제거할 수 있는 원인인 듯했다.

대체 근원이 무엇이기에, 한낱 인간이 흘린 피가 잡귀를 물리치는 것일까.

“그어어어!”

잡귀가 물러나던 그때를 노린 듯 어느새 흑객의 지척까지 다가온 스톤 골렘이 육중한 망치를 집어 들었다.

뒤에는 무려 여섯 마리가 포진해 있었다.

쿵! 쿵! 쿵!

움직임은 빠르지 않지만, 압도적인 방어력을 믿고 주위부터 에워싼다. 검을 든 무사에게는 최악의 상대라 할 수 있다.

꽈----앙!

망치가 병장기와 함께 부딪치자 땅이 들썩거렸다.

그렇게 스톤 골렘의 가공할 정도의 괴력을 막아 낸 건 다름 아닌 흑객의 손이었다.

패애애애-----액!

이윽고 흑객의 칼이 스톤 골렘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휘두를 때는 흑객의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사사사사사삭.

돌을 그어 대는 칼질 소리가 셀 수 없이 이어지는 순간.

그 동작이 단순한 칼질이 아니란 걸 알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두둑.

스톤 골렘 하나가 맥없이 무너졌다.

동시에.

쿠쿠쿠쿠-쿵!

동시에 주변에 있던 스톤 골렘들의 몸도 부서지고 있었다.

최소 검기가 아니면 쓰러뜨릴 수 없는 스톤 골렘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우수수 무너지고 있었다.

구우우우-.

놀랍게도 흑객은 삽시간에 모든 몬스터를 쓰러뜨렸다.

“괜찮나?”

“…….”

천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흑객.

하지만 야광주로 인해 창백히 변한 그의 얼굴은 숨기지 못했다.

천마는 슬쩍 흑객의 검신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검기 없이 유체들을 베어 내고, 돌로 된 마물들을 그리 간단히 베어 내다니. 대체 네놈 팔에 그거 뭐냐?”

“…당신은 몰라도 된다.”

흑객은 고개를 돌렸다. 간헐적으로 미미하게 떨리는 팔을 붙잡으며 화제를 돌렸다.

“한데, 고용주. 이 던전을 계속 공략할 생각인가?”

“물론. 왜?”

흑객의 말투가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천마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되물었고, 흑객은 인상을 찌푸렸다.

“겪어 보니 확실히 알겠어. 사전 정보대로 지하 8층으로 된 곳이 아냐. 이 미궁은 최소 10층 이상이다. 이대로 계속 내려가면 나중엔 누구도 갈수록 감당할 수 없는 적이 튀어나올 것이다.”

“…흐음.”

“진심으로 충고하건대, 이쯤에서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그대의 목적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이 이상은 나도 그대를 지켜 줄 수 없어. 솔직히 버겁다.”

“흐음.”

드문드문 인광이 흘러 주변을 밝혔다. 전체적으로 어두워서 그런지 흑객의 표정은 천마의 눈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마는 그가 어떤 심정으로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나도 충고 하나 할까?”

흑객을 바라보며 천마가 말을 이었다.

“너, 그거 계속 쓰면 그놈에게 잡아먹힌다.”

“……!”

흑객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훽 돌아갔다.

천마는 그런 그를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네 왼팔에 그거. 피를 갈구하는 요괴(妖怪)다. 길들여서 쓸 수 있는 영물(靈物)이 아니란 말이지.”

“어떻게 안 거지……?”

“뭘 놀라? 지금 네 호흡부터 봐라. 귀식대법을 쓰지도 않았는데도 전혀 숨차하지 않지. 검기도 아닌데 잡귀들을 베어 버린 것도 이상하고. 이전보다 움직임이 월등히 빨라진 것 역시. 뭐, 네가 원래 왼손잡이였던 걸 감안 한다고 해도 지나치게 빠른 속도야.”

“…….”

“여튼.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네놈 상태로 들고 다니기엔 매우 위험해. 괜히 흡수하려다 잡아먹히는 시기만 재촉할 뿐이지.”

그 말에 흑객의 놀람은 더욱 커졌다.

오래전, 태상장로와 나눴던 대화가 천마의 조언과 맞물려 함께 떠오르고 있었다.

-이건 네가 착용하거라.

-제가 이리 귀한 걸 어찌 착용할 수 있겠습니까.

-애석하지만 나는 착용할 수 없단다. 이 요물은 공존(共存)을 끔찍이도 거부하니.

-그럼 저도 사용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너는 아직 내공이 많지 않아 이 요물의 눈을 속일 수 있다. 또한, 이 요물에 부합한 무공과 심법을 알려 주마. 그럼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굳이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지. 이 요물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다. 강호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더욱이 이것과 공존할 수 있으면, 이 요물이 가진 이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님…….

-우선 오늘부터는 검을 잡는 손을 바꿔라. 불편하겠지만 그것부터 시작하자.

흑객은 머뭇거렸다.

어찌 된 것인지 고용주는 자신의 동작만 보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불쾌해졌다.

마침 태상장로가 전에 남긴 조언과 같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레짐작하지 마라. 이건 너 따위가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네가 뭘…….”

“아하. 소수마공을 익힌 것도 그 때문이구만.”

“……!”

그의 눈이 커졌다.

이번에는 대충 짐작하고 말하기엔 알 수 없는 부분까지 고용주가 거론하고 있었다.

“굳이 여인이 주로 익히는 소수마공을 사용하는 걸 보고 좀 의아했지. 네 사부나 마교의 전승을 받은 누군가가 그랬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소수마공을 사용하라고.”

“…….”

“안 그래?”

이쯤 되자 흑객은 별달리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이어질 고용주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판단은 옳았다. 만약 화기(火氣)를 기반으로 한 혈수마공을 익혔다면, 그 요물은 완전히 사라지거나, 아니면 너를 죽이려고 덮쳤을 게다.”

흑객은 이제 반발심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이제는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어졌다.

“…하면, 앞으로 나는 어찌하면 좋겠소?”

아까의 고압적인 어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흑객이 이 아이템을 팔에 이식한 지 10년이 넘었다.

끝없는 무공 수련과 더불어, 익숙해지기 위해 단련을 하고 있다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무공이 강해질수록, 이 요물 역시 더욱 피를 갈구하고 있었기에.

이 요물은 본교 내 극마에 오른 태상장로도 기습으로 겨우 잡았을 만큼 끔찍한 몬스터였다.

“답이라면야 뭐, 간단해. 피를 갈구하는 놈이니 그만큼 만족시켜 주면 돼.”

“그게 무슨…….”

“그놈의 능력을 쓰고 싶은 게 아냐? 그럼 공존하는 법을 찾아야지. 원하는 것을 준 뒤에, 원하는 것을 얻는 것.”

“……?”

고개를 갸웃하는 흑객을 향해 천마는 씨익 웃어 보였다.

“잔혈마공(殘血魔功). 내가중수법으로 상대의 혈맥을 다 터뜨리는 지저분한 무공이다만, 피에 굶주리는 그놈에게는 딱 성미에 맞는 마공이다.”

“헉!”

흑객은 신음을 토해 냈다.

자신이 들은 게 확실한 건지 재차 고용주를 바라볼 정도로 그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마교 내 전설로 내려오는 잔혈마공.

현재로서는 실전된 마공으로, 이것을 연성하면 팔이 핏빛으로 변하고, 극성에 이르면 일격에 상대가 칠공으로 피를 흘리며 즉사한다고 알려진 마공.

“혹 고용주께서는 그걸 알고 계시는 겁니까?”

흑객은 이제는 존경까지 담은 눈빛을 내보이며 물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런데.

“이거였던가.”

천마가 팔을 내밀자마자 약간의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손끝으로 작은 수막이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 일어났고.

서서히 가라앉던 피부 표면이 선명해지고, 이내 기이한 핏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흑객은 너무 놀라 욕이 튀어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하니 고용주가 그것까지 익히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얼굴이었다.

“뭘 놀래. 고작 잔혈마공 가지고.”

스스스륵.

핏빛은 다시 사라지고 천마의 팔은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흑객을 바라보는데.

파팟.

“엥?”

갑자기 흑객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의 손엔 언제 들었는지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너, 뭐 하냐?”

“계약서. 아직 유효한 겁니까?”

“……?”

“이전에 말한 계약서 말입니다. 왠지 아직까지 말씀이 없으셔서…….”

“허허.”

천마는 혀를 찼다. 하지만 이번엔 흑객이 넘어가지 않는듯했다.

“줄곧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요. 던전에 들어온 것도.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도. 모두 지금 이 순간만을…….”

“잠깐.”

천마의 말에 흑객은 입을 막았다.

뭔가 자신이 실수한 것인가를 생각하던 그때.

“저기 좀 비춰 봐.”

천마가 가리키는 곳에 흑객이 야광주를 가져갔다. 희미하고 기묘한 문양.

이것은 이전에 이곳으로 이동시켜 줬던 그 상형문자.

“찾았군.”

“…예?”

“이동식 계단 말이지.”

흑객의 물음에 천마는 씨익 웃었다.

“이번엔 잘 눌러서 네크로맨서가 있는 곳으로 한 번에 직행하자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