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뱀파이어 이빨(Vampire Tooth) (3)
츠츠츠측.
지면에 솟아오른 흙가루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불과 폭발의 영향으로 사방에는 그을음과 탄내가 진동했다.
하지만 비단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쉬이이이익.
연기가 걷히자, 화마가 쓸고 간 곳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이럴 수가…….’
흑객은 입을 쩌억 벌리며 경악했다.
주위의 몬스터들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대부분 불에 타 재로 변해 있었다.
함께 몰려온 유체의 레이스나 밴시들은 자취를 감추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십 장이나 떨어진 지점에는 꿈틀거리는 몬스터들이 있었다.
불과 폭발의 힘이 마지막 순간까지 균일하게 퍼져 나가지 않은 탓이다.
‘염화공이라면… 고대의 비전이 아닌 구결로만 내려온다는 그 염화공인가?!’
절체절명의 상황에 언뜻 들었던 고용주의 말.
그는 염화공이라고 했었다.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이 몸뚱아리는 너무 약하다니까.”
흑객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천마는 투덜거리며 옷을 털어 대고 있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잿더미가 여기저기 묻은 탓이다.
“대체 고인은 누구신지…….”
더는 흑객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허풍이 아닌 자신보다 강한 자, 실력을 숨기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말투는 이미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그건 중요한 아니고. 시간이 없으니 한 번만 설명하겠다.”
천마는 고개를 돌렸다.
선발대로 보이는 몬스터, 백여 명을 몰살시켰는데도, 아직 적은 주변에 넘쳐났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는 적의 숫자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잔혈마공을 펼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는 피에 대한 갈증과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역혈심공(逆血心功). 다른 하나는 소수마공처럼 마기(魔氣)를 생성해 기공(氣功)을 펼치는 단계에서 강제로 회수해 명현(瞑眩) 반응을 일으켜야 한다.”
전장이 압도적으로 불리해서 그런지 천마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런 진지함에 흑객은 그의 말에 집중했다.
“명현 반응…….”
잔혈마공을 구결도 아니고, 대충 말로 때운다고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안다.
하지만 또 들어 보니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명현 반응.
일반적으로 병이 호전되기 시작할 때 나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는 마기를 생성하는 혈자리를 자극해 일시적으로 고통을 수반하지만, 위력을 높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앞서 말한 심공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문제는 이것이었다.
소수마공을 펼칠 수 있는 그로선 명현 반응을 만들어 내는 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피의 갈증과 욕망을 일으키는 심공은 알 도리가 없었다.
이지를 제압하는 섭선술을 자신의 몸에 쓸 수 있다면 몰라도.
“그건 더 쉽지. 너를 도와 줄 놈들이 도처에 널려 있잖아.”
“예? 그게 무슨 말… 아!”
천마의 말에 흑객은 빠르게 이해했다.
주변의 언제든 저주를 퍼부을 준비에 있는 정신 계열의 몬스터들.
저들에게 저주를 당해 심마에 빠지는 방법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딤 비전 같은 특성 저주에 정통으로 걸린다면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스스로 자멸하거나, 누군가를 죽이거나.
“그러다 자멸한다면…….”
“또 온다.”
가아아아아-.
천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준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엔 단순히 해골들이 떼로 덤벼들지 않았다.
-갸르우빈다!
네크로맨서가 손을 들어 괴어를 외자 이번엔 수십 마리의 스켈레톤 메이지들이 반응했다.
그들은 지팡이를 들어 기이한 기운을 생성해 냈고, 싸늘한 한기가 그 끝에 맺히기 시작했다.
“별 같잖은 것들이 사람 피곤하게 하네.”
천마는 좌우로 움직이며 목을 푸는 시늉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시선을 좀 끌 테니 너는 저놈하고 놀아.”
“……?”
흑객의 고개가 옆으로 움직였다.
고용주는 조금 전, 자신과 싸웠던 데스나이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혼자서는 쉽지 않은…….”
“수고.”
팟.
흑객이 채 말을 끝나기도 전에 천마는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엔 적들도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주문을 끝마친 스켈레톤 메이지들이 천마를 향해 동시에 마법을 발산했다.
-사아아악!
쩌어어엉!
공중에서 눈보라와 한기 서린 냉기가 뒤엉켰다.
그리고 그 중심은 곧바로 얼음으로 고착되었다.
수십 명이 공중에서 아이스 애로우(Ice Arrow) 마법을 펼친 결과물이었다.
쿵.
거대한 얼음이 떨어지며 곧바로 깨져 버렸다.
하지만 거기엔 천마는 없었다.
“여어.”
“……!”
스켈레톤과 스켈레톤 메이지 사이에 나타난 천마가 씨익 웃고 있었다.
일시에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모이던 순간.
“그런 건 이렇게 쓰는 거야.”
천마가 휘두른 검 끝에서 빙백(氷白)의 쏘아져 나갔다.
그 기운은 앞에 있던 스켈레톤의 목을 뚫고, 뒤에 있던 레이스의 몸통을 관통하며, 조금 떨어져 있던 스켈레톤 메이지의 머리까지 파고들었다.
투투툭.
쓰러진 세 명이 맞은 부위는 완전히 얼음으로 굳어 버렸다.
“뭘 봐?”
수천 군세의 중심으로 들어온 천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아아아악!
-카아아악!
사방에서 득달처럼 달려들고. 공중에선 레이스와 밴시들이 사이한 저주를 쏟아냈다.
동시에 천마의 검 끝에는 불꽃이 피어 나왔다.
이번엔 혈수마공이었다.
* * *
“허…….”
흑객은 충격을 넘어 넋을 놔 버렸다.
경천동지할 무공을 펼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수천의 군세 중심으로 아예 들어가 버렸다.
얼마나 확고한 자신감이 있어야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저리 무식하게 싸우다간 결국엔… 헉!”
흑객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별(丿) 모양으로 스쳐 지나간, 흔적을 내려다봤다.
-흐흐흐흐.
“젠장할.”
정말 한 끝 차이였다.
부지불식간에 달려든 데스나이트의 일격을 흑객은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데도 불구하고 저리 기민한 움직임은 그로 하여금 더욱 전의를 불태웠다.
“하앗!”
이번엔 흑객이 먼저 공격했다.
팟.
그는 자리를 도약하는 즉시 어떠한 동작 없이 검기를 뿌렸다.
이히힝.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데스나이트가 순간적으로 몸을 낮춰 공격을 피해 냈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었다.
공중을 밟고 뛰어오른 흑객의 2차 공격.
소수마공으로 생성된 한기의 마공이 광범위하게 쏟아졌다.
쩌어어어엉!
도처에 냉기가 뿌려지던 가운데 데스나이트가 이번엔 솟아오르며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 자세에서 곧장 반격을 하려는지, 데스나이트는 치켜든 대검 주변으로 어둠의 기운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흑객 역시 비장의 한 수를 준비했다.
“귀영혈류공(鬼影血流劍功)!”
지지지직.
바닥을 딛자마자 생성한 기운.
이번엔 흰빛이 아닌 어둠. 아니, 약간의 자색을 띤 기운을 생성한 것이다.
“하앗!”
-키아아!
콰르릉!
두 개의 공력이 허공에 부딪히며 우레와 같은 소음이 터져 나왔다.
거의 대등한 힘으로 공중에서 두 기운이 자멸한 듯 보였다.
하지만 자색의 기운이 조금 더 빠르게 소멸되자 폭발의 여파는 데스나이트가 아닌 흑객에게로 밀려 나갔다.
“마천육신갑(魔天肉身鉀)!”
흑객은 외가기공(外家氣功)으로 방어했다.
몸 안의 내공을 모조리 끌어올렸기에, 육신을 보호하는 수법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크악!”
하지만, 두 개의 공력이 워낙 강한 탓에 외가기공으로도 폭발을 온전히 막아 내지 못했다.
소멸되는 힘의 폭발만으로도 흑객을 자리에서 삼 장이나 밀어 낸 것이다.
“컥… 커억.”
바닥에 주저앉은 흑객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해 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한번 주저앉았고, 어지러움으로 인해 들고 있던 검도 놓쳐 버렸다.
“8급이 아냐. 이 정도면 위험 등급 9급 이상의 몬스터…….”
흑객은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예전에 상대했던 데스나이트와는 격이 다르다.
혼자 걸어다니던 그놈과 달리, 그저 뼈 말을 타고 있을 뿐인데도 데스나이트가 뿜어내는 위암감이 엄청났다.
단순히 싸워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인정해야 했다.
‘어……?’
흑객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어느새 자신 곁에 온 밴시 한 마리. 어딘가 다른 놈들과 생긴 것이 달랐다.
낫을 들고 다리가 없는 몸으로 자신의 머리 위로 뭔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밴시 대장이다. 빨리 죽여야…….’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려 하던 흑객의 동작이 멈췄다. 순간적으로 조금 전, 고용주가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간의 멈칫하던 그때는 이미 늦었다.
“디프레션…….”
웅얼거리는 듯 밴시의 목소리를 정확히 들었다.
그리고 그걸 인지했을 때부터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죽을 거다. 저놈들이 너를 죽이러 올 거라고!
-죽으면 끝이야. 그냥 끝이라고. 너란 존재가 없어진다고!
-살아날 수 없어! 죽는다고! 여기서 죽는다고!
-죽는다고! 죽는다고! 죽는다고! 죽는다고! 죽는다고! 죽는다고!
“그아아…….”
전혀, 어떤 계기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은 흑객의 머릿속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그가 처음 느껴 보는 이 거대한 공포는, 자신이 바라보던 대상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그를 향해 다가오는 스켈레톤.
평소라면 쉽게 목을 베어 낼 수 있음에도 그를 본 흑객의 눈에 강한 공포가 맺혀 있었다.
죽음, 공포, 욕망.
그것들은 피하지 못하고, 얻지 못한다는 두려움의 형태로 변해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고, 근원적인 삶의 욕구를 집중해서 건드리고 있었다.
“아아.”
흑객의 주위는 이미 다가온 스케레톤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눈은 이미 인간의 이지(理智)를 잃어 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죽음에 순응하는 형태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키이이이.”
“가르르륵.”
울음소리가 퍼지자 흑객은 몸을 흡사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공포와 두려움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저 힘없이 손을 들며 말을 겨우 이어 나갔다.
“날 살려…….”
그 순간. 흑객의 눈에 당혹감이 떠올렸다.
희뿌연 시야 속에서 익숙한 청년의 눈빛을 본 것이다.
-죽지 않는다.
“……!”
-공포는 널 괴롭고 미치게 만들지만 죽이지 못해. 그걸 자각하면 공포를 하나의 적으로 인지하게 될 거다.
‘지금 이것들이 적이라고?’
한없이 무기력했던 흑객의 눈빛에 약간의 기광이 감돌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보이지 않는 이것이 지금 싸워야 하는 적의 실체라면.
그럼 어떻게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카악!”
때마침 눈앞에 덤벼드는 스켈레톤과 스톤 골렘.
내려치는 몬스터를 향해 흑객은 어깨로 강하게 밀어 버렸다.
쩌억.
“키아아아!”
작은 저항이 몬스터들의 야성을 발동시켰다.
주위를 에워싸던 몬스터 수십 마리는 완전히 흑객의 자취까지 집어삼켰다.
카직! 퍼퍽! 퍽!
십여 마리의 레이스들의 저주들이 허공에서 펼쳐지고, 검과 도를 찔러 넣는 스켈레톤,
위에서 망치로 찍어 대는 스톤 골렘까지.
피육이 조각날 때까지 그들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북적대며 칼질하던 어느 시점쯤.
중심에서 희미한 빛 한 줄기가 새어 나오더니, 광풍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쩌어어어엉! 짜르르륵!
소수마공.
소용돌이 방향으로 튕겨 나가며 얼음으로 굳어 버린 그들의 몸은 바닥에 닿는 순간 산산이 깨져 버렸다.
“하아아. 하아.”
에워싸던 공간의 중심에서 흑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눈에 초점이 없고 온몸에 피 칠을 한 상태에서도 그는 숨 쉬고 있었다.
다다닥 다다닥.
하지만 그 모습은 더 강한 적을 불렀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데스나이트가 움직인 것이다.
“적… 내가 죽여야 할…….”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든 흑객.
데스나이트의 거대한 대검이 치솟는 가운데서도 그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었다.
“으오오오!”
데스나이트의 검에 마력이 담기며 자신의 앞에 쏟아질 때였다.
“저놈을 죽여야 내가 살…….”
순간, 흑객의 눈에 어린 빛이 흐려졌다.
한 줌 있던 내공을 끌어올리다 그만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스윽.
그런데 의식을 잃은 흑객은 놀랍게도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힘없이 떨어지던 오른팔이 아닌, 다른 팔이 올라간 것이다.
까가가가강!
데스나이트 검은 어둠의 마법과 함께 흑객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단순한 풍압만으로도 주변을 밀어낼 정도로 고위급 마법의 힘.
어둠의 힘이 지면을 뒤흔들었다.
“흐어?”
데스나이트는 처음으로 신음을 흘렸다.
둘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검이 흑객의 몸을 베어 내지 못한 것이다.
바로 흑객의 왼팔 때문이었다.
깍. 깍. 깍. 깍. 깍. 깍. 깍. 깍. 깍.
그것은 흡사 상어 이빨 형태.
흑객의 왼팔을 감싼 그것이 상대의 일격을 막아 냈다.
그것도 데스나이트의 검뿐만 아니라 고위급 마법이라 불리는 어둠의 힘도.
까악.
등급 불명의 아이템이라 불리는 뱀파이어 이빨.
첫 번째 각성의 순간이었다.